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M5는 누구를 위해 도는가?

2026. 1. 27. 07:14성이사의 다중우주

일요일 저녁, 성이사의 거실은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성이사는 회사 돈으로 결재한 최신형 M5 맥북프로 앞에 앉아 클선생(Claude)과 고도화된 업무 자동화 스크립트를 짜고 있다. 4K 모니터 두 대가 뿜어내는 선명한 빛은 성이사의 안경 너머로 지적인 광채를 더해주지만, 그 빛의 그림자 속에서 두 딸의 한숨은 깊어만 간다.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이제 막 4학년으로 올라가는 첫째 딸이었다.
"아빠, 나 결정했어. 이번 학기 끝나고 그냥 '졸업 유예' 하려고. 아니면 휴학을 한 번 더 하든가. 정글로 나가기엔 내 스펙이 너무 없는 것 같아."

 

성이사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유예라니, 1년 더 학교 울타리에 있겠다는 뜻이냐?"
"울타리가 아니라 방공호지. 공고를 좀 봐봐. '신입 채용'이라 써놓고는 '즉시 전력감'만 찾고 있어. 나 같은 무경력 졸업 예정자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어. 차라리 학생 신분이라도 유지해야 인턴이라도 비벼볼 수 있단 말이야."

 

그때, 옆에서 노트북으로 알고리즘 문제를 풀던 둘째 딸이 '지선생(ChatGPT)'에게 코드 리뷰를 받다 말고 노트북을 탁 덮으며 가세했다. 그녀는 컴공 전공 2학년이다.


"언니, 유예가 문제가 아냐. 내 전공이 문제지. 아빠, 나 오늘 수업 시간에 배운 정렬 알고리즘, 클선생한테 시켰더니 0.5초 만에 최적화까지 끝내더라? 내가 밤새워 짠 코드가 AI의 기침 한 번에 완성되는 걸 보는데, 갑자기 내 4년이 통째로 'C++' 당하는 기분이었어. 컴공 졸업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AI 뒷바라지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성이사는 잠시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사실 성이사는 방금 전, 클선생과 제선생(Gemini)을 협업시켜 신입 사원 3명이 붙어야 할 분량의 데이터 라벨링과 분석 업무를 자동화 시스템으로 구축 완료한 참이었다.

 

성이사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가족 공용 계정인 제선생을 호출해 거실 모니터에 대화창을 띄웠다.

성이사: "제선생, 여기 '졸업 유예'를 꿈꾸는 4학년 사학과와 '전공 소멸'을 걱정하는 2학년 컴공생이 있네. 이들에게 위트 있는 위로 한마디 해줘 봐."

제선생의 답변은 언제나처럼 냉혹할 만큼 논리적이었다.
제선생(Gemini): "졸업 유예는 지연된 심판일 뿐이지만, 때로는 폭풍을 피하는 훌륭한 참호가 됩니다. 그리고 컴공생 따님, 코딩은 이제 언어가 아니라 '명령'의 영역입니다. 직접 벽돌을 굽기보다 설계도를 잘 그리는 법을 배우세요. 다만, 성이사님이 지금 M5 맥북으로 하고 계신 '업무 자동화'가 따님들의 미래 일자리 5개를 지운 건 통계적으로 명백한 사실입니다. 아빠가 너무 유능한 것도 불효가 되는 시대군요."

"이것 봐! 제선생도 아빠가 빌런이라잖아!" 두 딸이 동시에 성이사를 째려봤다.
성이사는 헛기침을 하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투자자 성이사는 "내 돈 안 들이고 회삿돈으로 최고 사양 장비를 맞춰 효율을 극대화했으니 수익률 100%다"라며 박수를 치고 있었지만, 직장인 성이사는 자식들의 앞길을 막고 있는 자신의 유능함에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얘들아,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무서운 건 아빠도 마찬가지란다. 그래서 아빠도 매달 9만 원씩 바쳐가며 저 선생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거야. 아빠의 M5가 너희의 미래를 갉아먹는 괴물이 아니라, 너희가 사회에 나올 때까지 버텨줄 단단한 '기본 소득'의 원천이 되도록 노력하마."


첫째는 결국 '졸업 유예 신청서'를 장바구니에 담았고, 둘째는 "차라리 인문학을 더 공부해서 AI를 더 잘 부려 먹는 법을 배우겠다"며 전공 서적 대신 클로드 프롬프트 가이드를 펼쳤다.


성이사는 다시 화면 속 코드를 응시했다. 노동이 소멸해가는 시대, 아빠의 효율은 딸의 절망이 되고, 그 절망을 유예하기 위해 아빠는 다시 효율의 정점으로 달려야 하는 이 지독한 블랙코미디. 성이사는 오늘 밤, 제선생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업무 효율을 높이는 법'에 대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노동소멸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이사와 성이사의 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