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게이트웨이 제 10장
제10장. 불안한 정착, 그리고 하늘로 날려 보낸 신호
부웅—
소형 원자로가 회전하기 시작하며 특유의 기계음이 퍼졌다. 금세 안정된 출력 지표가 모니터에 표시되었다. 하민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이 작고도 강력한 에너지 공급원은, 과거 시대에서 현대적 문명을 펼칠 그의 ‘생명줄’과도 같은 존재였다.
“타노스, 주변에 적당한 베이스캠프를 차릴 공간 좀 찾아줄래?”
"드론을 즉시 띄워보겠습니다. 근처 1킬로 미만 구역을 탐색 후 보고 드리겠습니다."
하민은 마이클 김과 이진영박사와 타임마스터를 작동하기 전 실험실 인터폰으로 나눴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하민씨 타임마스터에 시간은 언제로 맞출까요?"
하민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13세기로 맞춰 주세요."
"마이클 김과 이진영박사는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왜 13세기 인가요? 13세기면 고려시대 아닌가요?"
하민은 본인의 꿈에 자주 나타나는 몽골 기마병과 정체불명의 비행체 이야기는 빼놓고 말했다.
"올바른 방향으로 사회 진화를 한다면 제도가 잘 갖춰진 조선시대 보다 그 이전이 좋구요 덧붙여 산업혁명과 대항해 시대 이전으로 가야 제대로 된 사회의 공진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아무려면 어때요 지금의 끔찍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시절이고 철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시가라면 저는 그 때가 13세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민이 매뉴얼을 보고 세운 계획상에서도 그리고 마이클 김과 이진영박사와의 마지막 대화에서도 그는 13세기를 생각했고 말했다. 그가 과거로 온 것이 성공이라면 여기는 분명히 13세기의 제주도가 맞아야 한다. 드론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컨테이너 밖으로 날아오르자, 형준과 미지도 뒤따라 정찰 준비를 했다. 몇 분 뒤, 드론의 영상 피드가 트럭 내부 모니터에 나타났다. 초원과 갈대밭, 그리고 낮은 구릉이 펼쳐진 지형. 1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기암절벽 사이로 보이는 조그만 평지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민가나 마을은 없는 것 같다.
하민이 잠시 생각에 잠겨 사일런트 게이트웨이의 일을 생각에 빠졌을때 탐사 드론은 주변을 살펴보고 트럭으로 돌아왔고 타노스가 보고를 시작했다.
"화면으로 보이는 저 지형이 바람을 막아주고, 지반도 비교적 단단한 편입니다. 베이스캠프를 차리기에 좋을것으로 추정되며 근처에는 민가가 적어도 2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서 사람이나 동물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하민은 실험실 컨테이너에서 트럭에 실을 것을 모두 빼고 트럭만으로 베이스 캠프로 가기로 했다. 그는 혹시 누군가 실험실 컨테이너에 남은 인공위성에 손댈까 걱정이 되어서 즉시 옵티머스들에게 “실험실 컨테이너를 주변 갈대와 나무로 위장하라”고 명령했다.
10대의 옵티머스는 능숙하게 협력하여 갈대 묶음을 엮고, 나뭇가지를 둘러치고, 심지어 흙을 이용해 컨테이너 표면을 부분적으로 덮었다. 1시간쯤 뒤, 거대한 철제 컨테이너는 바깥에서 얼핏 보면 그냥 잡초와 덤불이 우거진 작은 언덕처럼 보이게 되었다.
“좋아, 눈에 띄지 않겠어.”
하민은 변장을 마친 실험실 컨테이너를 살짝 둘러보았다. 혹여나 누구든 접근할 경우, 내부에 로켓과 인공위성이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채진 못할 터였다.
“좋아. 베이스 캠프 예정지 쪽으로 출발 하자."
이윽고 하민은 트럭을 몰아, 드론이 포착했던 평지 쪽으로 이동했다. 트럭 뒤칸에는 이제 갈대·나뭇가지 위장용 작업을 끝낸 옵티머스들이 탑승했다. 형준과 미지는 하민 옆 좌석에서 주행 정보를 확인했다.
길도 없는 들판을 지나 1킬로 정도 되니, 비교적 평탄하면서도 바람을 적당히 막아주는 구릉 안쪽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베이스캠프로 삼을 곳이다.
하민은 곧바로 옵티머스들에게 작업 지시를 내렸다.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돌과 자재로 임시 집의 뼈대를 만들고 지붕을 덮어라."
다시금 옵티머스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부 로봇은 트럭에 실린 공구로 근방의 돌을 캐서 바닥에 깔았고, 또 일부는 갈대를 엮어 지붕처럼 얹었다. 스쳐 보면 투박하지만, 최소한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커다란 오두막 형태가 5시간 만에 윤곽을 드러냈다.
해는 어느덧 저물었고, 붉은 노을이 하늘 한쪽을 물들였다. 삽시간에 어두워진 야외에서, 하민은 로봇들의 붉은 LED 조명을 의지해가며 세세한 마무리를 점검했다.
“그래도 옵티머스 12대가 힘을 합치니 일도 빠르군.”
하민은 약간 뿌듯해하면서도, 새로운 현실에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현대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지냈던 시간은 사라졌고, 지금 이 세상에는 ‘하민’이라는 외부인만이 오롯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간 뒤, 하민은 지붕을 마련한 오두막 안에서 간단히 에너지바로 끼니를 때웠다. 트럭에 있는 AI 타노스에게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지시했다.
“드론으로 일대 마을을 다시 정찰해봐. 지금이 정말 13세기인지 확인이 필요해.”
"알겠습니다. 야간투시기능을 사용해 주변민가와 인간활동 흔적을 범위를 넓혀가며 살펴 보겠습니다."
드론이 어두운 하늘로 날아올랐고, 30분 뒤에 돌아온 영상자료가 모니터에 펼쳐졌다.
가옥 구조가 매우 단순했고, 초가 형태의 지붕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데, 멀리서 관찰한 복식이 하민이 알고 있던 고려 시대 의류 양식과 흡사했다. 영상에는 촛불이나 등잔불 비슷한 조명도 보였다. 얼핏 봐서는 조선시대와 구분하기 어려울 법하지만, 타노스는 목조 건물 양식과 지붕 재료 등을 분석해 ‘대략 1235~1245년 사이로 추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종합 분석한 결과 현재로서는고려후기,몽골침략시기에해당한다고보여집니다.목표했던13세기가 맞습니다."
하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확신이 서는군. 앞으로의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어.”
그와 동시에,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떨어졌다는 고립감이 서서히 몸을 파고들었다. 과연 내 결정 하나하나가 어떻게 역사를 뒤바꿀까? 라는 중압감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한밤중이 되도록 잠들지 못한 하민은 오두막 모퉁이에 앉아 생각에 빠졌고 다시 마이클 김과 이진영 박사의 얼굴이 스쳐갔다.
비록 지금 이들은 ‘과거로 온 하민’을 감시하거나 지시할 방법은 없지만, 최소한 감사 인사 정도는 전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할지는 굳이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이 원하는 위성을 우주로 쏘아 올린다면, 빅테크나 군부가 내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가능성도 있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새 이어진 고독감과 불안감은 하민을 괴롭혔다. 이 시대에서 완전히 고립된 채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날이 훤히 밝았을 때 옵티머스들이 밤새 공사한 결과, 오두막 수준을 넘어선 작은 집 형태가 완성되었다. 돌벽을 어느 정도 쌓아 올렸고, 지붕은 갈대와 나뭇가지를 겹겹이 엮어 제법 단단해 보였다. 바닥은 평탄하게 고른 뒤 얇은 흙층을 얹어서, 바람만 조금 막아도 은근히 아늑했다.
“이정도면 첫 베이스캠프로는 훌륭해.”
하민은 만족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형준과 미지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너희 둘은 이 집을 지키면서 내부 정비를 계속해. 혹시 주변에 사람이나 동물이 다가오면 즉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주인님 베이스캠프 경계모드로 전환하겠습니다."
하민은 나머지 10대 옵티머스를 모두 트럭 적재함에 실었다. 발판을 내리니 무거운 기계발 소리가 철컥철컥 울렸다.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탑승했고, 하민은 운전석에서 시동을 걸고 타노스에게 실험실 카운터로 가라고 지시했다.
트럭이 구릉을 돌아 다시 위장해둔 실험실 컨테이너 쪽으로 이동했다. 갈대와 나뭇가지로 덮은 인공 언덕 같은 구조물이 바뀐 모습 없이 그대로였다. 하민은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인근에 사람이나 동물이 들른 흔적은 없어 보였다.
철제 문을 들어올려 안으로 진입하자, 어두운 컨테이너 내부에서 로켓과 인공위성 부품들이 대기 중이었다. 어제까지는 발사 여부를 망설였지만, 밤새 자책감과 외로움을 느낀 하민은 ‘최소한의 신호라도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타노스, 매뉴얼에 따르면 지금 이 로켓은 상대적으로 작은 소형 로켓이고, 고체연료 방식이라 간단히 조립해서 발사할 수 있는 거 맞지?”
"네 매뉴얼 검토시 발사대만 갖추면 바로 가능합니다."
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사대 문제는 어떡하지? 이 시기에 우리가 독자적으로 건설하긴 쉽지 않을 텐데.”
"다행히 매뉴얼에 따르면, 컨테이너 좌측 동그란 구멍을 개방해 로켓을 세워 장착할 수 있도록 설계 되어있습니다. 옵티머스들이 실험실 컨테이너를 조금 돌려세우면, 간이 발사대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하민은 로켓을 조립하기 위해 옵티머스 10대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했다. 타노스가 매뉴얼에 적힌 단계별 작업 지시를 전송하자, 로봇들은 엔진 부품을 맞추고, 위성 모듈을 로켓 상단에 탑재하고, 오링과 배선을 연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대략 2시간 반에 걸친 집중 작업 끝에, 로켓과 위성은 하나의 덩어리로 완성되었다. 하민은 땀을 훔치며 검사 도구로 각종 센서를 확인했다. 연료통(고체연료)도 안정적으로 주입이 완료된 상태였다.
다음 단계는 로켓을 세우는 일. 컨테이너 좌측 벽을 접어서 열자, 동그란 구멍이 열렸다. 지하 실험실에서 만들었을 때부터 발사를 염두에 둔 구조였다. 옵티머스들이 기중기처럼 로켓을 들어 올려, 그 구멍을 통해 하늘 방향으로 세웠다.
“다행히 오늘 바람이 세지 않고 날씨가 맑군.”
"네,고체연료로켓발사에는최적의조건입니다."
하민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 로켓을 발사하면, 소리가 크게 나서 근처 주민들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한번 결심을 했으니, 미뤄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타노스. 로켓을 발사해. 인공위성은 어떤 궤도까지 올리면 될까?”
"매뉴얼상 약100~120km 근방의 저궤도에 배치할 계획입니다. 그 지점에서 안테나를 펼치고, 신호를 전송 할 예정입니다."
드디어, 하민이 “점화!”를 외쳤다. 잠시 후, 고체연료 챔버에 불이 붙으며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주변 돌과 흙이 맹렬히 날아오르며, 로켓은 굉음과 함께 파공했다.
쿠우우우웅!
지축을 흔드는 소리에, 하민은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연기가 순간적으로 컨테이너 안에 가득 찼고, 화염이 컨테이너 좌측 구멍 밖으로 길게 뻗었다. 곧, 로켓은 순식간에 하늘로 솟아올랐다.
위이이잉—
굉음은 수 초 뒤 점점 멀어졌고, 이미 작은 점처럼 보이던 로켓은 높은 하늘을 향해 가라앉았다. 하민의 눈에는 아직도 잔상이 남아있었고, 콧속엔 화약 냄새가 매캐하게 퍼졌다.
“잘 올라간 거겠지…?”
하민은 트럭 모니터를 바라봤다. 타노스가 로켓 추적 신호를 받고 있었으나, 일정 고도 이상 올라가자 통신 세기가 급격히 약해졌다.
"곧 위성 분리가 이루어질 겁니다. 그 시점 부터 통신이 재개되면 위성위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몇 분 동안 대기했음에도, 통신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하민은 초조했다. ‘혹시 폭발했나? 아니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나?’
"인공위성이 안착해 궤도를 잡으면 곧바로 신호가 잡힐 것 입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시죠."
하민은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여기서 기다려봐야 뾰족한 수는 없지. 일단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자.”
트럭 시동을 걸고, 10대 옵티머스도 뒤에 탑승했다. 컨테이너 문은 대충 닫아두었다. 로켓 발사로 땅이 패였고, 연기의 흔적이 남았지만, 어차피 한눈에 보이는 형태는 아니었기에 별도의 위장 작업까지 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200미터쯤 이동했을 때, 형준으로부터 무전이 들어왔다.
"보고합니다. 지금베이스 캠프 주변에 아이들로 보이는 무리 3~4명이 접근했습니다. 집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역시 로켓 발사 소리에 놀라서 몰려왔나…?”
하민은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 과거 고려 시대 주민이라면, 이 엄청난 폭음에 호기심을 느끼거나 공포심을 갖는 게 당연했다.
하민은 결정했다. “트럭은 조금 더 가면 나무 숲이 있으니 거기 숨겨두고, 난 걸어서 베이스캠프로 갈게. 그게 안전하겠다.”
옵티머스들에게 트럭을 옮기라고 지시한 뒤, 하민은 무장 최소화 상태로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베이스캠프가 보일 듯 말 듯 한 지점에 이르자, 이미 늦은 오후 햇살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하민은 바위 뒤에 숨어, 멀리서 ‘아이들’이라 추정되는 작은 그림자들이 오두막 주변을 헤매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그보다 어린 어린이 둘, 그리고 소녀 한 명. 네댓 명이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문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형준과 미지는 직접 나서지 않고, 집 안에서 조용히 대기한 모양이었다. 형준이라면 즉시 무력 대응을 할 수도 있었지만, 하민이 “아동이나 비전투 인원에게는 접근하지 말라”고 미리 지시해 두었다.
“저 아이들이 만약 동네에 알린다면 어쩌지?”
하민은 침을 삼켰다. 로켓 굉음이 나는 곳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다”거나 “귀신이 사는 이상한 집”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곧 어른들까지 몰려올 가능성이 컸다.
‘지금 단계에서 현지 주민들과 마주쳐서는 안 될까, 아니면 오히려 일부러 접촉해볼까…?’
고민이 스쳐갔지만,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떠나버리면 괜찮을 수도 있었다.
하민이 천천히 다가가자, 아이들은 잠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형준이 이미 고려어를 다운로드받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드러운 말투로 다가갔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너희를 해치지 않아.”
형준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간형 스킨을 두른 덕분에, 멀리서 보면 30대 중반의 평범한 남성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그 말에 조금 안심한 듯, 수군거리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때 하민이 주머니를 뒤져, 하나둘 꺼낸 작은 사탕들을 내밀었다.
“이거… 먹어봐.”
부서지기 쉬운 캔디 형태였지만, 평소에 이 시대 사람들은 접할 수 없는 달콤한 맛이었다.
아이 중 하나가 조심스레 받아 입에 넣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맛보자, 신기하고 달콤한 맛에 난리가 났다. “더, 더 주세요!”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민은 웃으며 조금 더 사탕을 나눠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금세 마음을 열고, 형준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형준이 바로 부드러운 어조로 제안했다.
“다시 이곳에 친구들과 같이 오면, 너희에게 글도 가르쳐주고 사탕도 줄 거야.”
아이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정말요?!”라는 반응을 보였고, 곧 여기저기서 “글을 배우고 싶다”, “사탕 더 먹고 싶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민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첫 조우가 꽤 순조롭군.’
그는 아이들이 신나서 달려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땅거미가 지기 전, 마을 쪽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한껏 가벼워 보였다.
하민은 형준 미지에게만 언어 모듈을 준 게 아니었다. 나머지 옵티머스들 또한 같은 시스템으로 고려어를 다운로드받아 간단한 대화가 가능하도록 했다.
“형준, 미지 당분간 너희 둘이 현지인들과 소통 창구 역할을 하겠군.”
형준과 미지는 거수로 경례하듯, 임무를 숙지했다.
하민은 아이들이 떠난 뒤 캠프 안으로 들어가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한시름 놨네.”
어느덧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할 즈음, 타노스가 트럭 대시보드를 통해 긴급 메시지를 전했다.
"인공위성이 저궤도에 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약한 신호가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하민은 서둘러 트럭 내부 모니터를 켰다. 잡음 어린 화면에 뭔가 데이터가 수신되는 듯하더니, 이진영 박사의 메시지라는 표시가 떴다.
짧은 영상과 텍스트가 결합된 메시지에서, 이진영 박사의 침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민 씨… 이걸 전송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떠난 뒤, 사일런트게이트웨이가 폭격을 당했어요. 군부와 빅테크가 뒤엉킨 싸움에 휘말린 모양입니다. 아마 이곳은 곧 폐쇄되거나 파괴될 듯합니다…. 이건 마지막으로 보낼 수 있는 메시지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부디 무사히 도착하셨길…. 꼭… 당신의 꿈을 이루세요.”
화면은 잡음과 함께 희미해졌다. 전송 상태가 고르지 않아, 이후 몇 문장 정도가 소실된 채 반복 재생되다 사라졌다.
하민은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했다. 사일런트게이트웨이가 폭격을 당했다니. 그렇다면 자신을 제외하고 이 연구에 참여했던 마이클 김이나 이진영 박사는 무사할까? 아니면 함께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최소한 ‘잘 도착했을 것’이라 생각해 준 모양이군.”
하민은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여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민은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트럭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현대와 내가 다시 만날 기회는 거의 사라진 셈인가…. 최소한 이 위성을 통해 간단한 메시지를 주고받는 정도가 전부겠지.”
이미 과거로 건너온 이상, 군부나 빅테크가 시간을 넘어 자신을 어떻게 해칠 방법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진짜로 ‘혼자’ 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외로움 속에서도, 하민은 한 줌의 자유를 느꼈다.
‘아무도 나를 통제하지 않는 세계. 모든 게 내 손에 달렸군.’
주위를 둘러보니, 캠프 밖에는 달빛 아래 평온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아이들이 떠난 뒤, 이제 마을에선 어떤 이야기가 퍼지고 있을까. 어른들은 로켓 굉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근시일 내에 더 큰 파장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하민은 결심했다.
‘일단 이곳 사람들과 우호적으로 지내자. 그 과정에서 필요하면 힘도 보여주겠지만, 처음부터 무력 정복을 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사탕 맛을 보고 들뜬 아이들이 매일 찾아온다면, 가볍게 글을 가르치면서 그들과 친분을 쌓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현지 언어나 문화를 더 익히면서, 점차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칠 전략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올려다본 하민의 눈빛에는 이제 더 이상 동요하는 흔적이 없었다.
“이젠 정말 내 길을 걸어야 할 때다.”
불안한 정착과 작은 성공, 그리고 저 너머 현대 세계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인연—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역사 개척의 첫걸음이 시작되고 있었다.

(10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