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9. 19. 10:32ㆍ성이사 오리지널 에피소드
충무로역 화장실 앞에 러닝화를 신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성이사는 줄 맨 뒤에 섰다. 광화문까지 가면 사람이 많을 테니 중간 역에서 미리 해결하자는 생각이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유능한 사람들의 사전 대비가 한곳에 모이면 평범한 대기열이 되었다.
일회용 우비 안쪽이 바스락거렸다. 안에는 반팔과 반바지를 입었다. 뛰기 시작하면 거추장스러울까 봐 외투를 가져오지 않았는데 아직 뛰기 시작하지 않은 몸이 항의하고 있었다. 발가락을 신발 안에서 움직였다.
아식스 슈퍼블라스트 2. 이번 대회를 위해 산 신발이었다. 새 신발을 신고 적응하는 동안 그는 밑창을 여러 번 들여다보았다. 성능을 확인하는 일과 값을 납득하는 일은 때때로 동작이 비슷했다.
세 번째 하프마라톤이었다.
두 번의 대회를 마치고도 그는 한동안 자신이 의지가 약해서 걸었다고 생각했다. 읽었던 달리기 책에서는 걷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는 대목이 오래 남았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 기준만 남았다. 다른 사람이 오래 쌓아온 과정은 책장 안에 두고, 마지막 문장만 자기 다리에 붙여놓았던 셈이었다.
다음 대회를 알아보다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잠실로 향하는 코스에 눈이 갔다. 광화문에서 출발해 평소 차 안에서 보던 길을 발로 지나가는 대회였다. 그는 접수가 열리자마자 신청했다.
이번에는 대회 신청을 마친 뒤 러닝 기록도 열었다.
숫자는 단순했다. 오 킬로미터, 십 킬로미터. 가끔 조금 더 뛴 날도 있었지만 십오 킬로미터 이후의 그는 거의 기록에 없었다. 그 낯선 사람에게 대회 날마다 중요한 일을 맡겼다. 처음 만나는 직원에게 숙련자의 결과를 요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이사는 달력에 날짜를 표시했다. 남은 두 달 동안 평일에도 십 킬로미터를 달리는 날을 늘리고, 주말에는 십오 킬로미터까지 가보기로 했다. 지금껏 자기를 안심시킨 거리 밖으로 나가야 했다.
처음에는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졌다. 늘 돌던 곳에서 더 가니 익숙한 가로등 뒤에 다른 가로등이 나타났다. 별다른 풍경은 없었다. 길이 조금 더 있었고, 편의점 하나가 있었고, 그가 피곤한 채로 지나갈 뿐이었다.
귀가해서 양말을 벗으려다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잠깐 멈췄다. 몸살처럼 무거운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거리를 줄이거나 쉬었다. 달력에 빈칸이 생기는 것이 불편했지만 다리는 달력을 보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자 십 킬로미터를 넘긴 뒤의 감각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게토레이를 넣은 말랑한 물병이 허리백 안에서 출렁였다. 목을 축이고, 보폭을 줄이고, 남은 길을 확인했다. 챙겨온 보급품도 썼지만, 먹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하지는 않았다.
이십 킬로미터를 처음 달린 날에는 집 앞을 지나쳐 조금 더 가야 했다. 시계의 숫자를 채우려는 자신이 우스웠다. 집은 분명히 저기 있는데 귀가를 승인하는 기계가 아직 일을 마치지 않았다.
그는 가로수 몇 그루를 더 지나고 돌아왔다. 두 번째로 그 거리를 달렸을 때는 마지막 구간의 벤치까지 기억났다. 다리가 무거워지는 지점도, 거기서 속도를 조금 줄이면 어떻게 되는지도 전보다는 알았다.
대회가 가까워졌을 때의 자신감은 첫 도전과 달랐다. 무슨 일이든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어디쯤에서 어려워질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날 새벽에는 바나나와 카스테라를 먹었다. 부스러기가 식탁에 떨어졌다. 손바닥으로 모으는데 아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긴 머리카락 한쪽이 어깨 앞으로 쏟아져 있었다. 그녀는 눈을 반쯤 뜬 채 물었다.
“오늘은 되겠어?”
“오늘은 될 것 같아.”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승점에서 기다릴게.”
그러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었다. 성이사는 방문을 잠깐 보았다. 잠결에 한 말일 수도 있었다. 그는 부스러기를 버리고 집을 나섰다.
충무로역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광화문에서 자기 출발조를 찾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 사람들의 입김이 흩어졌다. 우비 입은 사람, 팔을 비비는 사람, 출발 전부터 기념사진을 여러 장 찍는 사람이 있었다. 성이사도 사진을 찍었다. 떨리는 손 때문에 한 번 더 찍었다.
서울의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다. 거대한 화면들 속에서는 이미 누군가의 피부가 빛났고 새 자동차가 달렸다. 광고 속 사람들은 한 명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
인사말이 끝나고 앞쪽에서 함성이 났다. 그러나 성이사가 있는 곳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뒤 몇 걸음 걷고 다시 섰다. 출발에도 순서가 있었다. 그는 가민을 확인하고 샥즈를 눌렀다.
이번에도 두 시간짜리 플레이리스트였다. 노래 몇 곡을 바꿨다. 지난번 끝까지 들었던 곡들은 굳이 다시 초대하지 않았다.
출발선을 넘자 달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발이 걸리지 않도록 앞을 살폈다. 어느 정도 간격이 생기자 옆으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몸이 가벼웠다. 오늘은 더 빨리 가도 될 것 같았다.
그는 그대로 갔다.
앞서 달리는 사람을 정하지 않았다. 사람 사이에 공간이 생기면 그쪽으로 달렸고, 좁아지면 잠깐 기다렸다. 가민을 보고 호흡을 확인했다. 남의 등은 길 위에 있는 수많은 등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광화문을 지나며 성이사는 고개를 들었다. 이 근처에서 오래전 미팅을 했고, 저쪽 길에서는 아내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큰 화면이 많지 않았다. 자신도 지금처럼 자주 시계를 보지 않았던 것 같았다.
기억이 떠올랐다가 다음 모퉁이에서 사라졌다. 붙잡고 오래 생각할 틈은 없었다. 그는 길을 따라 달렸다.
급수대에서는 속도를 낮추고 마실 것을 받았다. 종이컵의 차가운 가장자리가 입술에 닿았다. 물을 삼키고 나서야 다시 리듬을 찾았다. 허리백에서 에너지젤을 꺼낼 때도 서두르지 않았다. 잘 안 뜯어지면 두 번 뜯으면 되었다.
십 킬로미터를 넘었다. 음악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십오 킬로미터에 가까워지자 성이사는 자신도 모르게 종아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지난 두 번의 몸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챙겨온 클램픽스를 먹고 급수도 했다. 그러나 포장지를 버린 뒤에는 다시 호흡과 다리를 살폈다. 허리백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보다 지금 어떤 상태인지가 궁금했다.
이번에는 다리가 계속 움직였다.
그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속도를 갑자기 올리지 않았다. 십오 킬로미터가 지나고 십육 킬로미터가 왔다. 음악 한 곡이 끝났고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노래 사이의 짧은 틈에 운동화 소리가 들렸다.
롯데타워가 보였다. 멀리서 보던 건물은 가까워지는 동안에도 좀처럼 작아지지 않았다. 그 아래로 자신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 묘했다. 늘 땅 위에 있었던 도시를 오늘 처음 바닥부터 보는 기분이었다.
잠실대교를 건너며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건너편으로 다리의 끝이 보였다. 성이사는 그쪽만 바라보지 않고 몇 걸음 앞의 노면을 보았다. 길은 한 번에 발바닥 하나씩 들어왔다.
이십 킬로미터에 가까워졌을 때 종아리에 작은 당김이 왔다. 몸이 먼저 긴장했다. 또 시작인가.
그는 보폭을 조금 줄이고 상태를 살폈다. 익숙한 피로인지, 발을 멈춰야 하는 통증인지 확인하며 몇 걸음을 더 갔다. 당김은 심해지지 않았다. 예전처럼 모르는 감각에 이름부터 붙이지 않고 천천히 달렸다.
길가에 의료진과 구급차가 보였다. 누군가 누워 있었고 주변 사람들이 공간을 비워주고 있었다. 성이사는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마음속에서 커지던 승리의 연설이 짧아졌다.
마지막 구간의 응원 소리가 들렸다. 다리가 아직 움직였고 숨도 이어졌다. 그는 남은 힘을 조금 보탰다.
결승선을 넘고 시계를 눌렀다.
한 시간 사십오 분.
숫자를 한 번 더 보았다. 틀리지 않았다. 이어폰에서는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재생을 멈췄다.
그는 울 줄 알았다. 두 번의 대회에서 걸었던 거리와 추운 저녁들이 한꺼번에 밀려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다. 숨이 차고 입안이 말랐고, 조금 걷고 싶었다. 큰 감동을 준비한 자리에는 뜻밖에도 조용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성이사는 안내를 따라 걸었다. 메달을 받고 기념품 봉투를 받았다. 누군가가 축하한다고 했고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출구 쪽에서 아내가 손을 들었다.
긴 생머리가 코트 어깨 위로 내려와 있었다. 한쪽 팔에는 그의 겉옷을 걸쳤다. 조금 추웠는지 다른 손을 흔들고 나서 곧 주머니에 넣었다. 수많은 얼굴 가운데 그녀만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성이사는 발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다리가 뻣뻣해서 생각만큼 빨라지지는 않았다.
“진짜 왔네.”
“온다고 했잖아.”
“자는 줄 알았지.”
아내가 그의 목에 걸린 메달을 보았다.
“잘됐어?”
“한 시간 사십오 분.”
말하고 나서 성이사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아내도 웃었다.
“그럼 이제 좀 입어.”
그녀가 겉옷을 건넸다. 성이사는 한쪽 팔을 넣다가 소매를 놓쳤다. 아내가 소매 끝을 잡아주었다. 손등이 잠깐 닿았다. 차가웠다.
연애할 때도 그녀는 약속 장소에서 저렇게 서 있었다. 자신을 발견하면 크게 소리치지 않고 손을 조금 들었다. 성이사는 그 손을 향해 걸어가곤 했다. 오늘은 거기까지 오는데 이십일 킬로미터가 조금 넘게 걸렸다.
아내의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첫 사진에서 성이사는 메달을 너무 높이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내가 내려보라고 했다. 두 번째에는 제대로 웃었다.
차는 탄천 쪽에 있었다. 성이사는 위치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도 거기에 세웠을 것이다. 주차장에 도착해보니 자신과 비슷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차들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한 시간 사십오 분 동안 서울을 달려온 사람이 차 안에서는 주차장 출구까지 가는 데 꽤 오랜 시간을 썼다. 성이사는 앞차의 제동등을 보다가 무릎 위의 메달을 보았다. 엄지로 표면을 문질렀다. 아까보다 조금 따뜻해져 있었다.
“그렇게 좋아?”
아내가 물었다.
“응.”
그는 이번에는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아내가 창문을 조금 더 내렸다.
“좋은데 냄새난다. 창문을 못 닫겠어. 얼른 가서 씻자.”
찬바람이 들어왔다. 성이사는 웃으면서 겉옷의 지퍼를 올렸다. 웃을 때 배 쪽도 조금 아팠다.
발밑에는 슈퍼블라스트 2가 있었다. 새것이던 밑창 가장자리에 도로의 먼지가 붙어 있었다. 그는 발끝을 살짝 들어보았다가 내려놓았다.
‘수고했다.’
신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정도 가격에는 대답도 포함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은 더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휴대전화에 회사 알림이 떴다. 성이사는 화면을 한 번 보고 뒤집어놓았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일이면 다시 출근할 것이고, 어느 말 앞에서는 또 명치가 굳을 것이다. 오늘의 기록이 그 모든 저녁을 대신 달려줄 수는 없었다.
아내가 히터의 방향을 그의 발 쪽으로 돌렸다. 창문은 조금 열려 있었고, 발끝에는 따뜻한 바람이 닿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목도리를 느슨하게 풀었다.
메달이 안전벨트 버클에 부딪쳐 작은 소리가 났다. 성이사는 손바닥으로 받쳐놓았다.
차가 몇 미터 앞으로 갔다가 다시 멈췄다. 그는 더 이상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아내 옆에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직 아무 음악도 틀지 않았는데, 그 침묵이 오래 계속되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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