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뱃돈이라는 이름의 합법적 갈취, 그리고 생존의 재계약

2026. 2. 16. 16:13성이사의 다중우주

성이사는 매년 한 해를 마칠 때마다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며 나직이 다독인다.

올해도 회사의 '권력'이라는 시퍼런 칼날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무사히 생존했노라고.

이 순간만큼은 성이사의 다중우주 구성원들도 일제히 휴전을 선언한다. 고독한 별의 자리를 지켜낸 '직장인 성이사'를 향해, '작가 성이사'는 문학적 헌사를 보내고, '슈퍼 성이사'는 건전한 에너지를 불어넣으며, '투자자 성이사'는 묵직한 배당금 계좌를 보여주며 위로를 건넨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자축의 시간은 1년에 딱 두 번,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흔들린다.

바로 설날추석이다.

 

명절 아침. 성이사가 양복 대신 편한 차림으로 부모님 댁 거실에 앉는다. 아버지가 TV 볼륨을 줄이며 무심하게 묻는다.

아버지: "올해도… 별일 없었지?"

여섯 글자. 그러나 성이사의 뇌 속에서 이 질문은 이렇게 번역된다.

'너, 아직 안 잘렸지?'

 

성이사: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별일 없었습니다."

그 고개짓 한 번에, 다음 추석까지의 '고용 계약'이 암묵적으로 연장된다. 형제들 사이에서 '은퇴하지 않은 현역 임원'이라는 유효기간 도장이 찍히는 순간이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전을 뒤집으며 한마디 보탠다.

 

어머니: "요즘 뉴스 보면 임원들 많이 잘린다며. 너는 괜찮은 거지?"

성이사: "네, 괜찮습니다."

괜찮다. 아직은.

그 '아직은'이라는 두 글자가 목구멍에 걸렸다가, 전 기름 냄새에 묻혀 사라진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조카들이 하나둘 거실로 몰려든다. 부쩍 커버린 체구, 대학교 이름이 박힌 과잠을 걸친 채. 얼마 전까지 무릎에 앉혀놓고 용돈 만 원을 쥐어주던 녀석들이, 이제는 성이사의 어깨높이를 넘겼다.

이 순간, 성이사의 뇌 속에서 가장 먼저 경보를 울리는 것은 투자자 성이사다.

 

투자자 성이사: (빨간 경보등을 켜며) "긴급 속보. 조카 3명, 전원 대학생으로 확인. 세뱃돈 단가 최소 3배 상승 예상.

 

성이사: "형이 셋째한테 10만 원 넣는 거 봤어. 나도 최소 10은 맞춰야…"

 

투자자 성이사: "10만 원 곱하기 3명, 거기에 양가 부모님 봉투 두 개. 합산하면…"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멈춤) "…ETF 몇 주 날아간다."

 

성이사: "체면이라는 게 있잖아."

 

투자자 성이사: "체면이 배당금을 주더냐."

 

성이사: "……."

 

투자자 성이사: (목소리를 낮추며) "그리고 하나만 경고한다. 지금 기분에 취해서 지갑 열었다가는, 집에 도착하는 순간 아내의 '서슬 퍼런 냉기'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 냉기는 복리로 불어난다. 내가 보장한다."

성이사는 봉투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낀다.

 

식탁이 차려진다. 전, 갈비찜, 잡채, 그리고 형이 가져온 양주 한 병. '슈퍼 성이사'가 비상 출동한다.

 

슈퍼 성이사: "잠깐. 저 기름진 전 한 조각이 몇 칼로리인지 알아?" 

 

성이사: "명절인데 좀 먹자."

 

슈퍼 성이사: "명절에 늘어난 체지방은 평소의 달리기로 절대 해결 안 된다. 절대. 그건 열역학 법칙이야."

 

성이사: (전을 집으며) "한 조각만."

 

슈퍼 성이사: (전을 빼앗는 시늉을 하며) "한 조각이 두 조각 되고, 두 조각이 접시가 되는 거 모르냐. 너 작년 추석 이후에 몇 킬로 쪘는지 기억나?"

 

성이사: "……."

 

슈퍼 성이사: (최후통첩) "그리고 진짜 중요한 거 하나. 귀경길.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네 시간. 술과 기름진 음식을 절제 못 하면, 괄약근 조절에 실패하는 날이 온다."

 

투자자 성이사: (끼어들며) "그건 재무적 손실보다 심각한 문제다."

 

슈퍼 성이사: "야생의 호랑이로서의 위엄은커녕, 우리 다중우주 전체에 회복 불가능한 오점이 남는다. 알겠나."

성이사가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전 한 조각이 갑자기 시한폭탄처럼 보인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작가 성이사만이 홀로 낭만적 관찰자로 남아 있다.

그는 말이 없다. 기름 냄새와 왁자지껄한 소음, 형수의 날카로운 한마디, 아버지의 기침 소리, 조카들의 스마트폰 알림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미묘한 신경전을 그저 묵묵히 '눈팅'할 뿐이다.

 

작가 성이사: (혼잣말) "…자본주의적 정글의 일시적 휴전."

좋은 문장이 떠올랐다. 그는 이 풍경이 언젠가 자신의 에세이에서 쓸모 있어질 것임을 예감한다. 조카의 세뱃돈 봉투를 건네는 성이사의 떨리는 손, 그것을 지켜보는 투자자 성이사의 일그러진 표정, 전을 앞에 두고 벌어진 슈퍼 성이사와의 냉전까지.

 

작가 성이사: (수첩에 메모하듯) "비극이 반복되면 희극이 된다. 이건 훌륭한 소재다."

 

명절이 끝난다. 차에 오른다. 고속도로는 예상대로 주차장이다. 조수석의 아내가 조용히 묻는다.

 

아내: "봉투 얼마씩 넣었어?"

 

성이사: "……적당히."

 

아내: "적당히가 얼마야."

 

차 안에 찬 공기가 흐른다. 투자자 성이사가 "내가 뭐랬어"라는 표정을 짓는다.

백미러 너머로 뒷좌석에서 잠든 아이들의 얼굴이 보인다. 네비게이션은 도착 예정 시간을 세 번째 수정하고 있다.

성이사는 핸들을 잡은 채 생각한다.

 

요즘 흔해진 명절 해외여행은 아직 남의 나라 이야기다. SNS에는 발리의 석양, 오키나와의 바다가 넘쳐나지만, 성이사에게 설날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합법적 삥 뜯기를 감내하고, 아버지의 "별일 없었지?"라는 여섯 글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여전히 이 비정한 정글에서 살아남았음을 확인받는 의식.

고단하고, 씁쓸하고, 그러면서도 안도감이 드는 기간 연장의 의식.

 

브레이크등의 붉은 불빛이 끝없이 이어진 고속도로 위에서, 성이사는 문득 깨닫는다.

저 차들 안에도 각자의 성이사가 타고 있겠지.

누군가는 봉투 액수 때문에 조수석과 냉전 중이고, 누군가는 체중계를 떠올리며 후회하고, 누군가는 "올해도 별일 없었지?"라는 질문에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모두 돌아가고 있다. 자기 자리로.

내일이면 다시 시퍼런 칼날 위에 올라서야 하는, 각자의 자리로.

 

작가 성이사: (조용히) "…그래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문장은 거기서 끊겼다. 완성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성이사가 라디오를 켠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반복하고 있다.

차는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조카들 새뱃돈에 당황하는 성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