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게이트웨이 제 13장
제13장. 새로운 질서의 씨앗
“이제 6개월 후면, 우리가 심은 무·감자·옥수수가 첫 수확을 맞이하게 된다.”
트럭에서 내린 하민이 작물이 자라나는 밭을 굽어보며 말했다.
21세기 품종의 씨앗이 적응을 마치고, 단축된 재배 사이클로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었다. 과거의 밭농사보다는 훨씬 빠르고, 더 많은 생산량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무와 감자, 그리고 옥수수가 첫 스타트.
6개월 뒤에는 대규모 양이 나오면, 그중 일부분은 바로 먹고, 나머지 씨앗은 제주 전역에 재배용으로 보급할 계획이다.
“내년쯤이면, 탐라 전역에서 굶주림을 훨씬 덜 느끼는 시대가 올 거야.”
하민은 이미 눈앞에 펼쳐질 “곡식이 넘쳐나는 탐라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양식이 늘어나면, 가축 사료도 풍족해져 말·소·돼지·닭의 사육이 대폭 확대될 것이다. 곧 사람이 먹는 것, 그리고 시장에 풀어낼 물량이 늘어나면, 탐라 전체의 생활 수준이 껑충 뛸 게 분명했다.
이제 식량 문제만이 아니라, 금속과 자원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했다. 하민이 이미 드릴과 현대 장비를 동원해 제주 곳곳의 채굴지를 찾아낼 계획을 세웠다.
“고려 시대 자체도 철기문명이긴 하지만,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해. 역사 자료를 참고하면 제주도 안에서도 철·사철·유황 등이 어느 정도 나온다니, 그거라도 먼저 개발해봐야지.”
과거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적과 기록을 토대로, 채굴 가능 지역을 타노스가 지도를 제작했다.
가장 시급한 자원은 철. 무기·공구·건축 등 모든 산업이 철 위에 놓이는 시대이기에, 대량으로 생산할 기술력이 필요하다.
"철을 채굴하는 것 보다 무역을 한다면 어떨까?" 하민이 혼잣말로 떠들자 타노스가 답변을 했다.
"자료에 의하면 현시점 일본 규슈지방에 '타타라 제철'이라는 방식으로 철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무역을 하려면 무엇을 주고받을 것인가?’
"타노스 현시점 탐라에서 일본과 무역을 한다면 무엇으로 무역을 할 수 있지?"
"귤을 이용한 설탕 가공품을 추천합니다. 이유는 지금의 일본은 미각을 끌어올릴 ‘설탕’이 귀하기에, 설탕이 들어간 식료품을 진귀한 보물처럼 여길 가능성이 큽니다. 탐라에선 사탕수수가 자라지는 못하지만, 육지는 무역을 통해 사탕수수를 거래를 하고 있으니 설탕을 조금만 사들인 뒤, 이를 응용해 과자·빵·쨈·주스 등 현대식 가공품을 만들어 일본에 판다면, 가치가 매우 높아질 것입니다."
“설탕 기반 특산물 vs 일본의 철. 이렇게 ‘물물교환’ 구조를 만들면, 굳이 본토와의 충돌 없이도 대량 철을 확보할 수 있겠군.” 하민이 생각을 정리했다.
하민은 탐라의 중앙관청을 함락시킨뒤 탐라 안찰사 이지광과 별도의 이야기 없이 이틀간 옵티머스를 통한 밭농사를 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설계했다. 일주일간 고민한 끝에 그의 계획은 탐라의 주민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과 탐라를 발전시킬 자원인 철을 생산하는 것으로 압축했다.
이틀의 숙고가 끝난 하민은 탐라안찰사 이지광을 불러서 명령을 했다.
"우선 육지로 보내는 공납 물량은 당분간 그대로 유지 하시고 비축 물량이 있으면 그것을 먼저 육지로 보내서 의심을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관청의 인력과 장정들 그리고 여자분들을 모아주세요"
이지광은 하민과 형준에게 왜 그러는지 묻고 싶었지만 우선은 시키는대로 하기로 했다.
하민은 이지광에게 사람을 모으라는 지시를 하고 그들에게 일한 만큼 나눠 줄 식량을 걱정하다가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탐라 지역에서 가장 빠르게 사람들의 배를 채우는 건, 결국 물 고기야.”
타노스 분석에 따르면, 탐라의 연안 어족 자원이 풍부했고, 드론을 이용해 어군이 몰린 지역을 정밀 탐색하면 획기적으로 어획량을 늘릴 수 있다.
“곡식은 최소 몇 달 후에 수확하지만, '바다는 즉각적으로' 먹을거리를 준다.”
하민은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속담을 떠올리며, 어획량 증가가 곧 민심 장악으로 직결됨을 직감했다.
한편 타노스는 하민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주인님, 옵티머스 12대를 전문 분야별로 배치하고, 각각 관리자 역할을 부여하면 업무 효율이 올라갈 것입니다. ”
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민은 그리스 신화 일부에서 이름을 따와, 옵티머스들에게 새 이름을 부여했다.
옵티머스1 – 형준: 하민의 비서이자 보디가드 (기존)
옵티머스2 – 미지: 수확/가축 확장 담당
옵티머스3 – 크라(크라토스): 산업혁명 동력 개발 (수력/풍력 발전, 기계 설비)
옵티머스4 – 데메(데메테르): 어획자원 확장 (드론 해상 정찰, 배 분배)
옵티머스5 – 하데(하데스): 자원 채굴 (철·유황 등 광물)
옵티머스6 – 메티(메티스): 무역/무역물품 생산 (설탕 가공, 일본 교역)
옵티머스7 – 아레(아레스): 무기 개발 (대장간 협업, 신형 화기·도구 제작)
옵티머스8 – 포세(포세이돈): 배 건조 (조선 기술, 선박 디자인)
옵티머스9 – 제우(제우스): 병사 훈련 (제주군 리빌딩)
옵티머스10 – 아스(아스클레피오스): 의료지원 (현대 의약기술 도입)
옵티머스11 – 아테(아테나): 교육 (한글·숫자 체계 보급, 행정 공부)
옵티머스12 – 헤파(헤파이스토스): 대장간 개발 (제련·가공 기술)
하민은 오전에 사람을 모아달라고 이지광안찰사에게 말해놓고 오후가 되자 다시 그를 불러서 추가 지시를 내렸다.
“지금 탐라목의 행정이 잘 정리가 되었겠지만 저는 농사와 가축, 어획자원, 자원채굴, 무역, 무기개발, 배 건조, 병사훈련, 의료, 교육, 대장장이, 기술개발 이렇게 11개 분야에 맞춰서 탐라의 행정을 만들고 싶습니다. 여기에 적합한 똑똑한 인재를 추천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이지광은 하민의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그는 이미 하민의 기이한 힘과 문명을 목격해 충분히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이젠 열심히 협조하고자 했고, 또한 제주도 곳곳에서 인재를 모아 올 생각이었다.
이지광안찰사가 인재 선출 지시를 받은 다음날부터 옵티머스들은 각각의 임무를 수행했다.
메티(옵티머스6)는 설탕과 과자, 빵, 술 등을 연구·제조하는 임무를 할당받고 실행에 옮기고 있었고 아테(옵티머스11)와 헤파(옵티머스12)는 목수와 대장장이들에게 정확한 지시를 할 수 있도록 3D프린터를 이용해서 측정도구를 만들었다.
데메(옵티머스4)는 드론 정찰을 통해 바다 위 어군 밀집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했다. 어군 밀집 위치가 파악된 데메는 이지광안찰사와 같은 배에 올라서 다른 어선들의 위치를 지정하고 그물을 던졌다. 각각의 어선들은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서도 기존의 5배가 넘는 어획량을 달성하고 만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선에서 직접 이 마법과 같은 어업기술을 목격한 이지광안찰사는 하민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 그는 이미 탐라중앙관청의 벽을 부수고 도깨비와 같은 무리들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부리는 신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지광은 만선의 배를 몰고 돌아오는 길에 형준에게 하민을 뵙기를 청하고 하민을 보자마자 말했다.
"오늘 10척의 배를 몰고 상제님의 도깨비들과 고기를 잡았습니다. 정확하게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을 알려주는 도깨비(옵티머스 데메) 덕에 오늘은 평상시 대비 5배의 어획량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상제님의 뜻을 더욱더 잘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하민은 잠시 놀라며 물었다.
"상제님이라니요..?"
"탐라에서는 배를 타고 나갈때 안전과 만선을 기원하면서 상제님에게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그 상제님을 직접 뵌 것 같습니다. 앞으로 상제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과분한 호칭이지만 안찰사님이 부르기 편하신대로 불러주세요."
말 그대로 낯뜨거운 호칭이라 생각이 되었지만 탐라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신비스러움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민은 승낙한 셈이다.
다음날부터 이지광은 가용 가능한 모든 어선들을 동원해서 데메와 드론과 함께 물고기 수확을 위해 바다로 나갔고 저녁이면 만선이 되어서 돌아 올 수 있었다. 탐라관청에서 지정한 일을 할경우 일한 댓가로 물고기를 나눠준다고 하자 사람들이 탐라중앙관청으로 알아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지광은 이렇게 몰려든 사람들을 배분해서 농사와 어업, 가공식품 제조, 자원채굴, 배건조로 우선 나눴고 모인 사람들의 50%는 농사와 어업에 우선 배분이 되었다.
며칠 뒤 모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하민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대로라면, 몇 달 뒤에 정말로 풍년을 맞이하겠군.”
하민은 농장 너머의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중세와 근대가 뒤섞인 기묘한 역사의 전환점을 떠올렸다.
단, 마음 한편에는 끊임없이 드는 불안감도 있었다. 육지 조정과 권문세족들은 언제 탐라에 흑심을 품고 쳐들어올지 모른다. 몽골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아시아·유럽을 휩쓸고 있으니, 그 파도가 탐라에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일본과 거래하며 철을 얻겠다는 계획도, 쉽게 성사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하민은 “그래도 해볼 만하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탐라의 권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지광안찰사의 적극적인 협조와 탐라의 많은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3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