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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 마라톤 도전기 - 결승선 바깥의 사람
충무로역 화장실 앞에 러닝화를 신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성이사는 줄 맨 뒤에 섰다. 광화문까지 가면 사람이 많을 테니 중간 역에서 미리 해결하자는 생각이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유능한 사람들의 사전 대비가 한곳에 모이면 평범한 대기열이 되었다.일회용 우비 안쪽이 바스락거렸다. 안에는 반팔과 반바지를 입었다. 뛰기 시작하면 거추장스러울까 봐 외투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아직 뛰기 시작하지 않은 몸이 항의하고 있었다. 발가락을 신발 안에서 움직였다.아식스 슈퍼블라스트 2. 이번 대회를 위해 산 신발이었다. 새 신발을 신고 적응하는 동안 그는 밑창을 여러 번 들여다보았다. 성능을 확인하는 일과 값을 납득하는 일은 때때로 동작이 비슷했다.세 번째 하프마라톤이었다.두 번의 대회를 마치고도 그는..
2026.09.19 -
하프 마라톤 도전기 - 음악이 끝난 뒤에도
퇴근한 성이사는 현관에서 구두를 벗고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집 안에서는 밥 냄새가 났다. 안쪽 방에서 아내가 무언가를 보고 웃었다. 그는 한쪽 양말 끝을 다른 발로 밟아 벗기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엘리베이터에서 확인한 메일을 다시 열었다. 문장은 여전히 같았다.검토 중.빅스의 투자 검토는 여름에 시작되었다. 나무는 계절에 맞추어 잎을 바꾸고 있었지만 그 두 글자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성이사는 답장을 기다리는 일을 꽤 잘했다. 기다리는 동안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더 잘했다.답이 늦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마지막 미팅에서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나. 그때 상대가 물컵을 내려놓은 것은 단순히 물을 다 마셨기 때문이었을까.그는 휴대전화를 식탁에 놓고 러닝복을 꺼냈다.평일에는 오 킬로미터, 주말에는 ..
2026.09.19 -
자전거 국토종주(제주도), 그랜드슬램 달성
제주도에 오기 위해 연차를 낼 때는 여전히 망설였다. 회사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고, 자리를 비우는 동안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도 몰랐다. 그는 신청 화면을 띄워놓은 채 다른 창을 열었다가 돌아왔다.그러다 동해안에서 길을 잃었던 일이 생각났다. 모른다는 사실이 곧 끝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신청 버튼을 눌렀다. 심장은 잠깐 빨라졌다가 평소로 돌아왔다.이번에는 로시난테를 데려가지 않았다. 접은 자전거를 운반가방에 넣고 공항에서 다시 꺼내는 일이 번거롭기도 했지만, 현지에서 로드를 빌리는 편이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짐은 경량백 하나가 전부였다.공항에 도착하자 렌털숍에서 데리러 왔다. 사장이 안장 높이를 맞춰주는 동안 성이사는 자전거를 살폈다. 프레임이 가늘고 바퀴가 컸다. 손으로 들어보니 로시난테의 절..
2026.09.12 -
자전거 국토종주(동해안 강원도), 임원 다음의 길
아침에 러닝복을 입자 덜 마른 옷이 등허리에 달라붙었다. 성이사는 어깨를 움츠렸다. 어젯밤 욕실 문에 걸어둔 옷은 휴식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임원항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 산으로 들어갔다.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고개 이름이 나타났다. 임원재, 용화재, 신남재. 이름 끝에 붙은 한 음절이 허벅지에서는 길게 발음되었다.어제는 임원까지 가는 길이었다. 오늘은 임원에서 시작하는 길이었다. 시작부터 이러면 앞으로는 어떻다는 것인가.성이사는 기어를 낮췄다. 더 낮출 기어가 없어지자 잠깐 페달 위에 섰다가 다시 앉았다. 안경 아래로 땀이 흘렀다. 로시난테를 세우고 내렸다.어제는 내리는 데 이유가 필요했다. 오늘은 다리가 아팠다.그는 핸들을 잡고 걸었다. 앞가방이 몸에 닿지 않도록..
2026.09.12 -
자전거 국토종주(동해안 경상도), 임원으로 가는 길
버스가 안동을 지나는 동안 성이사는 회사 메신저를 네 번 열었다. 네 번째에도 새로운 메시지는 없었다. 그는 화면을 아래로 당겼다.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은 새로고침을 하면 조금 더 불안해졌다.창밖에서는 추수가 가까운 논들이 지나갔다. 버스 안에서는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 냄새와 미지근한 히터 냄새가 섞였다. 로시난테는 짐칸에 있었다. 성이사가 자기 브롬톤에 붙인 이름이었다. 주인과 달리 접어놓으면 차지하는 공간이 분명했다.회사에서는 얼마 전부터 그의 공간이 불분명해지고 있었다. 회의에 들어가면 자리는 있었지만, 그 자리가 앞으로도 자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말을 짧게 하면 뜻을 오래 생각했고, 답장이 늦으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집에 돌아와 양말을 벗다가도 낮에 들은 말의 다른..
2026.09.12 -
자전거 국토종주(오천,충주댐,안동댐), 강을 모두 완주하다.
8월이었다. 4대강을 마친 성이사는 올해 안에 그랜드슬램까지 끝내기로 했다. 빅스에 던진 투자 이야기는 거절되지 않았다. 투자팀에서 검토가 시작됐고, 화상 미팅도 한 차례 진행됐다. 일이 진행될수록 그는 더 긴장했다. 그리고 스트레스가 커질수록 그의 출구는 더 먼 강이 됐다. 수첩을 펴 보니 남은 것이 보였다. 충주댐, 안동댐, 행촌교차로, 그리고 오천. 그것을 채우면 강원도와 제주만 남는다. 충주댐과 행촌교차로. 성이사는 그 두 이름 앞에서 잠깐 웃었다. 첫 국토종주 때 그가 건너뛴 도장들이었다. 그때는 눈앞의 이화령밖에 보이지 않았고, 나중을 위한 도장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몇 달 뒤, 그는 그 도장 하나를 찍으러 다시 그 도시로 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이 바뀌었다기보다, 목표가 길어..
2026.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