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게이트웨이(창작 웹소설)

사일런트 게이트웨이 제 9장

3시 모모(3PM Momo) 2025. 2. 23. 07:51

제9장. 열려버린 문, 그리고 새로운 바다

 

지하로 이어지는 화물 엘리베이터가 낮게 굉음을 내며 서서히 문을 닫았다. 하민은 운전석에 앉아, 트럭의 엔진 소리보다 훨씬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기계음에 신경이 곤두섰다. 고개 너머로 보이는 콘크리트 벽에는 “사일런트게이트웨이”라는 큼지막한 표식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어쩌면 이 지하 깊숙한 공간이 지금 인류가 가진 가장 수상쩍은, 그리고 가장 혁신적인 실험무대가 될지도 몰랐다.

 

오늘 아침, 하민은 마이클 김을 만나고 난 뒤  함께 이 시설의 정문에 도착했다. 겉으로 보기에 여느 군사시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주변 경계는 놀랍도록 삼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민은 손쉽게 진입할 수 있었다.

 

“수완이 좋으시네요, 마이클.”
하민이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환하게 웃고 있는 마이클 김에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된 거죠? 군경, 보안요원, 심지어 빅테크 쪽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가만히 있던데.”

 

마이클은 크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이라는 게 결국 목적이 같으면 협력하게 마련입니다. 이들이 원하는 건 데이터죠. 살아 있는 시공간 전이의 성공 사례를 만들고 싶어 해요. 물론 그게 위험이 크니까 사람을 대상으로 할 수 없었죠.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어요.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진다고."

 

하민은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약간 긴장했다.
‘목적이 같으면 협력한다… 빅테크든 군부든, 결국 이 실험이 성공하기 전까진 서로 윈윈이라고 보는 거겠지. 성공하면 그들은 또 어떤 움직임을 보일까?’

 

마이클이 묘하게 이 말을 붙였다.
“혹시 생각이 바뀐 건 없어요?”
“글쎄요.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계속 가죠. 이제 이쪽에서는 별 검문 없이 통과될 겁니다.”

 

정말로 마이클의 말대로, 시설 입구에서 군인들이 운전 면허증이나 간단한 신분증만 확인하고는 트럭을 곧장 들여보냈다. 그들은 하민이 무슨 실험을 하러 왔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으나, 꺼림칙하거나 의심하는 기색이 거의 없었다.

 

“상부 지시가 있었나 봐요.”
하민이 엔진을 끄고 잠시 나직이 중얼거렸다.
“목적은 같으니, 나를 적극적으로 막을 이유가 없는 거지.”

 

그렇게 들어선 정문 뒤편, 사일런트게이트웨이의 내부는 예상보다 더 거대했다. 콘크리트와 철벽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시설 한가운데, 초대형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경고등이 번쩍이는 그 무대 위로 하민의 트럭이 올라섰다. 주변 군인들은 몇 마디 짧게 무전을 주고받다가 하민에게 손짓으로 “내려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제주도 지하에 이런 설비가 있었다니….”
하민은 트럭 유리창 너머 천장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군사용 지하벙커 수준이 아니잖아. 항공모함 하나쯤 들어와도 될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자, 철문이 천천히 닫히고 어두운 지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묘한 압박감이 들었다. 형준(남성형 옵티머스)이 조용히 보조석에서 일어섰고, 미지(여성형 옵티머스)는 센서로 주변을 살폈다. 트럭 적재함에 대기 중인 나머지 10대 옵티머스는 전력 절약 모드로 잠들어 있었다.

 

약 2분간 이어진 진동. 엘리베이터가 ‘지하 7층’에 도달했을 때, 굵은 쇠문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방사능 위험 경고’ 표지와 생화학 테러 대비용 장비들이 곳곳에 비치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군사와 빅테크가 협력하는 극비 연구시설답네요.”
하민은 입술을 깨물며, 긴 통로를 따라 천천히 트럭을 몰았다.

 

통로 끝에 도달하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진영 박사였다. 하민이 트럭에서 내리려는 찰나, 그녀가 먼저 다가오더니 빠르게 말을 건넸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 하민 씨.”
“이렇게 된다니요?”
“당신이 흔들릴까 봐 걱정했어요.”

 

이진영 박사는 서류철과 태블릿을 꺼내 들어, 휙휙 넘겨보였다.
“실험실 문으로 가시고 문이 열리면 거기에 트럭을 통째로 몰고 들어가 주세요. 이미 인공위성·로켓 부품들도 다 적재했어요. 이제 한 번에 갈 겁니다.”

 

하민은 뒷목을 한 번 주무르며, “정말 실감이 안 나네요. 이게 진짜로 가능한 건가…”라고 중얼거렸다.

 

이진영 박사가 살짝 미소 지었다.
“실패할 수도 있죠. 하지만 일단 거기서 실험실 문이 닫히고, 사일런트게이트웨이가 작동되면… 아마도 행운의 여신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이진영 박사의 지시에 따라 하민은 트럭을 몰고 실험실 안으로 들어갔다. 실험실 내부는 겉보기엔 단순한 직사각형 철제 박스처럼 보였지만, 벽면 곳곳에서 묘한 에너지 회로와 금속제 코일들이 빛나고 있었다.

 

실험실 한쪽에는 소형 인공위성 한 기와 그것을 쏘아올릴 소형 로켓이 해체 상태로 결박되어 있었다. 로켓 연료 탱크, 제어 모듈, 추진 엔진 등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으며, 빅테크 로고가 박혀 있었다. 하민은 그 위성 위에 새겨진 복잡한 안테나와 센서들을 유심히 보며, 문득 속마음을 털어놓듯 중얼거렸다.

 

“저걸 쓸 일이 있을까?”

 

과거로 돌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증명된다면, 향후 이곳(2030년의 현대)에서는 엄청난 파급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시공간의 단절로 인해, 과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당장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직 위성만이 지금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다리가 될 테니까.

 

그 순간, 이진영 박사가 트럭 창문으로 몸을 기울여 작은 USB 형태의 디바이스를 내밀었다.
“지금 당장 다운로드받으세요. 여기 안에 ‘실험실 해제 후 밖으로 나가는 방법’과 ‘인공위성 발사 매뉴얼’이 전부 들어 있습니다. 사일런트게이트웨이가 한 번 작동하면, 이후엔 외부와 통신이 안 되니… 반드시 지금 정보를 받아둬야 해요.”

 

하민은 재빨리 그 디바이스를 받아, 노트북에 꽂았다. 그리고 자체 보안이 걸린 디지털 문서들을 풀며 확인했다.

 

 

실험실 문 수동 해제 절차: 전송이 끝난 뒤, 특정 코드를 입력해야 문이 안전하게 열린다.

 

시공간 전이 후 생길 수 있는 ‘시차 배율’ 문제: 시간축이 어긋나거나 공간 일부가 뒤틀릴 수도 있음.

 

 

하민은 혼잣말로 “헉, 이거 장난 아닌데…”라며 여러 파일을 쭉 스크롤했다.
‘정말 모든 게 준비 되었구나.’

 

마이클 김이 실험실 입구 쪽에 서서,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민을 쳐다봤다.
“보시다시피, 이제 실험실 문 닫으면 끝입니다. 돌아갈 기회는 없습니다.”

 

하민은 잠시 숨을 골랐다. 만약 이 순간 ‘못하겠다’고 손을 들면 어찌 될까? 아마 군이나 빅테크가 그를 강제로 어디론가 격리하거나, 혹은 그저 이 모든 걸 무산시키고 달리 실험 참가자를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였다.

 

“……전 이미 각오했습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마이클이 이진영 박사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근처 제어실에서 누군가가 무전을 날렸다.
메인제어실,사일런트게이트웨이준비완료.언제든가동가능합니다.메인 제어실, 사일런트게이트웨이 준비 완료. 언제든 가동 가능합니다.메인제어실,사일런트게이트웨이준비완료.언제든가동가능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이진영 박사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갑작스레 실험실 내부 조명이 어두워졌고, 벽면 곳곳에서 푸른 전류가 가로지르는 현상이 눈에 띄었다.

 

외부에서는 높은 음역의 전자음과 함께, 사일런트게이트웨이의 코어가 가동되는지 거대한 기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콘크리트 벽이 진동하는 느낌이 트럭 바닥까지 전해졌다.

 

“하민 씨, 실험실 문을 닫으세요.”
스피커가 다시 한 번 울렸다.

 

하민은 운전석에서 내려 대형 실험실 문의 레버를 힘껏 당겼다.
쿠웅— 철문이 축을 따라 서서히 움직이며 완전히 닫히자, 바깥 세상과의 빛이 사라지고, 완전한 어둠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형준, 미지. 로봇 센서는 정상 작동하니?”
"네, 주인님. 열원감지 이상무." (형준)
"전류 변동이 강합니다. 아마도 전송 임계치에 가까운 전력량으로 추정." (미지)

 

그때, 윙— 하고 귀를 찌르는 듯한 음파가 온 실험실에 울리기 시작했다. 순간 트럭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고,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물건들이 덜컹대었다. 짧은 비명 같은 피드백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오더니, 바로 뒤이어 낮은 중저음의 공명이 이어졌다.

 

“으악…!”
하민이 몸을 붙잡고 견디는 사이, 나머지 10대 옵티머스가 갑자기 몸체를 세워 자세를 잡았다. 시스템이 충격에 반응해 ‘보호 모드’로 전환된 듯했다.

 

그 와중에 하민은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현기증을 느꼈다. 격렬한 전자기 충격인 것 같았다. 타노스의 디지털 창에서 온갖 오류 메시지가 떴다가 사라졌다.

 

단 몇 초였을까, 혹은 1분이 넘었을까. 폭풍 같던 진동이 멎자, 무서우리만치 고요해졌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게 정말 성공인가, 실패인가?’ 혼란스러울 순간이었다.

 

실험실 내부는 여전히 어두웠고, 전력 공급이 불안정한지 비상등이 깜박깜박 거렸다. 하민은 식은땀을 흘리며, 미지를 향해 외쳤다.

 

“미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체크해봐!”
"현재 시스템 시계기준으로 약 5분 경과 했습니다."

 

5분… 사일런트게이트웨이가 작동한 뒤, 이렇다 할 경고도 없고, 뭔가가 완전히 끝난 것 같은데, 이 상태가 진짜 ‘과거’인가, 아니면 여전히 2030년 지하실 안인가?

 

하민은 숨을 몰아쉬며, 테블릿 스크린을 확인했다. 더 이상 오류 메시지는 없고, 시스템은 ‘안정화’ 상태로 표시되고 있었다.

 

그 순간, 소리 없는 정적이 찾았다. 바깥에서 기계음이나 사람이 떠드는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았다. 방사능 경보 사이렌도, 엘리베이터 울림도, 환기 장치 소음도 없었다.

 

“이상하잖아. 분명 우리가 오기 전까지도 계속 기계들이 가동되고 있었는데.”
하민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실험실 벽 하나 두고 완벽히 차단될 수 있나?”

 

"실험실 외벽을 통해서는 전파나 소리 등이 거의 감지 되지 않습니다.내부 기압은 안정적이며, 산소 농도도 괜찮습니다."

 

“좋아….”
하민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실험실 문 해제 레버로 다가갔다. 이게 혹시 미완성된 상태에서 열면 어떡하나 고민했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이미 실험은 끝났고, 결과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실험실 문을 해제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이진영 박사가 준 디지털 문서에 적힌 코드를 입력하고, 손잡이를 몇 바퀴 돌리니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철재가 마찰되는 우웅— 하는 소음이 몇 초간 이어졌다.

 

그렇게 문이 반쯤 열렸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람이었다. 단순한 지하 시설의 인공 바람이 아니라, 해풍 특유의 짠 기운. 그리고 따스하고 신선한 바람이었다.

 

“이게 말이 돼?”
하민은 경악하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파랗게 펼쳐진 바다, 그리고 햇살이 부서지듯 반짝이는 수평선이 보였다. 어디서 본 듯한 해안 절벽이 시야 한편에 자리하고, 눈부신 태양광이 상쾌하게 몰아쳤다.

 

분명히 이곳은 ‘제주도’처럼 보이긴 했다. 하지만… 방사능 낙진으로 인해 잿빛 하늘이 가득하던 2030년의 제주도와 달리, 공기는 훨씬 깨끗했고 하늘은 파스텔 톤의 푸른색이었다.

 

“형준, 미지. 혹시 헬기가 떠 있다거나, 군용 차량이 주변에 있나?”
"레이다 감지결과, 상공에 항공기 없음.고주파 무전 신호도 매우 희박."

마치 시간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현대 문명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민은 두 다리가 떨리는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실험실 밖으로 나섰다. 따뜻한 햇살이 피부를 파고들었고,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발아래는 거친 흙바닥과 바위 지형이 드러났고, 어디선가 갈매기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정말로… 성공한 거야?”
이 말을 내뱉는 순간, 형준과 미지도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나머지 10대 옵티머스 로봇들도 실험실 문턱에서 먼지 가득한 금속발을 내딛었다.

 

딱 봐도 현대식 지하 기지는 커녕, 아무런 인공 구조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오직 자연 그대로의 해안절벽과 풀숲, 수평선 저 너머에 빛나는 하늘.

 

“이 빛… 이 공기… 2030년의 그것과는 전혀 달라.”

 

하민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꼈다. ‘정말로 여기가 13세기 제주도일까?’라는 의문이 스쳤지만, 지금 당장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방사능 낙진도, 매캐한 스모그도 전혀 없는 이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감격스러웠다.

 

트럭은 아직 실험실 안에 있었고, 하민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바다를 응시했다. 이 선택이 옳았을까, 아니면 무모한 짓일까.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해방감이 들었다.

 

어느 쪽이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 순간 하민 혼자만이 ‘과거의 제주’ 바다와 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