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2. 10:59ㆍ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성이사는 최근 클로드를 부쩍 많이 쓰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안 쓰면 안 되는 지경이 된 것이다.
AI의 신기능은 하루가 다르게 업데이트되었다. 어제는 코워크가 나왔고, 그제는 코드가 업데이트되었고, 지난주에는 뭔가 또 나왔는데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성이사는 처음에는 쫓아가보려 했다. 유튜브를 보고, 블로그를 읽고, 뉴스레터를 구독했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깨달았다.
나는 절대로 AI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깨달음 직후에, 두 번째 깨달음이 왔다.
하지만 대세인 AI 정도는 꼭 써야 한다.
성이사의 동료 김이사: "성이사, 나는 AI 안 써. 신뢰할 수 없어. 지난번에 물어봤더니 엉뚱한 소리 하더라고."
성이사: "뭘 물어봤는데?"
김이사: "우리 회사 매출."
성이사: "…그건 AI 문제가 아니라 기밀 문제 아닌가."
김이사: "어쨌든 못 믿어. 사람이 직접 해야지."
성이사는 동료들의 말을 존중했지만, 동의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AI가 자신보다 똑똑하다.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자존심이 좀 걸렸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500페이지의 논문을 읽고 토론하는 데 걸리는 시간. AI는 1분. 성이사가 같은 논문을 읽고 AI와 토론할 수준이 되려면 일주일. 게임 자체가 안 되는 것이다. 100미터 달리기에서 자동차와 경주하는 것과 같다. 이길 수 없다. 다만, 자동차를 얼마나 잘 운전하느냐가 승부를 가른다.
투자자 성이사: (지나가며) "야, 너 클로드 코워크라는 거 봤어? 그거 나오고 나서 SaaS 기업들 주가가 다 빠지고 있어. 나스닥 출렁거린다."
성이사: "뭐?"
투자자 성이사: "AI가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대체하기 시작한 거야. 그 코워크인가 뭔가가 팀을 만들어서 일을 시킬 수 있다며? 그러면 기존 SaaS 솔루션 쓸 이유가 없어지잖아."
성이사: "…그래서 나스닥이?"
투자자 성이사: "어. 꽤 빠졌어.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너도 빨리 써야 한다는 거야. 안 쓰면 네가 SaaS처럼 대체당해."
투자자 성이사의 경고가 뒤통수를 때렸다.
성이사는 이해했다. SaaS 기업이 망하는 이유와, 자신이 위험한 이유가 같은 구조였다. AI가 직접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중간에서 전달하고 정리하는 사람'의 가치가 급락한다. 성이사가 지금까지 해온 업무의 상당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계약서 검토, 리스크 분석, 보고서 작성. AI가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것들.
매주 월요일 오전, 석대표와의 주간 미팅. 석대표의 눈에서 발사되는 레이저. '그것도 모르냐'라는 무언의 광선. 성이사는 그 레이저를 15년간 맞아왔지만, 아직도 벌써부터 쫄린다. 하지만 요즘의 공포는 차원이 다르다. 석대표가 레이저를 쏘는 것이 아니라, 석대표가 AI에게 직접 물어보는 날이 오면... 그때 성이사의 자리는?
성이사는 행동에 나섰다. 파트너사의 공급계약서를 법무팀에 넘기기 전에, 먼저 클로드로 돌려봤다. 리스크 포인트, 협상 여지, 과거 계약 대비 변경 사항. 꽤 쓸 만한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성이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성이사: (유튜브를 보며) "코워크… 팀을 만들 수 있다고? 각 팀에 다른 역할을 주고?"
그는 유튜브를 세 편 보고 학습했다. 코워크의 핵심은 팀 구성이었다. 마크다운 파일로 지침서를 만들고, 작업 폴더에 과거 계약서와 히스토리를 넣어두면, AI 팀이 각자의 관점에서 분석을 수행한다.
성이사는 세 개의 팀을 설계했다.
1팀: 히스토리 분석팀 — 과거 계약서와의 비교, 변경 이력 추적. 2팀: 법무 리스크 분석팀 — 조항별 리스크 등급 분류, 수정 필요 사항. 3팀: 사업적 기대 분석팀 — 공급가의 타당성, 사업적 시너지 평가.
지침서를 마크다운으로 정리하고, 과거 계약서 파일을 모두 폴더에 넣었다. 그리고 코워크를 실행했다.
돌리자마자, 성이사는 그가 처음 보는 광경을 목격했다.
토큰이 빠지고 있었다.
화면 한쪽에서 숫자가 미친 듯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것은— 이것은 마치 레일건에서 탄피가 쏟아지는 것과 같았다. 아니, 세탁기에 동전을 넣었는데 동전이 녹아서 빠지는 속도였다. 세 팀이 동시에 가동되면서 토큰을 먹어치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성이사: "…뭐야 이게. 왜 이렇게 빠져."
투자자 성이사: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며) "뭐가 빠져? 주가?"
성이사: "아니, 토큰."
투자자 성이사: "토큰? 그게 돈이야?"
성이사: "…비슷한 거야."
투자자 성이사: (화면을 들여다보며) "야, 이거 줄어드는 속도가 내 ETF 하락장 때 보다 빨라. 멈춰. 당장 멈춰."
그리고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토큰이 부족합니다. Max 플랜으로 업그레이드하세요.]
투자자 성이사: "업그레이드? 돈을 더 내라고?"
성이사: "팀을 구동하려면 제대로 된 플랜이 필요한가 봐."
투자자 성이사: "얼마인데?"
성이사: "……."
투자자 성이사: "얼마냐고."
성이사: "…회사 돈이야."
투자자 성이사: "회사 돈이면 괜찮아. 빨리 올려."
변절의 속도가 빛보다 빨랐다.
성이사는 총무팀에 협조를 구하고 지출결의서를 작성했다. '파트너사 계약서 AI 분석을 위한 클로드 Max 구독'. 결재 라인을 타고 오후에 승인이 떨어졌다. Max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코워크를 재가동했다. 이번에는 토큰이 넉넉했다. 세 팀이 풀파워로 돌아갔다.
30분 후, 결과물이 나왔다.
성이사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1팀은 과거 3년간의 계약서를 비교 분석하여 조항별 변경 이력을 표로 정리해놓았다. 2팀은 신규 계약서의 12개 리스크 포인트를 상중하로 분류하고, 각각에 대한 수정 문구까지 제안해놓았다. 3팀은 공급가의 시장 대비 타당성을 분석하고, 협상 시 레버리지로 쓸 수 있는 데이터를 정리해놓았다.
성이사가 일주일 동안 밤새워 해야 할 작업이었다.
30분.
성이사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감탄이 아니었다. 감탄은 5초 만에 끝났고, 그 자리를 두려움이 채웠다.
성이사: (혼잣말) "…아."
영화 하나가 떠올랐다. '어쩔 수가 없다.' 이병헌이 연기한, 시대에 밀려나는 사람의 이야기. 그 영화 속 이병헌의 표정이 지금 자신의 얼굴에 겹쳤다.
몇 년 안에 나는 저 이병헌이 될 수도 있겠구나.
AI를 쓰면 쓸수록 깨달음이 생기고,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미래의 자신의 모습이 더 투명하게 투영된다. 이것이 AI 시대의 아이러니였다. 도구를 잘 쓸수록, 도구 없이는 살 수 없게 되고, 도구가 더 잘해질수록, 자신이 필요 없어진다.
작가 성이사: (조용히) "그 두려움, 나중에 글로 쓸 수 있어."
성이사: "글로 써서 뭐 해."
작가 성이사: "최소한 AI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잖아. 그게 네가 가진 유일한 것일 수도 있어."
성이사는 코워크가 만들어준 분석 보고서를 저장하고 모니터를 껐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투자자 성이사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국제 정세와 투자 수익을 지키기 위해 불안해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AI의 놀라운 성능 앞에서, 본인의 미래가 불안한 것이다.
그래도 투자자 성이사가 있어서 다행이다.
적어도 경제적 안전망이 있다는 것. 직장이 사라져도 계좌는 남는다는 것. 그 생각이 아이러니하게도, 직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한 꺼풀 더 벗겨냈다.
성이사: (석대표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며) "파트너사 공급계약 사전 분석 자료입니다."
석대표: (보고서를 넘기며) "…이거 혼자 한 거야?"
성이사: "AI를 활용했습니다."
석대표: "활용. 좋은 표현이네. '대체'가 아니라 '활용'이라."
석대표의 왼쪽 눈꺼풀이 떨리지 않았다. 이 사내가 만족하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성이사는 알았다. 석대표가 만족하는 이유가, 성이사의 능력이 아니라 AI의 성능 때문이라는 것을.
회의실을 나온 성이사는 복도 창밖을 바라봤다. 봄이 오고 있었다. 나무에 연초록 잎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무는 봄이 오면 새 잎을 내지만, 그건 나무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계절이 돌아온 것뿐이다.
나는 AI라는 계절 앞에서, 새 잎을 낼 수 있을까.
아니면 잎이 져야 할 나무가 되는 걸까.
성이사는 대답하지 못한 채 자리로 돌아갔다. 모니터에는 클로드 코워크의 대시보드가 깜빡이고 있었다. 토큰 잔량: 충분.
충분한 것은 토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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