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게이트웨이 제 12장
제12장. 무너진 담장, 그리고 이어진 길
거친 들판을 질주하는 트럭 안에서, 하민은 가슴속이 묘하게 뛰는 걸 느꼈다. 저 멀리 관청 지붕이 어렴풋이 보이자, 타노스가 낮은 목소리로 알렸다.
“관청까지 불과 1km 남짓 남았습니다. 곧 시야에 들어갈 거예요.”
하민은 창밖을 내다보며 액셀을 약간 더 밟았다. 이미 이질적인 엔진 소리가 대지를 울리고 있었다. 이곳 13세기 탐라 사람들이 들어본 적 없는 기계음에, 관청 쪽은 벌써 술렁이고 있을 테다.
“드론 전부 띄워. 관청 주변 전방위로 정찰하자.”
트럭 적재함에 탑재된 중형·소형 드론 20여 대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각각 프로펠러가 붕붕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관청의 담장 너머와 지붕 위, 그리고 공중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벌떼가 몰려온 듯한 기묘한 광경.
프로펠러 소음이 커서, 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이, 타노스는 드론 카메라로 실시간 영상을 전송했다. 화면에 나타난 광경은 끔찍했다. 사람 몇이 곤장을 맞으며 묶여 있었고, 주변엔 관군 복장을 한 병사들이 50명 남짓 배치돼 있었다. 말들은 울음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발을 구르는데, 병사들은 눈앞의 ‘하늘 나는 물건’이 무엇인지 몰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중 한 병사가 갑자기 활을 잡아 드론을 겨냥했다. 슈잉— 하고 화살이 날아갔지만, 드론은 가벼운 회피 기동으로 순식간에 이를 피했다.
“좋아, 화살 따위로는 못 맞추겠지. 이대로 두면 피해가 늘어나겠군… 타노스, 관청 벽을 뚫고 들어가자.”
하민이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깊이 밟자, 트럭은 굉음과 함께 담장을 향해 돌진했다.
쿠르릉— 쾅!
낡은 돌담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흙먼지와 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사람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엔진이 포효하는 소리, 헤드라이트가 번쩍이면서 관군과 묶여 있던 죄수들 모두 얼어붙었다.
어느 누구도 본 적 없는, 덩치 큰 쇳덩어리(트럭)가 담을 부수고 들어오고,
앞부분에 달린 헤드라이트가 작은 햇빛처럼 빛나니,
‘불을 뿜는 괴수’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옵티머스 전원 하차 준비.”
트럭 뒤칸 문이 열리며 금속성 발소리가 들렸다. 형준(남성형 로봇)과 10대의 옵티머스들이 한꺼번에 뛰어내렸다. 각자 사격 병기로 전환 가능한 모듈을 탑재한 상태였다.
“관청의 우두머리를 트럭 앞으로 끌고 와.”
형준이 우렁찬 목소리로 사람들을 둘러봤다.
“누가 대장인가! 앞으로 나와라!”
하지만 관청 안의 사람들은 이 상황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몇몇 병사들은 무기를 떨어뜨린 채 바닥을 기고 있었고, 묶여 있던 주민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 상태로 포승줄에 매인 팔만 떨고 있었다.
곧 어딘가에서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배가 볼록 나온 관료’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마 관청장인 듯했다. 그러나 이자도 입술이 파랗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형준이 그 앞까지 다가가 기관총을 들어 올렸다.
찰칵—
짧은 장전 소음과 함께 형준은 경고 삼아 관청장이 앉아 있던 의자의 다리를 향해 격발했다.
타다다닥!
귀청이 찢어질 듯한 천둥 같은 소리가 터지며, 관청장은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의자 다리는 산산조각이 났고, 관청장은 지푸라기처럼 바닥에 고꾸라져 “살려주세요! 저, 저, 정말 잘못했습니다…!” 하고 애걸복걸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관청장.
주변 병사들도 이미 각종 무기를 버리고 땅에 납작 엎드리거나 울먹이고 있었다.
묶여 있던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 물론 그들은 공포와 안도감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하민이 트럭 운전석에서 내려 상황을 살폈다. 실제로 총탄 소리에 익숙하지 않은 이 시대 사람들은 마치 ‘천둥벌거숭이’에 맞닥뜨린 듯 패닉에 빠져 있었다.
관청 구석에 묶여 있던 남녀와 노인들이 죄다 고개를 땅에 박고 있었다. 형준이 다시 외쳤다.
“세금? 부역?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들을 이렇게 때린 거지?”
듣고 있던 관청장과 병사들은 전부 벌벌 떨며, “명령입니다, 제발…”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중 관청장이 침을 삼키며 간신히 대답했다.
“이, 이 마을 사람들이 부역과 세를 제때 못 냈습니다. 나라의 명을 어기면 곤장 치도록 되어 있어서… 으으… 잘못했어요!”
묶여 있던 주민 중 일부는 억울함에 울먹이며 호소했다.
“우리가 낼 곡식이 어디 있습니까? 아이들 먹일 것도 부족해요!”
“차라리 때려죽이셔도 더는 나올 게 없어요!”
하민은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한 편에 중년 여성(아마 정순의 부모)이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 혹여 다른 마을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민(형준에게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저 관청장과 병사들을 묶고, 나머지 백성들은 전부 풀어줘. 빨리.”
로봇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관청장을 비롯해 부하 관료와 병사들을 제압해 포승줄로 묶고, 몽둥이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그대로 줄을 끊어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제야 풀려난 주민들은 하민 일행이 ‘도깨비’인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사자’인지 구분도 안 되지만, 일단 자기들을 구해준 건 확실하니 울면서 감사 인사를 했다.
바로 그때, 먼발치에서 정순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부모가 붙잡혔다는 말에 발만 동동 구르던 정순이 이제야 관청에 도착한 것이다. 정순은 부모로 보이는 중년 부부가 풀려나는 모습을 보자, 금세 달려가 “어머님, 아버님!”이라며 품에 안겼다. 어머니 쪽은 그저 놀란 얼굴로 “하늘에서 신을 내려 보냈나 보다”라는 등, 기괴한 불빛을 뿜는 큰 괴물(트럭)과 기계인간(로봇)을 도깨비로 여기고 있었다.
“저분은… 도깨비가 아니예요.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저희한테 글도 가르쳐주시고 사탕도 주시던 분이에요!”
하지만 혼란 속에서 부모는 그게 사람인지, 귀신인지 아직 구분조차 힘들었다. “검은색 옷차림의 이상한 사람…”이라는 묘사만 들었기에, 먼발치에서 트럭 조명에 눈부시게 빛나는 하민을 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한편, 하민은 관청장에게 “도대체 누가 이리 무리한 세금과 부역을 부과하냐”고 물었다.
관청장(엉엉 울며)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탐라 중앙관청에서 인원을 차출하고 세금을 더 거두라고 지시했어요… 전 그냥 명령대로 한 것뿐이라고요!”
하민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즉, 상위 기관인 탐라 중앙관청에서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도록 지시했다는 거군. …’
지금 가진 전력(트럭 + 로봇 + 드론 + 샛별 위성)으로는, 충분히 탐라 내 관청을 모조리 제압할 수 있을 법했다. 이대로 마을 하나씩 구해주는 것보단, 정점을 직접 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리라.
“타노스, 탐라 중앙관청 위치와 규모 좀 알아봐.”
타노스는 이미 샛별 위성과 드론 자료를 분석 중이었다.
"제주도는 13세기에는 '탐라'로 불리우며 중앙관청은 ‘탐라목’입니다. 2030년 주소로 치면 삼도2동 일대 같습니다. 탐라목의 안찰사는 탐라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고, 세금·재판·군사·교육까지 관장합니다.”
말하자면 2030년의 제주도청에 준하는 곳이었다. 현 시점에서 탐라의 최고 권력자라 할 수 있는 탐라안찰사가 그곳에 있으며, 관료와 병사들도 거기에 몰려 있을 가능성이 높다.
타노스: “현재 위치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하민은 살짝 미소 지었다.
“30km라면 시속 50으로 달리면 30분 정도면 되겠군.”
하민은 명령을 내렸다.
"지금 이 관청의 관료와 병사들은 전부 묶어 두고, 백성들은 풀어주어라.
정순과 그 부모 등 피해자들은 마을로 돌아가도록 하라."
뒤늦게 구출된 사람들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었다. “검은 옷 입은 이방인이 괴물로 이 관청을 박살냈다”는 소문이 곧 온 마을에 퍼질 테지만, 하민에게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이 기세를 몰아 탐라 전체를 뒤흔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럭 시동을 다시 걸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이번에는 중앙관청을 향해 돌진한다.
정순은 “정말 고맙습니다…”라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하민은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며 “곧 돌아오겠다”고 짧게 인사했다.
30km 정도의 거리를 질주하는 동안, 하민은 타노스와 전투 전략을 논의했다.
“도착하면 드론을 다시 대거 투입해라. 이번엔 병력이 많을 수도 있으니 유탄발사기도 준비하자.”
“명령 확인. 옵티머스 중 한 대를 기관총 대신 유탄발사기로 무장 전환시키겠습니다.”
도로도 없는 황량한 땅을 가로지르는 트럭은 시속 50~60으로 거칠게 달렸다. 13세기 사람이라면, 말보다 빠른 이 쇳덩어리를 보고 기절초풍할 만했다.
마침내 한자로 탐라목이라 불리는 중앙관청이 시야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넓은 목책과 담이 둘러져 있었고, 여러 관사(官舍)와 창고, 그리고 한옥 형태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서 있었다.
“그냥 밀어붙인다.”
쾅— 쾅—
트럭이 담장을 들이받자, 이끼 낀 돌담이 맥없이 무너졌다. 안에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오고, 호위 병사들이 우왕좌왕 달려나왔다. 그러나 이들의 함성은 잠시뿐이었다.
피이이잉—
하늘에서 드론들이 몰려들고, 트럭 전면부 라이트가 섬광처럼 번쩍이자 병사들은 공포감에 뒷걸음질쳤다.
한편, 유탄발사기로 무장한 옵티머스 한 대가 트럭에서 내려와, 메인 건물 지붕을 조준했다.
“지붕을 날려버려. 내부 사람들 기를 꺾어야 해.”
콰아앙!
귀청을 때리는 폭발음이 터지고, 건물 지붕 일부가 통째로 날아갔다. 목재 파편과 기와들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우수수 떨어졌다. 건물에서 뛰쳐나온 관료들과 병사들은 이미 혼이 반쯤 나간 표정. 몇몇이 활이나 창을 들었지만, 이 정도 위력엔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직감했는지 전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래도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지 않은 자가 있었다. 병사 하나가 필사적으로 활 시위를 당겨 대장으로 보이는 형준을 겨냥했다.
슈잉—
화살이 날아들었으나, 형준은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쉽게 피했다. 그리고는 “피융!” 하는 단발 사격을 가했다. 총알이 병사의 활과 팔을 함께 관통하며, 병사는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그는 담장 아래로 굴러떨어지며 신음했다.
그제야 한 무리의 창든 병사들이 몰려나오려 했지만, 지붕이 날아가는 천둥같은 폭음과, 조금 전 병사가 한 방에 제압당한 장면을 보고 주춤했다. 그때 건물 안에서 “물러나라!” 하는 고함이 들렸다.
무너진 건물 뒤에서, 비교적 젊은 인상의 관료가 빛에 얼굴을 드러냈다. 최고 관리자로 보이는 이 자는, 속칭 역사 드라마에서 나오는 ‘탐관오리’와는 다소 달라 보였다. 근엄한 표정에 약간의 두려움이 서려 있지만, 뻔뻔하거나 비굴해 보이지는 않았다. 형준이 관리자를 바라보며 이야기 했다.
“누가 최고 관리자인가? 나와라!”
“제가… 안찰사 이지광입니다.”
이지광은 병사들에게 “당장 물러나라!”고 거듭 명령했다. 이미 건물 지붕이 폭격당하고, 활 쏜 병사는 팔이 날아갈 뻔한 참혹한 광경까지 본 이상, 병사들도 지휘관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부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민은 트럭에서 내려 형준과 옵티머스를 거느리고 이지광에게 다가갔다. 그 긴장 서린 공기 속, 이지광은 땀을 흘리면서도 눈에 번뜩이는 총기가 있었다.
하민이 차에서 내려서 블루투스로 이야기 하자 형준이 고려어로 안찰사에게 말을했다.
“왜 이렇게 무리한 세금을 거두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거지?”
“저 역시… 마음껏 착취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육지(본토)에서 ‘몽골군에 대비한다’며 병사와 자금을 계속 요구해옵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본토 병력들이 역으로 탐라를 짓밟아버린다고 해서… 하아, 저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몽골 위협에 대한 전쟁 비용과 왕실 재정 확보를 위해, 본토 조정이 무리하게 탐라에서 공납을 걷으려 하고, 그 부담이 결국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전가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귀인이 나타나셨으니… 오늘 당신의 압도적인 무력을 보니 당신께서 이 땅을 지켜주신다면, 육지의 압박에서도 벗어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민은 이지광의 말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탐관오리처럼 보이지 않는, 제법 젊은 관료가 “당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녀석은 바람 보다도 빨리 누워 버리네 상황 파악이 빠른 거야 아니면 타고난 간신이야.... 어쨌든 이거 잘하면 생각보다 빠르게 탐라를 장악할 수도 있겠어….’
하민이 잠시 생각에 잠겼을때 이를 눈치챈 이지광이 의심을 거두려 한번 더 그의 생각을 이야기 했다.
"육지에서 온 명령에 억지로 순응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다면, 저 이지광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백성들의 무거운 세금 문제도 해결하고 싶습니다.”
하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몽골 침략에 대한 육지 조정의 부담과, 탐라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현실.
이지광 같은 젊은 관료가 하민의 기술력에 기대어 탐라의 독립 혹은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빠른 승복을 하는 개연성이 의심이 되어 다시 물어봤고 하민의 말을 형준이 고려어로 바꿔서 이지광에게 전달했다.
“당신은 나에게 총력을 기울여 방어하지 않고 바로 항복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겠나?"
"저는 일찍이 송나라 유학길에서 그들의 과학기술과 무기체계를 보고 놀란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몽골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유학길에서 본 무기체계 보다 더 뛰어난 무기가 이 세상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압도적인 과학기술의 무기가 있다면 이 고려 땅에서 몽골군을 몰아내고 탐관오리들을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타고 나타난 물건과 도깨비 같은 당신의 병사들을 봤을때 제 생각으로는 상대가 안된다고 느꼈습니다. 산에서 범을 만났을때가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고 압도적인 힘을 가진 당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하민은 말 없이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이지광은 하민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현장은 혼돈이었다. 돌진하던 트럭과 옵티머스의 사격으로 저항하던 병사들 일부는 크게 다치거나 정신을 놓은 상태고, 드론은 하늘에서 위잉거리며 건물을 감시 중이었다. 관료와 관리들은 바닥에 엎드린 채 ‘살려주세요’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하민은 형준에게 눈짓을 보냈다.
“부상자를 치료해라. 생명을 함부로 앗을 필요는 없으니까.”
몇 대의 옵티머스가 의약품이 실린 트럭 방향으로 뛰어갔다. 곧바로 부상 병사의 출혈 부위를 압박하며, 2030년식 응급키트로 지혈하고 기본 처치를 했다. 이 상상조차 못한 광경에 탐라목의 병사들이 또 한 번 경악했다. 총알로 관통당한 팔을, ‘도깨비’가 기이한 기술로 치료해준다니.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이지광은 하민과 형준을 향해 한걸음 다가섰다.
“어찌 보면 나는 탐욕스러운 상관들의 부하일 뿐이오. 하지만… 나도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몹시 괴로웠소. 당신께서 진정 탐라를 안정시켜 주실 수 있다면, 육지의 압력에 맞설 방법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하민은 생각했다. ‘지금 이 시기는 13세기 무렵. 몽골은 고려도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 중. 조정과 본토 권문세족들이 몽골과 적당히 타협하며 지방에 세금만 강제로 부과하는 모양새. 이 지경에서 탐라만이라도 독자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내가 이곳을 근대화해서 하나의 독립 왕국처럼 키워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안찰사 이지광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정말로 나를 따르겠다면, 현재의 권력 구조부터 전부 갈아엎을 각오를 해야 할 텐데?”
이지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곧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내놓겠습니다. …제발 이 탐라를, 당신의 강력한 힘으로 지켜주십시오.”
“좋다. 우선 여기서 네 힘을 빌려 탐라의 체제를 재편하고, 백성들을 좀 더 살기 좋게 만들어보자. 그 뒤, 육지 압박에도 대비해야겠지.”
이지광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병사들과 관료들은 아직도 공포와 경악에 빠져있지만, 서서히 ‘무력 충돌’이 잦아드는 기세였다. 하민은 트럭에 타노스를 통해 옵티머스들을 통솔했다.
"드론은 주변 경계 유지."
"형준과 10대 로봇은 관원을 한곳에 모아 필요 시 구금 조치."
"부상 병사나 민간인에게는 응급처치 및 인도적 지원."
하늘을 보니 어느덧 뭉게구름 사이로 태양이 중천에 떠 있었다. 불과 아침에 관청 하나를 제압하고, 곧장 탐라목까지 제압했다. 하루라는 시간 내에 13세기 탐라 사회의 핵심을 뒤흔들어놓은 셈이다.
하민은 상황을 조망하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군사적·행정적 시스템을 재편해야겠군. 한글 교육, 농업 혁신, GPS를 통한 항로 개척… 몽골과 육지 조정의 압력까지 상대하려면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겠지.’
“좋아. 탐라부터 바꿔보자. 그리고 그 기세로 고려 전역… 아니, 전 세계까지 바꾸는 거야.”
그는 속으로 불이 일듯 끓어오르는 야심을 새삼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