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길에서만 임원이 되고, 술자리에서는 별주부전의 토끼가 된다.

2026. 3. 28. 19:49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3월의 마지막 주. 성이사에게 출장이 잡혔다.

일본. 도쿄. 바이어 관리 차원의 정기 방문. 2월 말에 일정이 조율되었고, 운 좋게 3월 말에 확정되었다. 보통 일본은 3월 말에 벚꽃이 핀다. 이것은 우연이라고 성이사는 주장했지만, 이 시기에 출장이 잡히도록 슬쩍 일정을 조율한 것은 15년 차 직장인의 노련한 기술이었다.

 

출장 당일 아침.

성이사는 차를 끌고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짐은 백팩 하나. 노트북, 갈아입을 옷 몇 가지, 충전기. 출장의 철칙은 짐을 늘리지 않는 것이다. 짐이 무거우면 몸이 무겁고, 몸이 무거우면 판단이 느려진다. 성이사는 이 원칙을 20년간 지켜왔다. 투자자 성이사가 포트폴리오의 원칙을 지키듯, 직장인 성이사도 출장의 원칙을 지킨다.

 

공항 도착. 셀프 발권기에서 보딩패스를 뽑았다. 출국장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 성이사의 하루가 물 흐르듯 진행된다.

입국심사장. 성이사는 여권 옆에 APEC 카드를 꺼냈다.

APEC 비즈니스 트래블 카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회원국에서 입출국 우대를 받을 수 있는 카드. 일반 심사줄이 구불구불 늘어선 옆으로, 성이사는 우대 라인을 통해 미끄러지듯 통과했다. 이 3분의 시간 단축이 주는 쾌감은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보다 크다. 왜냐하면 비즈니스 클래스는 돈으로 사는 것이지만, APEC 카드는 직함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항공사 라운지. 커피 한 잔. 창밖으로 비행기가 보인다. 성이사는 커피를 마시며 잠시 멍해졌다. 이 순간만큼은 석대표의 레이저도, 블라인드의 소음도, AI의 토큰도 멀리 있었다.

 

탑승. 다이아몬드 등급이어서 우선 탑승이다. 이코노미 좌석이지만, 먼저 타서 자리에 앉아 짐을 정리하는 여유가 비즈니스의 느낌을 준다. 비행기가 이륙했다. 김포에서 하네다까지 2시간. 하늘 위에서 성이사는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된다. 석대표의 부하도 아니고, 팀원들의 상사도 아니고, 투자자도 러너도 작가도 아닌, 그냥 창가 좌석의 승객.

하네다 공항 도착. 다시 APEC 카드. 빠른 입국. 일본 입국심사관이 카드를 확인하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투자자 성이사:  "APEC 카드 연회비 없지? 무료 혜택이면 최고 수익률이야."

슈퍼 성이사: "하네다에서 호텔까지 러닝하면 몇 키로야?"

작가 성이사: "이 공항의 빛. 오후의 하네다 공항 빛은 나리타와 다르게…"

직장인 성이사: "다 조용히 해. 지금은 내 시간이야."

 

임원이 되고 나서 매년 방어전을 치르고 성과에 시달리는 성이사지만, 이런 출장길에서만큼은 본인이 임원이라는 것을 느꼈다. 우쭐해진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누리는 특혜인 것을 알면서도, 뭔가 대접받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 이 느낌은 한국에 돌아가면 24시간 안에 증발하지만, 출장 중에는 꽤 오래 지속된다.

 

도쿄. 호텔 체크인. 잠시 휴식.

저녁. 일본지사 김과장과 함께 바이어사 저녁 술자리에 참석했다.

일본 비즈니스의 문화를 성이사는 잘 알고 있었다. 1년에 한두 번 이렇게 정기적으로 만날 때는 특별한 주제가 없다. 안부를 묻고, 신뢰를 다지고,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AI 시대이고, 점점 오프라인 미팅과 파트너사와의 저녁 술자리가 사라지는 요즘,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적 문화.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 아날로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

혼네다테마에. 속마음과 겉모습이 다른 일본이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꾸준히 만나다 보면 다테마에의 두께가 조금씩 얇아진다. 그리고 일본 회사들은 이 '꾸준한 관계'가 보직 변동으로 깨지는 것을 무엇보다 꺼린다. 사람이 바뀌면 다테마에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하니까. 그래서 성이사가 직접 오는 것이다. 이메일로 충분한 내용을 위해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영역. 사람이 사람 앞에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며, 눈을 맞추는 것.

성이사가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마츠다 상무: (선물을 받으며, 깊이 고개를 숙이고) "성 이사님, 이츠모 오세와니 낫테 오리마스."

마츠모토 과장: (함께 고개를 숙이며)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성이사는 일본어를 잘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워낙 많이 한 탓에 조금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다. "나루호도"와 "스고이"와 "간바떼" 정도는 타이밍에 맞춰 넣을 수 있다. 나머지는 일본지사 김과장이 통역을 했다.

첫잔. 나마비루. 일본식 생맥주. 크리미한 거품이 유리잔 위에 쌓인다. "캄파이!" 네 개의 잔이 부딪혔다.

맥주에서 사케로 술이 바뀌었다. 긴자의 밤이 깊어갔다.

 

마츠다 상무: (사케를 따르며, 김과장을 통해) "BTS 광화문 공연, 뉴스에서 봤습니다. 대단하더군요."

성이사: (김과장 통역) "감사합니다. 한국 컨텐츠가 요즘 인기가 많아서."

마츠다 상무: "오타니도 한국에서 인기 있습니까?"

성이사: "물론이죠. 일본의 자랑이시잖아요."

외교적 멘트. 일본 바이어에게 오타니를 칭찬하는 것은, 한국 바이어에게 BTS를 칭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성이사의 15년 차 영업 감각이 자동으로 작동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비즈니스로 흘렀다.

 

마츠다 상무: (김과장 통역) "한국 컨텐츠 인기가 많아서, 더 많은 제품을 연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성이사: "가능합니다. 구체적인 리스트는 이메일로 주고받겠습니다."

사실 이 정도의 이야기는 이메일 한 통이면 된다. 하지만 서로의 접대 분위기, 초대했을 때 책임자가 오느냐 안 오느냐, 술을 얼마나 같이 마시느냐. 이것이 일본 비즈니스 미팅의 전부다. 관계의 깊이를 술잔의 깊이로 파악하는 문화.

성이사는 평소에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 출장길에서만큼은 마츠다 상무와 많이 마신다. 그것이 성이사의 성의 표현이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통역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와, 술잔을 비우며 전달되는 성의는 다른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전자는 머리로 전달되고, 후자는 간으로 전달된다.

긴자의 밤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츠다 상무: (자리에서 일어서며) "성 이사님, 하이볼바에서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성이사의 내면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이미 맥주 세 잔에 사케 다섯 잔. 간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슈퍼 성이사가 "내일 달려야 하는데"라고 속삭였고, 투자자 성이사가 "하이볼 한 잔에 얼마야"라고 계산했고, 작가 성이사가 "긴자의 하이볼바라니, 서사적이잖아"라고 흥분했다.

 

성이사: "모치론데스." (물론이죠.)

하이볼바. 긴자 뒷골목의 작은 바. 카운터에 여섯 좌석. 바텐더가 얼음을 깎아 위스키를 부었다. 탄산수가 올라오며 잔 안에서 금빛 기포가 춤을 추었다.

마츠다 상무와 성이사는 나란히 앉아 하이볼을 마셨다. 통역 없이. 김과장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호텔로 돌아간 뒤였다. 두 사람 사이에 언어는 없었지만, 술잔을 기울이는 리듬이 대화를 대신했다.

 

마츠다 상무: "성상... 라이넨모... 요로시쿠." (내년에도 잘 부탁합니다.)

성이사: (고개를 끄덕이며)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

하이볼 한 잔이 비었다. 마츠다 상무가 택시를 불러줬다. 배웅까지 해줬다.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마츠다 상무의 뒷모습이 택시 창문 너머로 작아져 갔다.

 

이것이 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메일로 보낼 수 없는 것. 슬랙으로 전달할 수 없는 것. 코워크가 분석할 수 없는 것.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술을 마시며,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의 가치는 토큰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호텔. 샤워. 침대.

성이사는 천장을 바라보며 내일 아침의 숙취를 두려워했다. 밤새 뒤척였다. 잠을 잔 건지 안 잔 건지, 알람이 울렸을 때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침 9시. 호텔 방의 책상 위에 노트북을 펴고, 한국 본사의 화상회의에 참여했다. 숙취 상태에서 카메라를 켜는 것은 고문이었다. 얼굴이 부어 있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끄면 석대표가 "성이사, 카메라 왜 껐어?"라고 할 것이다. 카메라를 켰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성이사는 속이 뒤집히는 것을 참았다. 위장에서 사케와 하이볼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얼굴은 평정을 유지하면서, 위장은 내전 상태. 직장인 성이사와 위장이 서로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석대표가 말했다.

 

석대표: "성이사, 바이어사들 별일 없어요?"

순간 성이사의 뇌가 고속 회전했다. 숙취로 느려진 프로세서가 오버클럭 모드에 돌입했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조합되었다. 어젯밤 마츠다 상무의 얼굴, 추가 오더 가능성, K-컨텐츠 연계 제안.

 

성이사: "마츠다 상무가 추가 오더를 검토 중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메일로 조율하기로 했고, 출장 후 서면 보고 올리겠습니다."

간결하고 명확했다. 15년 차의 보고 스킬은 숙취 상태에서도 작동했다.

 

석대표: "반가운 소식이네요 복귀 후 봅시다."

회의가 종료되었다. 성이사는 노트북을 닫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했다.

숙취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출장길 떠날 때는 임원이다. APEC 카드와 다이아몬드 등급과 라운지 커피. 하지만 저녁에 바이어들과 술을 마시고, 아침에 깨어 숙취와 싸우며 화상회의를 하고, 화장실에서 위장의 반란을 수습하는 이 순간, 성이사는 간으로 비즈니스를 연결하는 극한 직업의 종사자일 뿐이었다.

 

슈퍼 성이사: "오전 11시 바이어 미팅 어떡해?"

성이사: (변기 앞에서) "…일단 살고 보자."

<입국 심사장, 성이사는 누구보다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