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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은 사라지지 않는다.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고 돌아올 뿐이다.
작가 성이사는 가을을 타고 있었다.해마다 그랬다. 10월 중순쯤, 아파트 단지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면 그는 조금씩 이상해졌다.베란다에 서서 떨어지는 낙엽을 오래 보았다. 낙엽 한 장이 떨어지는 데 몇 초가 걸리는지 세어 본 적도 있었다. 대략 4초였다. 그 4초가 이상하게 길었다.투자자 성이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낙엽을 보는 데는 아무 수익이 없다. 이 우주에서 ROI가 가장 낮은 행동을 고르라면, 단연 가을에 낙엽을 보는 일이었다.그런데 낙엽을 보고 있으면 감수성이 풍만해졌다.그리고 풍만해진 감수성은, 언제나 맥주를 불렀다.토요일 오후 3시.작가 성이사는 오늘 딱 두 캔만 마시기로 했다.냉장고를 열고 에비스 두 캔을 꺼냈다. 한 캔은 식탁 위에, 한 캔은 손에. 계획은 완벽했다.프..
2026.10.10 -
이해를 구하는 데는 사흘이 걸렸다. 용서를 구하는 데는 결제 알림 두 번이면 충분했다.
10월이 되자 해가 짧아졌다.슈퍼 성이사의 저녁 러닝은 이제 대부분 어둠 속에서 끝났다. 한강 변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는 빛이 닿지 않는 구간이 있었다. 거기를 지날 때마다 날벌레가 눈으로 날아들었다.지난주에는 하루살이 한 마리가 왼쪽 눈에 들어갔다. 300미터를 한쪽 눈을 감고 달렸다. 해적이 된 기분이었다. 별로 멋진 해적은 아니었다.야간용 고글이 필요했다.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신발장에 있었다.슈퍼 성이사의 가민 워치는 신발마다 마일리지를 따로 기록한다.열두 켤레 각각의 누적 거리가, 매일 밤 숫자로 쌓였다. 투자자 성이사가 종목별 수익률을 보듯이, 슈퍼 성이사는 신발별 누적 거리를 보았다.그 숫자 두 개가 빨간색이었다.슈퍼블라스트 3, 812킬로미터.나이키 인빈서블, 734킬로미터.러닝화..
2026.10.10 -
자본은 이동하는 척했을 뿐이다. 돌아갈 집을 알고 있는 철새처럼.
금요일 밤, 투자자 성이사는 대시보드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닫았다가, 다시 열었다.이번 주 계좌는 빨간색이 아니었다. 파란색이었다. 한 줄도 빠짐없이 파란색이었다.지난주까지만 해도 그는 조금 들떠 있었다. 폭락장에도 분산이 버텨 주었고, 환율이 손실을 덮어 주었고, 대시보드 메모란에는 직장인 성이사의 예스, 단가 인상 중이라고 여유롭게 적어 두었다.그 여유가 일주일을 버티지 못했다.사람은 나쁜 것에 더 빨리 익숙해진다고 추석에 그는 말했었다. 다만 그 말에는 단서가 하나 빠져 있었다. 익숙해진 다음에 오는 나쁜 것은, 처음 오는 나쁜 것보다 더 아프다.계좌보다 그를 더 침울하게 만든 것은 뉴스였다.서울 아파트값이 또 올랐다고 했다. 한 주 만에 몇 퍼센트, 어느 단지는 신고가, 어느 동네는 전세 매물이..
2026.10.10 -
AX혁신의 그늘 그리고 브로커의 몰락
월요일 오전 6시 40분.12층에는 오늘도 불이 켜져 있었다.성이사는 이번에는 차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지난주 금요일에 그 불의 주인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1등 출근 기록은 공식적으로 깨졌다. 경쟁자가 없어서 지켜지던 기록은, 경쟁자가 하나 생기자 단 하루 만에 끝났다.기록이란 원래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지난주의 그는 생각했다. 이번 주의 그는 그 해석을 그만두기로 했다.해석으로 버틸 수 있는 기록과 해석으로도 버틸 수 없는 기록이 있었다.10층 자기 방에서 5분 동안 숨을 셌다.평소에는 열까지 세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오늘은 스물까지 세어야 했다.금요일 대표실의 대화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제 안일함과 우유부단함이 가져올 미래가 두렵습니다.대표가 두려워하는 주의 월요일 회의는, 대개 조용히 끝나지..
2026.10.10 -
토이스토리5를 보다가 문득 든 생각
작가 성이사는 추석 연휴에 디즈니플러스로 「토이 스토리 5」를 봤다. 어른이 혼자 보기에는 조금 멋쩍은 영화였다. 그래서 딸들이 거실에 없을 때 봤다. 이번 편에서 아이들은 점점 장난감을 멀리했다. 태블릿을 들고, 화면 속에서 놀았다. 여전히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가 있으면, 아직도 그런 걸 갖고 노느냐고 놀림을 받았다. 장난감들은 시대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그들은 태블릿을 경쟁자로 삼았다. 아이들을 다시 데려오고, 친구들을 이어 주려고 애썼다. 그런데 애쓸수록 태블릿의 방해는 커졌고, 아이들이 꿈을 꾸고 친구를 만드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결국 장난감들은 깨닫는다. 시대는 바뀌었고, 태블릿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아이들도 깨닫는다. 가장 근본적인 놀이는 결국 친구와 어울리는 것이라는 ..
2026.10.03 -
달리기는 불안을 해결하지 않는다. 불안이 쓸 연료를 먼저 태워 버릴 뿐이다
슈퍼 성이사는 11월의 하프마라톤을 위해 추석 연휴 내내 매일 15킬로미터를 달렸다. 12킬로미터까지는 그래도 몸이 따라왔다. 3킬로미터가 늘어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지막 3킬로미터는 다리가 아니라 고집으로 달렸다. 그렇다고 거리를 줄일 수는 없었다. 하프는 21킬로미터다. 15킬로미터가 버거우면, 대회 날 16킬로미터쯤에서 자세가 무너질 것이다. 그다음은 뻔했다. 걷다가, 뛰다가, 경기장에 가장 늦게 들어오는 무리에 섞이는 것. 그래서 꾸준히 15킬로미터를 달려 보기로 했다. 몸이 그 숫자를 평범하게 느낄 때까지. 문제는 날씨였다. 달력은 가을이라고 했지만, 오전 9시만 되어도 볕이 따가웠다. 한강을 끼고 달리면 습도가 여전히 여름의 잔당처럼 남아 있었다. 슈퍼 성이사는 제선생과 운동 기록을 들여다..
202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