사일런트 게이트웨이 제 18장
제18장. 흔들리는 왕도, 그리고 혁명의 그림자
전장에는 잠시 휴식기가 찾아온 듯했지만, 거대한 소용돌이는 이제 막 기세를 더하는 중이었다. 하민이 이끄는 ‘미래 군세’는 탐라에서 넘어와 개경 근교 나성을 사수했고, 첫 전투에서 한 명의 부상자 없이 몽골군을 대파하여 도합 800명을 사살·400명을 포로로 잡아들이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 충격파는 하룻밤 사이로 사방에 퍼져나갔고, 고려 땅은 물론,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까지 파문이 일었다.
하민은 “부상자는 치료, 포로는 감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승으로 이미 기세가 올라 있었으나, 무의미한 학살은 원치 않았다. 이번 전투는 드론과 장거리 화력(대포·연사 세뇌)으로 몽골 기마대를 무력화한 결정적 사례가 되었다. 완전히 다른 양상의 전투였다.
빠른 기동력을 자랑하던 몽골 기병들은, 드론과 대포·세뇌(8연발 석궁)라는 낯선 무기 앞에서 좌중지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후방의 기병조차 화약 폭탄(드론 투하)에 길을 잃었고, 성문으로의 후퇴마저 뒤엉켜 몰살당한 꼴이 되었다.
안무사 이지광은 하민에게 “이 소식이 어디까지 퍼질지” 묻자, 하민은 “성 안에서 일부 도망친 자들이나 마을에 남아 있던 세작들이 몽골 측, 혹은 강화도의 최우에게 알릴 것”이라 했다. 이미 고려 전역에 “하늘이 내려온 상제님이 몽골을 무찔렀다”는 식의 이야기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나성 주민들은 전투 직후 대포 소리를 들으며 무섭던 몽골군이 일거에 제압되는 걸 보았으니, 하민을 정말 ‘상제’로 떠받들었다.
하민 측은 덤으로 감자·옥수수 등 탐라에서 가져온 작물을 나눠주어 민심을 사로잡았다.
“이제는 강화도를 설득해야 하나, 아니면 이 나성에 머물러 몽골을 막아야 하나….”
하민이 고민하는 사이, 이지광이 의견을 내놓았다.
안무사 이지광은 “제가 강화도에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이규보)가 그곳에 계시니, 왕실(고종)과 최우에게도 상제님 이야기를 전해볼게요”라며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하민은 우물쭈물하기보다 “3개월간의 시간을 확보하자”는 타노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몽골군은 패전을 반드시 보복 하지만, 이미 유럽 원정과 남송에 병력을 많이 투입해 보급이 분산되고 있습니다. 본격 침공을 준비하려면 최소 3개월이 걸릴 거라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옵니다.”
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린 3개월 동안 병사와 민심을 더 모아야 해. 지금 갈등만 벌어놓으면, 강화도와도 애매해질 테니 우선 나성 중심으로 세를 확대하자.”
하민이 예상한 대로, 나성 전투 소식은 빠르게 강화도까지 전해졌다. 고종과 최우는 몽골에 쫓겨 강화 천도를 했지만, 사실상 병권을 쥐고 있는 자는 무신 최우였다. 그런 최우가 작금의 사태를 좌시할 수 없어서 고종을 면담하며 나성전투 이야기를 꺼냈다.
“몽골이 굴용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가만둘 리가 없습니다. 몇 배 병력으로 복수하러 올 텐데, 굳이 우리가 나성에 파병해 돕거나 배후를 치는 건, 아직 시기상조입니다.”
“경의 생각대로 하시오. 지금 나성을 되찾은 자의 군세를 이용하거나, 몽골군을 약화시키는 게 좋을 것 같소.”
즉, 강화도는 관망세를 유지하기로 하고, 나성의 하민과 몽골이 싸우다가 몽골군이 약해지면 그때 상황을 보겠다는 식이었다.
한편, 몽골의 오고타이 칸도 이 소식을 듣고 대노했다.
“우리 몽골제국이 어찌 고려의 미지의 군대에게 수모를 당한다는 말인가? 3차 침공 때 고려 전역을 휩쓸었던 그 기세를 잊어선 안 되겠다.”
탕구타이 장수가 2만 병력을 요청하며 “고려를 다시금 짓밟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보급 담당 부카가 “수부타이와 제베가 유럽정복에 나서고, 남쪽은 차가타이가 남송에 매진 중이라 당장 병력을 모으려면 적어도 3개월 걸린다”고 보고했다.
오고타이는 당장이라도 치욕을 갚아 주고 싶었지만 현실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뒤로 물러나며 이야기 했다.
“3개월 뒤 그들을 멸해버리겠다!”
결국 타노스의 예측대로 ‘몽골군 복수’ 시나리오는 3개월 후로 확정되었다.
타노스와 이야기하고 우선 나성 정비에 들어간 하민은 이지광을 보며 나성관리와 민심에 대해 관리지침을 내렸다.
“우리는 3개월 동안 병사와 민심을 모으고, 무기와 병참을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이지광도 흔쾌히 동의하며, 곧 주변 마을 주민이나 외곽의 잔여 고려군을 흡수하기 위해 적극 움직였다. 하민이 탐라에서 하던 전략처럼,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작물을 나눠주고, 무역품을 일부도 나눠줬다. 그리고 “몽골군 다시 쳐들어올 테니, 여기서 다 함께 대비하자”는 내용으로 위기 벽보를 붙이고 알렸다.
하민의 증기기관선이 활약 중인 덕분에, 탐라와 나성 사이 해상 보급선이 원활해졌다. 한영석이라는 병사를 대표 선장으로 임명하고, 샛별(GPS) 신호를 잡는 라이딩 속도계를 주어 항해를 더 정확히 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영석과 증기기관선의 활약으로, 탐라에서 생산되고 수입되는 철광석과 화약 재료, 그리고 공방 기술자가 매주 2척씩 배를 타고 나성으로 들어왔다. 화약·포탄도 나성 현지에서 충분히 제조할 수 있게 되었고, 대포와 탄환도 순조롭게 늘어났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몽골군이 3개월 뒤 무조건 온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고려 각지에서 “몽골군을 무찌른 신기한 병기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젊은이들이 속속 나성으로 몰려왔다. 하민의 병력은 날로 증가해, 제우가 훈련하는 군사는 이미 수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탐라를 통해서도 계속 철광석이 들어왔고, 대포·포탄·화승총·세뇌(8연발 석궁)도 탐라에서 제작되어 계속 늘어났다.
두 달 후, 이제 나성 분위기가 한껏 고무되던 시점에, 이지광의 아버지인 이규보가 강화도에서 서신을 보내왔다. 최우가 “이지광을 강화도로 불러들이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그 이유는 직접 눈으로 하민(상제)을 봐도 좋고, 혹은 본심을 떠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아들아, 최우대감이 너를 보고 싶어 하니 한 번 올라오거라. 너 역시 강화도로 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떠냐.”
사실상 최우가 나를 통해 하민을 포섭하거나, 동태를 살피고자 하는 목적이라고 이지광은 짐작하며 하민에게 말했다.
“저 혼자 가서, 아버지와 최우를 만나 뵙고 사정을 살펴볼까 합니다.”
하민은 곰곰이 고민하다, 새로운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직접 강화도에 들어가 보는건 어떨까요?” 그것이 혁명을 더 빨리 앞당기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민은 이지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달간의 준비로 전력이 충분히 강해졌고, 빨리 왕실과 무신 정권(최우)에게 내 존재를 알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탐라 관청이 내 말을 따르는 과정, 기억하나요? 나도 처음에는 은근히 우회했지만, 결국 빠르게 압도적 힘을 보여주고 지도층을 설득했던 편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강화도의 최우와 왕실은 탐라와 차원이 다릅니다.”
“오히려 차원이 다르다면, 우리 편으로 만들거나 무너뜨리는 것도 더 빠르게 해야 합니다. 긴 시간 끌수록 몽골군의 대규모 침공만 기다리게 되지. 그럼 민초들만 더 고통받게 됩니다.”
하민은 하루라도 빨리 “혁명적 변혁”이 필요함을 느꼈다. 타노스의 조언대로 자원과 무기를 모으고 있지만, 단지 몽골군과 부딪히기만 하는 것으로는 목표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 조정” 자체를 흔들고, 왕실과 무신 권문세족의 기득권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이 나라는 결코 평화롭지 않을 것이다.
“당장 내일 출발하시죠. 강화도로.”
하민이 단호히 말하자, 이지광은 순간 경악했다. “상제님, 너무 위험합니다. 최우가 음모라도 꾸민다면…!” 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하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일에 위험이 없는 방법은 없습니다. 시간을 끌면 더 많은 혼란이 옵니다. 지금이 내가 움직일 때 입니다.”
이지광은 상제(하민)의 의지가 흔들리지 않음을 느꼈다. 초조함이 치솟지만, 동시에 지난 7개월 동안 하민이 보여준 “압도적 무력”과 “기술 혁신”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튼, 하민은 “혁명을 더 빠르게 펼쳐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에 불을 붙였다. 이지광은 안무사로서, 탐라에서 하민이 어떻게 기득권을 유화적으로 포섭하고 동시에 권력을 장악했는지 봐왔지만, 고려 본토 권문세족과 무신정권은 훨씬 더 거대하고 교활하다.
“그래도… 상제님이 간다면, 내가 반드시 곁에서 보필하겠습니다.”
이지광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나성을 떠나 강화도로 가려면, 이미 확보한 해안 항로나 육로를 선택할 수 있다. 하민은 다음 날 트럭과 소수 병사, 그리고 옵티머스·타노스를 이끌고 간단히 출발할 작정이었다. 무기나 포탄은 전부 가져갈 수 없으니, 증기기관선 한 척 정도를 운용해 해로로 이동하거나, 트럭을 끌고 육로를 가는 방법 중 결정하기로 했다.
강화도로 출발하기 전 하민은 트럭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몽골군은 3개월 뒤에나 도래한다. 그 전에 강화도와 왕실의 태도를 확인하고, 만약 안 맞으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이미 자신에게는 “압도적 화력”과 “충분한 병력”이 있고, 민심 또한 길게 끌면 몽골에 시달리는 사이에 나성이나 다른 지역이 피폐해질 수도 있다. 빠른 혁명으로 왕실과 무신 권력 구조를 장악하는 편이, 백성을 지키는 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형준이 하민 곁으로 다가왔다.
“주인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언제든 출발 가능합니다.”
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길게 펼쳐진 개경의 풍경 너머, 남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육로가 어슴푸레 시야에 들어왔다. 그 길 너머, 강화가 있었다.
“혁명은 늘 위험 속에서 시작된다.”

(18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