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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없는 세계관, 치이카와설득하지 않고 입덕시키는 법
대회 전날인 토요일이었다.거실에서 큰딸 유진이 작은딸 유아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치이카와 극장판? 그거 돈 내고 보기엔 좀 아깝고, 그렇다고 안 보기엔 좀 모호해."유진다운 평이었다. 정확하고, 애매하고, 결론이 없었다.그 애매함을 유아는 다르게 해석했다. 아깝지만 안 보기엔 모호하다는 것은, 누가 표를 사 주면 본다는 뜻이었다.유아가 서재 문을 열었다."아빠, 치이카와 보러 가자."작가 성이사는 노트북을 닫았다. 0.5초가 걸렸다. 이 우주에서 딸바보 작가의 의사 결정 속도는 서본부장의 시스템보다 빨랐다.사실 그는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요즘 유튜브를 열면 치이카와가 나왔다. 하얗고 작고 동그란 무언가가 울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먼작귀'라고 줄여 불렀다. 먼가 작고 귀여운 녀석.그리고 그 귀여운 ..
2026.10.31 -
처음으로 결승선 바깥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2026년 10월 25일 일요일 새벽 5시.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대회 날 아침은 늘 그랬다. 몸이 알람보다 먼저 긴장했다.그런데 오늘은 긴장의 방향이 조금 달랐다. 옆에서 아내도 눈을 뜨고 있었다."잠 좀 잤어?""아니. 계속 깼어."아내의 첫 대회였다. 몇 년째 혼자 달려 온 사람이었지만, 번호표를 달고 수천 명 사이에 서는 것은 처음이었다.슈퍼 성이사는 그 마음을 알았다. 처음 하프에 나가던 새벽, 그도 화장실을 세 번 갔다.이 우주에서 슈퍼 성이사가 가장 능숙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대회 날 아침이었다.바나나와 카스텔라를 꺼냈다. 아내 몫까지 두 개씩. 가방에는 일회용 우비 두 벌, 에너지젤 네 개, 작은 에너지 음료 두 병을 넣었다. 아내의 번호표를 옷핀 네 개로 미리 달아 두었다.차..
2026.10.31 -
투자의 방학, 투자자 성이사와 익스프레스권
이번 주 시장은 숨을 쉬는지조차 헷갈렸다.지난주 하루 7.52퍼센트가 빠진 뒤였다. 이번 주 중간에 코스피는 다시 하루 3.5퍼센트 넘게 밀려 5533까지 내려갔다. 금요일인 10월 23일에는 0.30퍼센트 오른 5550.30으로 장을 마쳤다. 같은 날 코스닥은 1.62퍼센트 빠진 751.69였다.오른 건지 내린 건지 말하기 애매한 한 주였다. 차라리 확 빠지면 공포라도 명확했을 텐데. 이번 주의 시장은 공포도 안도도 아닌, 그 사이의 무엇이었다.금요일 밤, 투자자 성이사는 대시보드를 열고 한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선언했다."나, 방학이야."직장인 성이사가 넥타이를 풀다 말고 돌아봤다."투자 방학?""응. 당분간 아무것도 안 해."이유는 단순했다.AI 투자가 정말 돈이 되는지, 시장은 매일 다른..
2026.10.31 -
그 여름 그를 피했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를 찾아왔다
2026년 10월 19일 월요일 오전 7시.나디아의 메일이 와 있었다.이번 주 수요일로 잡았던 미팅을 2주 미루자는 내용이었다. 투자 총괄의 아시아 일정이 바뀌었다고 했다. 새 날짜는 11월 4일 수요일.We'd rather come with more time than come in a hurry.성이사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서두르느니 시간을 들여 오겠다는 말이었다. 이번 달 그가 들은 문장 중에 가장 여유로운 문장이었다.2주가 생겼다. 그는 그 2주를 어디에 쓸지 알고 있었다. 영어였다.같은 날 점심, 슬랙에 메시지가 하나 왔다.이사님, 혹시 이번 주에 티타임 가능하실까요. 저랑 윤과장이랑 같이요.보낸 사람은 한대리였다. 몇 년 전 그 여름, 성이사가 이끌던 100명짜리 유통본부의 막내였다. 지..
2026.10.31 -
가을 낮의 두 노신사, 작가 성이사와 완벽한 인생
토요일 오전, 부부는 여주 아울렛에 갔다.아내는 대회용 싱글렛과 반바지를 골랐다. 슈퍼 성이사는 러닝 재킷 하나를 골랐다. 고르는 데 30분, 계산하는 데 3분이 걸렸다. 결제 알림이 투자자 성이사의 휴대폰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아내의 카드였다.투자자 성이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점심은 야외 테이블에서 먹었다.가을 하늘이 높았다. 구름이 거의 없었다. 파란색이 너무 진해서, 하늘이 아니라 하늘 사진처럼 보였다.햇볕은 쨍쨍했다. 그런데 덥지 않았다. 여름의 햇볕이 피부를 찌른다면, 가을의 햇볕은 등을 두드렸다.부부는 파스타와 샐러드를 나눠 먹었다. 아내는 쇼핑백을 의자 옆에 세워 두고 하늘을 봤다."날씨 좋다.""좋네."오래 산 부부의 대화는 대개 이 정도 길이였다. 이 정도 길이로 충분했다.작가 ..
2026.10.24 -
처음으로 내 시계가 아니라 남의 시계를 보며 달렸다
슈퍼 성이사는 석 달 전에 티켓팅을 해 두었다.다음 주 일요일, 10킬로미터 대회. 두 장이었다. 한 장은 자기 것, 한 장은 아내 것.아내는 이미 몇 년째 달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걷뛰를 하던 시절부터 조용히 자기 코스를 달려 온 사람. 다만 둘이 같은 대회에 같은 날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아내의 목표는 분명했다."이번엔 한 시간 안에 들어올 거야."10킬로미터 한 시간. 킬로미터당 6분. 숫자로는 단순했다. 아내의 최근 기록은 1시간 4분이었다. 4분을 줄여야 했다."그럼 내가 같이 뛰어 줄게. 6분 안쪽으로."슈퍼 성이사가 말했다. 아내가 그를 봤다."당신 그러다 자기 페이스로 혼자 가 버리잖아.""이번엔 안 그래."아내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오래 같이 산 사람의 정확한 불신이었다.화요일 저녁 ..
2026.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