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게이트웨이 제 3장
제3장. 좌표, 그리고 선택의 길
낡은 모니터 위로 반짝이는 지도가 떠올랐다. 하민은 좌표를 계속 확인하며 지명을 대조해보다가, 마침내 '애월 창고’라는 단서를 얻게 되었다. 한때 여행객들로 북적이던 제주도 애월 해안가 근처였다. ‘설마 이런 곳에 타임슬립의 관문이 숨어 있을 줄이야….’ 하민은 혼잣말을 뱉고 나지막이 웃었다. 전쟁과 폐허, 기후 파괴로 뒤덮인 2030년의 세상. 하지만 이 황량한 현실 속에서도, 고작 좌표 하나가 그의 마음에 마지막 남은 희망의 불꽃을 지피고 있었다.
하민에게는 꽤나 남다른 자산이 있었다. 그 자산은 다름 아닌 비트코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라면 못 하는 게 없다’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면을 팠던 하민은, 아버지와 함께 비트코인 초창기부터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2024년 트럼프의 당선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그들은 보유한 모든 코인을 달러로 전환해 버렸다. 그 결과, 한 개인이 감당하기엔 말도 안 될 정도의 달러 자산이 손에 들어왔고, 하민은 이를 기반으로 AI·해킹 기술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한 개인 연구소와 AI가 탑재된 옵티머스 구매하고 실험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미국 CIA AI연구소에 지원해서 발탁되어 몇 년간 미국과 한국의 AI자산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2030년 현재, 하민은 무려 12대의 신형 옵티머스와 예비 부품들을 마련해뒀다. 그것도 웬만한 군부대 수준의 무장을 지원할 수 있는 강화 모듈까지 갖춘 특별 사양이었다.
“전쟁이 터져도, 기후가 망가져도, 이 열두 녀석만 있다면 최소한 내 안전을 지켜줄 수 있겠지.”
하민은 매번 자조적으로 중얼거렸지만, 사실 그 속에는 그보다 훨씬 큰 포부가 있었다. 이 로봇들을 통해 폐허가 된 미래를 개척하거나, CIA 연구소에서 알게된 타임슬립 실험으로 아예 과거로 돌아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겠다는 꿈이었다.
그는 또한 소형 원자로를 입수해 둔 상태였다. 미 국방부에서 실험적으로 운용하려던 5MWe급 모듈형 원자로를, 비밀 루트를 거쳐 ‘산업용’ 명목으로 손에 넣은 것이다. 대형 크루즈를 5개월 동안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전력이라면, 전쟁 상황은 물론 미래로의 큰 프로젝트도 거뜬히 추진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는 그 원자로를 전용 케이스에 담아 대형 트럭에 탑재했고, 그 트럭에는 AI를 구동할 고성능 저장장치, 랩탑·태블릿, 옵티머스가 활용할 무기 부품, 대용량 3D프린터와 재료, 각종 의약품까지 꼼꼼하게 실어놓았다. 핵전쟁이든 대재앙이든 닥쳐도 ‘이동식 벙커’처럼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준비한 셈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하민은 목포에 정박한 전세 화물선을 통해 자신의 트럭과 장비, 로봇들을 제주도로 옮길 계획이었다. 전쟁통에 그나마 화물선을 구한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겉보기에 그는 그저 ‘고액 자산가’ 혹은 ‘별종 괴짜 투자자’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돈, AI, 무기, 원자로… 이 모든 것들을 동원한다면 작은 시설 하나쯤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민은 차창 밖으로 삭막한 도심을 바라봤다. 거리는 여전히 방독면을 쓴 이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고, 세워진 군용 차량 몇 대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허나 곧 이곳도 어쩔 수 없이 ‘종말’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월의 창고가 보여줄 미지의 길은 과연 어떤 풍경일까? 과거로 돌아가 이 파멸을 막을 수 있을까?
트럭 엔진이 낮게 울리는 중, 하민은 결심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제주도… 어쩌면 그곳이 마지막 승부처가 될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그는 트럭에 탑재된 AI '타노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목적지는 목포 항구" 트럭은 자율주행으로 건물잔해로 부서진 길을 헤치며 목적지인 목포로 향했다. 이제 그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단서를 쥐고, 또 다른 무대로 향하려고 한다. 이렇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 앞에서 그저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건 그의 성향에 맞지 않았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