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37)
-
고지서의 계보
어릴 때 아버지 앞으로 오던 그 많은 우편물이 무엇이었는지,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작가 성이사는 명절이면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린다.그의 집은 큰집이었다. 명절이면 작은집들과 사촌들이 왔고 고모도 왔다.때로는 사촌들이 자고 갔다.송편과 만두를 만드느라 하루 종일 여자들이 부엌에 모여 있었고, 남자들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봤다.그 시절 작가 성이사에게 명절은 기다려지는 날이었다.삼촌들을 뵈면 용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대학 진학을 앞둔 무렵부터 그 기다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너희 형은 좋은 대학 나왔는데 너도 가야지.너희 형은 대기업 다니니까 너도 졸업하면 대기업 가야지.너희 형은 결혼했으니까 너도 해야지.1년에 두 번 보는 삼촌들이 툭툭 던지는 인사말이 찔리기 시작했다.그 찔림은 동생에게도 갔고 ..
10:42:00 -
현관문까지의 거리
가장 먼 구간은 21킬로미터가 아니었다. 방에서 현관까지였다슈퍼 성이사는 올해도 11월 중순의 하프마라톤을 신청했다.광화문에서 잠실까지 달리는 대회다.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지난주부터 주말 거리를 12킬로미터에서 15킬로미터로 늘렸다.겨우 3킬로미터였다.그런데 12킬로미터에 익숙해진 몸에게 15는 다른 숫자였다. 근육이 당기는 곳이 생겼고, 오후 내내 몸이 축 처졌다.10월까지 매주 15킬로미터를 뛰고, 중간에 한두 번 20킬로미터로 거리 감각을 잡을 생각이다.목표는 작년 기록을 앞당겨 1시간 45분 안에 들어오는 것.대회 신청을 할 때마다 투자자 성이사에게 한소리를 듣는다.비싼 취미를 가졌다고.틀린 말은 아니다. 참가비가 10만 원이고, 훈련한다고 신발을 한두 켤레 더 사게 되고, 운동복도 늘어난다.1..
09:40:20 -
명절이라는 이름의 정산
폭등장에서 못 살던 사람이 폭락장에는 적응했다. 사람은 나쁜 것에 더 빨리 익숙해진다8월의 변곡점을 지나 9월이 되자 투자자 성이사에게 안정감이 찾아왔다.정확히 말하면 안정감은 아니었다.폭등장에서 들뜨던 사람이 폭락장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이제는 그 폭락장에서 익숙하게 사는 것에 가까웠다.사람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더 빨리 익숙해진다.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한때 투자자 성이사는 이 다중우주의 노후와 고용 불안정과 가족 부양 비용을 전부 투자로 감당하려고 했다.주식과 부동산으로 다 덮을 수 있다고 믿었다.몇 번의 이익과 몇 번의 폭락을 지나면서 그는 인정했다.투자는 여전히 어렵다.그리고 그 인정 뒤에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하나 왔다.시드머니를 공급하는 직장인 성이사가 이 우주에서 얼마나 중요한 ..
08:37:35 -
아스트라와 AI 설계자의 등장
회사는 방 하나를 만드는 데 한 달을 썼다. 그 방의 주인은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석테크홀딩스는 강남의 한 오피스 빌딩에서 네 개 층을 쓴다.12층부터 9층까지. 석대표는 12층에 있고, 그 층에는 인사팀과 경영지원팀, 그리고 큰 회의실 몇 개가 있었다.있었다, 라고 과거형으로 쓰는 이유가 있다.8월에 경영지원팀이 11층으로 내려갔다. 회의실 몇 개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공사가 들어갔다.공사가 끝났을 때, 대표실 옆에 방 하나가 새로 생겼다.AX본부장실이었다.방은 완성됐는데 주인이 오지 않았다.9월 초에 출근하기로 한 신임 임원이 전 직장 업무를 마무리하지 못해 양해를 구했고, 추석 연휴 이후로 출근이 미뤄졌다.그런데 조직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각 팀의 AI 에이스들이 차출됐다. 서른 명쯤이었다..
07:35:05 -
하프 마라톤 도전기 - 결승선 바깥의 사람
충무로역 화장실 앞에 러닝화를 신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성이사는 줄 맨 뒤에 섰다. 광화문까지 가면 사람이 많을 테니 중간 역에서 미리 해결하자는 생각이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유능한 사람들의 사전 대비가 한곳에 모이면 평범한 대기열이 되었다.일회용 우비 안쪽이 바스락거렸다. 안에는 반팔과 반바지를 입었다. 뛰기 시작하면 거추장스러울까 봐 외투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아직 뛰기 시작하지 않은 몸이 항의하고 있었다. 발가락을 신발 안에서 움직였다.아식스 슈퍼블라스트 2. 이번 대회를 위해 산 신발이었다. 새 신발을 신고 적응하는 동안 그는 밑창을 여러 번 들여다보았다. 성능을 확인하는 일과 값을 납득하는 일은 때때로 동작이 비슷했다.세 번째 하프마라톤이었다.두 번의 대회를 마치고도 그는..
2026.09.19 -
하프 마라톤 도전기 - 음악이 끝난 뒤에도
퇴근한 성이사는 현관에서 구두를 벗고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집 안에서는 밥 냄새가 났다. 안쪽 방에서 아내가 무언가를 보고 웃었다. 그는 한쪽 양말 끝을 다른 발로 밟아 벗기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엘리베이터에서 확인한 메일을 다시 열었다. 문장은 여전히 같았다.검토 중.빅스의 투자 검토는 여름에 시작되었다. 나무는 계절에 맞추어 잎을 바꾸고 있었지만 그 두 글자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성이사는 답장을 기다리는 일을 꽤 잘했다. 기다리는 동안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더 잘했다.답이 늦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마지막 미팅에서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나. 그때 상대가 물컵을 내려놓은 것은 단순히 물을 다 마셨기 때문이었을까.그는 휴대전화를 식탁에 놓고 러닝복을 꺼냈다.평일에는 오 킬로미터, 주말에는 ..
2026.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