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게이트웨이(창작 웹소설)

사일런트 게이트웨이 제 11장

3시 모모(3PM Momo) 2025. 3. 9. 07:40

제11장. 새로운 시작, 그리고 불청객

 

로켓 발사 이튿날 아침, 하민은 트럭 내부 모니터에서 타노스와 대화하며 위성 상태를 점검했다.

 

“인공위성과의 통신이 안정되었습니다. 이제 이름을 어떻게 부를까요?”
“음… ‘샛별’이 어떨까? 아침저녁으로 가장 먼저 빛나는 별이라는 의미도 있으니.”

 

이름을 부여받은 위성 ‘샛별’은 저궤도에서 지구를 돌고 있었다. 이미 2030년으로 통신을 보내기엔 사일런트게이트웨이가 폭격당해 무망해졌지만, ‘샛별’과 연결되면 장거리 통신이나 간이 GPS 기능은 사용할 수 있었다.  

 

“적어도 대륙간 장거리 이동이 필요할 때, 배나 군대를 운용할 때 큰 도움이 되겠군.”

“맞습니다. 이 위성을 통해 전송받은 좌표값을 가공하면, 2030년의 GPS처럼 정확하지는 않아도 근사치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지도 데이터와 연동해서 쓰면, 몇백 년 앞선 항해술과 측량술을 전해줄 수도 있죠.”

 

하민은 문득 ‘송나라의 4대 발명품 중 하나가 나침반’임을 떠올렸다. 이미 이 시기(13세기)엔 나침반 자체가 존재하긴 했으나, GPS를 활용한다면 해도 제작이나 대규모 항해에 훨씬 정확한 좌표 계산이 가능해진다. 그것만으로도 인류 역사를 몇백 년은 당기고, 고려가 세계의 해양 강자로 발돋움할 잠재력을 품게 된다.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는군. 어쩌면 여기서 또 다른 대항해 시대를 일찍 열 수도 있겠어.”

하민은 트럭 밖으로 나가, 하늘 어딘가에서 지구를 내려다보고 있을 ‘샛별’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날 아침, 어제 사탕에 매료되었던 아이들이 이번에는 친구들을 더 데리고 베이스캠프로 나타났다. 심지어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도 함께 왔다. 아마 그녀는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인 듯 했는데 훤칠한 키에 오똑한 콧날이 옷 매무새가 허름해도 귀티가 났다. 

 

형준은 이미 어느 정도 고려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에, 고려어로 그들을 맞이했다. 아이들은 조잘거리며 “사탕! 글 공부!” 하고 외쳤고, 10대 후반 여성은 다소 경계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형준과 미지를 번갈아 보았다.

하민은 타노스가 미리 출력해 둔 한글 기초 자음·모음표와 빈 종이, 그리고 볼펜을 나눠줬다.  

“자, 이거로 글씨를 써봐.”

 

아이들은 “먹물이 필요 없네?!” 라며 깜짝 놀랐다. 부드러운 볼펜잉크가 종이에 깔끔하게 흘러나오는 모습이 매우 신기했던 것이다.

가지고 온 종이가 많지 않은지라, 하민은 한번 사용한 종이를 재활용하기 위해 “공부 끝나면 돌려주라”고 당부했지만, 아이들은 펜과 종이를 들고 이것저것 낙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민은 형준을 통해, ‘글씨를 똑같이 다 옮겨 쓰면 어제 준 사탕을 또 준다’고 전했다. 어느새 10대 후반의 여인도 아이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한글 자음·모음을 따라 쓰고 있었다.

 

먼 발치에서 하민은 글을 쓰는 그녀를 봤다. 그녀는 160 중반 정도의 키,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커다란 눈, 오뚝한 콧날을 지녔다. 고려 시대 기준으로는 다소 ‘이국적’이라며 사람들 눈길을 끌 수도 있을 법한 그녀였다. 형준이 말을 걸자, 그녀는 깜짝 놀라 미지 쪽을 돌아보며 신호를 보냈고, 미지가 통역 겸 블루투스 그녀와의 대화를 전달 해주었다.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정순입니다.”

 

그러면서 마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약 50가구 정도가 근방에 모여 살고 있고, 대부분 농사를 짓거나, 관청에서 시키는 부역을 하며 먹고산다 했다. 정순은 정혼자가 생기기 전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도 하고, 부모가 바쁘니 대신 동생 격인 아이들과 마을 아이들을 관리해주는 형편이라고 했다.

 

하민은 정순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해 보이지만 내심 ‘고려 시대 기준으로는 키가 크고, 얼굴 생김새가 조금 독특하다. 2030년의 미적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매력적이군…’이라며 호기심을 느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글씨를 따라 쓰자, 하민은 약속대로 사탕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와!” 하는 탄성을 질렀고, “내일도 오면 더 주나요?”라고 묻는다. 형준이 하민의 눈치를 살펴 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도 써온 걸 검사해보고, 통과하면 두 개, 실패해도 하나는 준다”라고 장난스럽게 말해 주었다. 아이들은 즐겁게 “더 많이 데려와도 돼요?”라고 물었다.

 

“그래, 친구들 많이 데리고 와도 좋아.”
형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돌아갔고, 정순도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떠났다.

하민은 고려어가 현대 한국어와 은근히 흡사한 부분이 많음을 깨달았다. 아직 완전히 구분하긴 어렵지만, 조금씩 익히면 대화가 훨씬 수월해질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생각지도 않게 3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이웃마을까지도 소문이 퍼진 것 같았다. 다만 어린 아이뿐 아니라, 중간 크기의 소년·소녀, 그리고 이모·고모뻘 되는 어른까지 따라온 이들도 있었다. 모두가 ‘사탕’과 ‘글 공부’에 대한 호기심으로 모여든 셈이다. 하민은 형준을 통해 간단하게 사탕을 주는 절차를 마련했다.  

 

오늘 처음 온 아이들은 기초 자음과 모음부터 다시 배울 것.

어제 온 아이들은 어제 배운 글씨를 재시험해서 성공하면 사탕 2개, 실패해도 1개는 준다.

그리고 하루가 끝나면, 종이를 다시 거둬들여 재활용했다. 펜심도 무한정 있지 않아서, 사탕이 아닌 ‘필기도구’가 더 귀한 세상이 될 수도 있었다.

 

“고려어가 한글과 비슷한 구석이 많긴 해. 아이들도 생각보다 빨리 적응하네.”
하민은 아이들의 빠른 습득력에 내심 놀라워하며, 장기적으로 제주도 전체 더 나아가 고려 전역에 한글을 문자로 전파할 가능성까지 그려보고 있었다. 현대에서야 영어가 글로벌 스탠더드였지만, 지금 이 시점에선 ‘한글’을 국제 공용어 수준으로 성장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야심도 스쳤다.

“이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면, 고려가 곧 세계 무대의 중심이 될지도 몰라….”

 

하민이 가져온 2030년의 씨앗들은 이미 베이스캠프 근처 밭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무·배추·감자·고구마·보리·벼·밀·옥수수·콩·고추·양파 등 주변 환경에 맞춰 간단히 실험하듯 심어놓았는데, 소형 원자로에서 나오는 전력을 이용한 양수 장치로 지하수를 끌어 올려 물을 줄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나 들여올 감자, 고구마를 고려시대이 심다니 시간의 왜곡이 심한데.. 그리고 이곳은 처음엔 간단한 소규모 텃밭이었지만, 점차 확대하면 이곳을 농업 보급 기지로 만들 수 있겠군.”

 

하민은 땅속에서 머리를 내미는 작물 새싹을 바라보며, 이곳이 일종의 ‘신 문명 창고’가 될 가능성에 들떴다. 당장 식량 걱정은 2030년에서 가져온 비상식량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고려 땅에서의 자급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2주쯤 이어가던 어느 날, 오전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즐겁게 돌아간 뒤, 정순이 혼자 울상을 지으며 베이스캠프로 뛰어왔다.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었고, 숨을 헐떡이며 미지에게 절박하게 매달렸다.

 

“우리 마을에… 관군들이 들이닥쳤어요! 농사 지은 곡식을 몽땅 빼앗고, 몇몇 집 부모님을 강제로 끌고 갔어요. 제 부모님도….”

정순은 흐느끼며 사정을 호소했다. 추정시기인 1235~1245년 사이 고려는 몽골 침략 시기로 각종 세금과 부역, 공납이 극심했다고 하민은 타노스와의 대화를 통해 인식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관군의 횡포가 심해진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을 들은 미지가 하민에게 그녀의 말을 전했다.

“관청이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봤더니, 아침에 걸어가면 점심쯤 도착한다 했습니다. 대략 20km 정도 되겠네요, 주인님.”
“20km면 트럭으로 달리면 금방이군. 하지만 관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어….”

 

정순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도와달라, 이대로면 우리 부모님이 큰일 난다”고 애원했다. 하민은 잠시 고민했지만, 평화롭게 살던 날들도 이제 관군의 횡포로 금이 가기 시작함을 느꼈다.

 

“그래… 드디어 움직여야 할 때가 온 건가.”

 

하민은 정순의 눈물을 닦아주며 “먼저 마을로 돌아가 상황을 살피라. 우린 곧 뒤따르겠다”고 미지를 통해 전했다. 정순은 재차 고맙다며 달려 나갔다. 바로 그 뒤, 하민은 타노스에게 긴급 명령을 내렸다.

 

“샛별 위성을 통해, 인근 관청으로 보이는 큰 건물이 있는지 검색해봐. 대략 20km 반경 내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을 찾아.”
“네, 항공 드론과 위성 데이터를 종합하겠습니다.”

 

하민은 이어 미지에게도 지시했다.  

“넌 베이스캠프를 지키고 있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우리 물자와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니까.”

 

형준을 포함한 나머지 10대 옵티머스는 무장 모드로 전환.

약 20분 뒤, 타노스가 드론 영상과 ‘샛별’ 위성 데이터를 통해 마을에서 20km 떨어진 관청의 위치를 특정했다. 대체로 낮은 토성형태의 성곽과 목재 울타리가 둘러쳐 있는 관 건물이었다.

하민은 무거운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트럭 뒤 칸을 정비했다. 옵티머스 10기는 무기를 장착한 상태로 탑승 대기 중이었다. 하민은 이들에게 “비살상무기를 우선 준비하되, 필요 시 위협 사격을 고려”라고 지시했다.

 

“가자. 관청이라는 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보자.”
“네, 주인님.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트럭 엔진이 우르릉거리는 저음을 내며 깨어났다. 드론 두 대는 하늘로 치솟아 정찰 모드를 유지했고, 나머지 드론들은 가급적 위험에 대비해 트럭으로 복귀시켰다. 혹시 관군이 공격해온다면, 엄호 사격이나 공중 촬영 자료가 필요할 수도 있었다.

 

“2030년 식 군사용 AI와 로봇 기술이, 이제 13세기 고려의 관군과 충돌한다…. 역사의 방향을 어떻게 흔들어놓을까?”
하민은 스스로 중얼거리며 운전석에서 액셀을 힘껏 밟았다. 특수 개조된 트럭 바퀴가 거친 흙길을 박차고 나아갔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났고, 엔진 굉음이 들판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20km 남짓 떨어진 관청을 향해 하민의 트럭은 질주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게 고려에 대한 첫 ‘공식’ 개입이 될 테지. 힘을 보여주든, 협상을 하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순간이 가까워오고 있다….”

 

트럭이 도로 아닌 거친 들판을 달릴 때마다, 활과 칼이 아닌 로봇과 미래 병기로 무장한 하민의 군세는 ‘이 시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긴장감을 뿜어냈다. 어쩌면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을 제압할 수도 있겠지만, 이후가 문제였다. 과연 그 뒤에 오는 반작용은 어떨까?

 

<하민이 바라 본 정순>

<11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