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게이트웨이 제 14장
제 14장. 탐라, 산업혁명을 가동하다.
7개월간의 집념이 증명되었다. 옵티머스 미지가 이끈 농장팀은 척박한 탐라 땅에서도 무·감자·옥수수를 끊임없이 재배해냈고, 21세기 품종의 우수성 덕분에 “가뭄에도 강하고, 병충해에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작물들이 곳곳에 뿌려졌다. 수확물이 늘면서, 더 많은 씨앗이 탐라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6개월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풍요의 시작이 열렸다.
무와 감자는 재배 주기가 짧아, 이미 두 번 이상의 수확 경험을 쌓은 농부들도 생겨났다.
옥수수는 높은 칼로리와 사료 활용도가 뛰어나, 가축 사육까지 큰 시너지 효과를 냈다.
이런 속도로 작물재배가 성공한다면 “밥 굶는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릴 정도로, 탐라가 조금씩 배부른 땅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소, 돼지, 말, 닭 등 가축 사육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수확한 옥수수와 작물을 사료로 활용해 사육 규모를 키울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운반과 경작에도 도움이 되는 ‘말·소’가 늘어나면서 농업과 운송 분야가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돌아갔다.
하민이 본 미래 청사진대로라면, 1~2년 뒤면 가축 도축으로부터 얻는 단백질도 풍족해져 사람들의 영양 상태가 확연히 올라갈 것이다.
어획 담당 옵티머스인 데메는 드론을 통해 해상의 어군 밀집 지역을 정밀 탐색했다. 풍랑이 일고, 날씨가 흐려도 드론 카메라와 센서가 어군 움직임을 추적해냈다. “어느 구역에 물고기가 몰려있다”는 신호가 뜨면, 그 정보를 항구에 대기하는 어부들에게 전달한다.
바다로 나간 배들은 데메가 지시한 좌표로 이동해, 단숨에 어망을 가득 채워 돌아왔다. 매번 이런 식으로 고기를 잔뜩 실어 돌아오니, 탐라민의 식탁에는 해산물이 풍성해졌고, 일부는 육지에 공납으로 바치거나 일본 무역에 내다 팔 수 있게 되었다.
가을을 맞이해 바다 냉수대가 형성되면서, 어획량이 더 증가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도 뒷받침되었지만, 13세기 시점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하늘이 도왔을 뿐”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실상은 드론과 데메의 선진 시스템 덕분이었다.
옵티머스 크라(크라토스)는 수력·풍력 발전 기술을 본격 도입했다. 이미 탐라 곳곳에서 돌던 물레방아나 풍차를 개량해, “소형 발전기”를 연결할 수 있게 만들었다. 특히 태양열 보조 패널까지 결합해 타노스와 드론, 옵티머스 충전에 필요한 에너지를 소형 원자로에만 의존하지 않고 일정 부분 자체 해결하게끔 바꾸었다.
옵티머스 하데(하데스)가 이끄는 광물팀은 탐라 인근 해안가 절벽 밑이나 화산암 지대 사이에서 철광석·사철·유황 등을 캘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헤파가 중심이 된 대장장이 무리들은 “증기기관과 대포 부품”을 조금씩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마치 200~300년 뒤에나 가능할 법한 기술이 13세기 탐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꼴이었다.
새삼 하민은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순 칼·창만 쓰던 이들이, 이제 증기기관과 대포 부품을 만든다니… 격변에도 정도가 있지 않나.”
하지만 모든 게 타노스와 옵티머스들의 디테일한 지도, 그리고 탐라 주민들의 부지런함이 만나 만들어진 결과였다.
무엇보다 탐라가 급격히 바뀐 건 일본과의 무역이 활성화된 덕분이다. 메티가 이끄는 무역 담당팀은 귤(감귤)을 원료로 귤잼, 귤차, 술, 과자, 빵 등을 만들어냈고, 타노스의 마케팅 지시 아래 예쁘게 포장된 도자기나 전통 용기에 담아 ‘탐라’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문양이 독특한 포장지, 그림이 들어간 도자기 병” 등은 일본 상인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단맛”과 “과일 향”에 대한 일본인들의 갈증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설탕이 귀했던 시대, 설탕 베이스의 과자·빵은 일본의 상인과 귀족들에게 황금보다 더 귀한 사치품이 되었다. 값이 비쌌음에도 “맛있다”는 소문이 번져가자, 더 많은 일본 상단들이 탐라로 몰려왔다. 규슈 지방의 슈고(守護)인 쇼니 씨 가문이 특히 이들을 선호하여, 매번 무역선에 실려오는 빵과 과자를 헌상 받으며 호의적인 관계를 맺는 중이었다.
하민 측은 일본에 귤가공품, 술, 빵 등을 팔아 철광석과 석탄을 들여왔다. 본토의 철광을 장악하기 전까지, 외부 철 수급을 일본 무역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타타라 제철”로 유명한 규슈 지방에서 재료를 끌어오니, 무기·대장간·증기기관 제작에 필요한 동력을 충당할 수 있었다.
얼마 뒤, 하민은 한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타노스, 탐라 풍경이나 말 뛰는 모습, 꽃밭에서 웃는 소녀 같은 거… 아주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려줘. 컬러 프린터로.”
이른바 ‘타노스 작가’ 명의의 그림들이었는데, 13세기 사람들에겐 이처럼 세밀하고 색감이 뛰어난 그림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일본 상인들은 이것을 “신기한 도화”라며 경매에 붙였고, 단 한 장이 철광석 한 달치 분량과 맞바뀌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포장지 아트부터 시작해, 이제는 예술품까지 등장한 셈이다.
그림 한 장이 일본 귀족들 사이에서 비싸게 팔리다 보니, “타노스 작가” 브랜드가 나날이 유명해져 갔다.
병기 담당 옵티머스 아레(옵티머스7)는 화약(흑색화약)의 정확한 조합 비율을 완성했고, 이제 탄환과 포탄 제조까지 가능해졌다. 본래 고려 말기가 되어서야 화약이 실전 무기에 쓰이기 시작했는데, 하민의 지시에 따라 13세기에 이미 “대포”와 “포탄”이 개발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수 백 년 일찍 찾아온 화포 시대라니….”
하민은 물론 이 무기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으나, 혹시 모를 몽골과 본토의 위협에 대비하려면 억지력은 필요했다. “무기가 있어야 평화도 지킬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왔고, 이 시대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배 건조 담당 옵티머스인 포세(포세이돈)는 쉴 새 없이 탐라 목재와 일본에서 들여온 철·석탄을 활용해 증기기관 탑재선을 설계 중이었다. 수심 얕은 연안부터 대양 항해까지 고려한 ‘하이브리드’ 선박 구상이었는데, 원래는 19세기 중후반에서야 전 세계 해양에 퍼진 기술이 13세기 탐라에서 태동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제작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미 소규모 실험으로 증기기관 프로토타입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는 석탄을 태워 증기를 만들고, 이 힘으로 스크루(또는 외륜)을 돌리는 구조였다.
옵티머스 제우는 병사를 훈련시키고 전술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다. 본래 무장 수준이 낮았던 탐라 관군은, 7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기초 사격술(석궁), 제식 훈련, 드론 보조 전술 등을 습득했다. 몽골 기마병에 대적하기 위해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허무하게 당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
탐라 안찰사 이지광은 “육지에서 혹여 탄압이 들어오거나 몽골이 파도를 치고 들어와도, 이젠 어느 정도 맞설 힘이 생긴 것 같다”며 감격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육지는 ‘세금만 들어오면 됐다’는 기조라, 탐라 발전에 관심이 없었다. 그 사이 탐라는 나홀로 급성장을 이룬 셈이다.
점층적으로 풍족해지고 있는 주민들은 점차 “신이 탐라를 돕고 있다”고 믿었다. 사실은 하민과 옵티머스, 그리고 타노스가 만들어낸 물질·기술·시스템일 뿐이지만, 당시 관점에서 이건 기적이었다.
급기야. “하늘의 도깨비(로봇)들이 탐라를 살린다”는 식의 소문이 종교처럼 퍼졌다.
실제로 이지광도 “내 뒤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상제님이 있다”며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중앙정부에는 현상유지를 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언급하지 않고 교묘히 설득해 들어가고 있었다.
가을밤, 고려시대 의복과 햇빛을 가리기 위한 갓을 써 얼핏 외모로 보기에 고려시대와 이질감이 줄어든 하민은 이제 어느 정도 고려어를 알아듣고, 이지광 또한 한글이나 하민의 말투에 익숙해지면서 직접 대화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둘은 같은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통해 하민은 이지광이 고려 최대가문 출신인 이규보의 아들이며 송나라 유학을 다녀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은 깨어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그가 무신정권과 몽골 침입을 겪으면서, 정권유지에만 혈안이 된 고려 조정에 염증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 눈치챈 그의 아버지 이규보가 무신정권과 몽골군으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그를 ‘탐라 안찰사’로 좌천(혹은 유배)처럼 오는 방향으로 인사를 했고, 그는 그의 아버지와 그의 생존을 위해 “중앙정부 지시에 따르는 척”하며 버텼지만, 다수의 백성이 희생되는 걸 보고 내심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지광은 하민을 “상제님”이라 부르며, 신격화에 가까운 경외심을 표하며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그가 “천하를 다스릴 분”이라는 확신이 들어 진심 섞인 감탄을 드러냈고, 자기는 그저 작은 밀알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타노스는 하민과 이지광이 대화를 하면서 서로가 이해를 못하는 부분을 당시 언어와 현대언어로 번역하면서 통역을 해주었다. 덕분에 둘은 술잔을 부딪치며 서서히 마음을 열어갔다.
이윽고 술기운이 좀 오른 하민이 물었다. “안찰사님이 나를 보아온 지난 몇 달간,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였나요, 그리고 내 꿈은 뭘 것 같습니까?”
이지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상제님’… 천하를 다스려야 할 분입니다. 제 눈에 당신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분으로 보입니다.”
하민은 어쩐지 쓴웃음이 났다. ‘천하를 다스릴 분’이라니, 그저 인류가 이 지옥 같은 미래를 피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었는 이 시대 사람 눈에는 그런 존재로 비치나 보다.
“자 한잔 더 합시다. ”
이지광이 잔을 받들었다.
"상제님을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둘은 그 자리에서 건배를 외쳤다. 가을밤의 달빛 아래, 탐라의 깊은 밤이 그렇게 흘러갔다. 점점 빠른 속도로 발전해가는 작은 섬에서, 또 한 번 운명적 물줄기가 흘러넘치려 하고 있었다.
(14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