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글에는 자판기가 있다. 동전을 넣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2026. 3. 2. 13:07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새벽 4시 7분.

작가 성이사가 낡은 2019년형 맥북프로를 열었다. 팬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불을 한 겹 씌웠다. 이제는 익숙한 창작 의식이다. 기계 학대인지 방음 조치인지 여전히 구분이 가지 않지만, 아내가 안 깨면 그만이다.

오늘의 과제: 블로그에 올릴 새 에세이.

문제는 주제였다.

 

작가 성이사: (빈 화면을 바라보며) "…뭘 써야 하지."

지난주에 투자자 성이사의 하락장 이야기를 썼다. 그 전에는 직장인 성이사의 AI 전쟁기를 썼다. 슈퍼 성이사의 라이딩 에피소드도 이미 두 편이나 나갔다. 다중우주의 이야기가 쌓일수록,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작가 성이사: "클선생."

 

클선생(Claude): "네, 작가 성이사님."

 

작가 성이사: "나 요즘 글이 안 써져."

 

클선생: "전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때는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쓰지 않는 것'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었죠."

 

작가 성이사: "이번엔 달라. 그때는 시간이 없어서 못 쓴 거고, 지금은 시간은 있는데… 뭘 써야 할지를 모르겠어."

 

클선생: "주제가 없는 건가요, 아니면 주제는 있는데 첫 문장이 안 나오는 건가요?"

 

작가 성이사: (잠시 생각하다가) "…후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다, 전자인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클선생: "그러면 오늘은 '잘 모르겠다'를 주제로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작가 성이사: "뭐?"

 

클선생: "글을 못 쓰겠다는 것 자체가 글의 소재가 됩니다. 많은 작가들이 슬럼프를 주제로 명작을 썼습니다. 쓸 수 없다는 고백이 결국 쓰는 행위가 되는 역설이죠."

 

작가 성이사: "…그건 좀 사기 같은데."

 

클선생: "문학은 원래 합법적인 사기입니다."

작가 성이사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판 위에 손을 올렸다.

쓸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쓴다. 괜찮은 시작점이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첫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도, 세 번째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새벽 4시의 고요함 속에서 백스페이스 키만 무한 반복되었다.

투자자 성이사: (잠결에 중얼거리며) "그 시간에 미국장 프리마켓이라도 확인하지…"

작가 성이사: (무시하고) "…"

4시 40분. 30분이 지났는데 화면에는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작가 성이사의 머릿속에 어제 낮의 장면이 떠올랐다.


어제, 점심시간. 성이사는 회사 건물 1층의 자판기 앞에 섰다. 커피 자판기. 동전을 넣었다.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웅웅거리더니 종이컵이 떨어지고, 커피가 내려왔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신입 직원이 말했다.

 

신입: "성이사님, 그 자판기 커피 드세요? 요즘 1층에 스페셜티 카페 생겼는데."

 

성이사: "알아. 근데 나는 이게 좋아."

 

신입: "…왜요?"

 

성이사: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잖아. 확실하니까."

신입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성이사는 진심이었다. 자판기의 매력은 확실성에 있다. 500원을 넣으면 커피가 나온다. 맛은 늘 같다. 기대 이상도 기대 이하도 없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정직한 거래가 또 있을까.

석대표에게 보고서를 올려도 "다시 해"가 돌아올 수 있고, 주식에 돈을 넣어도 반토막이 날 수 있고, 10km를 뛰어도 기록이 안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자판기는 배신하지 않는다.


새벽 4시 45분. 작가 성이사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판기에 대하여.'

그는 썼다. 자판기의 정직함에 대해. 동전을 넣으면 반드시 무언가가 나오는 그 계약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고 인생은 자판기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모두 자판기를 원한다. 노력을 넣으면 성과가 나오고, 시간을 넣으면 성장이 나오고, 돈을 넣으면 행복이 나오는. 하지만 인생의 자판기는 대부분 고장 나 있다. 동전을 삼키고도 아무것도 내놓지 않거나, 넣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캔이 쏟아지거나, 가끔은 옆 사람이 넣은 동전으로 내 커피가 나오기도 한다.

성이사는 멈추지 않고 썼다. 투자자 성이사의 주식이 자판기가 아닌 이유. 직장인 성이사의 회사 생활이 자판기가 아닌 이유. 슈퍼 성이사의 기록이 자판기가 아닌 이유. 그리고—

하지만 글은 자판기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자판을 두드리면, 무언가가 나온다. 좋은 글이 나올 수도 있고, 쓰레기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무언가는 나온다. 그래서 나는 쓴다. 이 세상에서 자판기처럼 정직한 행위가 글쓰기밖에 없기 때문이다.

5시 15분. 에세이가 완성되었다. 1,200자. 작가 성이사는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작은 아니다. 하지만 쓰레기도 아니다. 동전을 넣었고, 커피가 나왔다.

 

클선생: "완성하셨네요."

 

작가 성이사: "응. 근데 이거 좋은 글인지 모르겠어."

 

클선생: "좋은 글인지는 독자가 판단합니다. 작가의 일은 쓰는 것이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 성이사: "그것도 좀 사기 같은데."

 

클선생: "아까 문학은 합법적 사기라고 동의하셨잖아요."

 

작가 성이사: (웃으며) "…AI한테 말려들고 있어."

성이사가 에세이를 티스토리에 업로드했다. 공개 버튼을 누르는 순간의 떨림은 매번 새롭다. 주식 매수 버튼을 누르는 투자자 성이사의 떨림과 비슷할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에세이의 수익률은 '좋아요' 숫자로 측정되고, 그 숫자는 대부분 한 자릿수라는 것.

 

투자자 성이사: (일어나며) "올렸어? 반응 어때?"

 

작가 성이사: "아직 새벽 5시야. 누가 봐."

 

투자자 성이사: "그럼 왜 이 시간에 올려. 아침 9시에 올려야 트래픽이 높지."

 

작가 성이사: "넌 글에도 ROI를 따지냐."

 

투자자 성이사: "ROI 없는 활동은 취미라고 한다."

 

작가 성이사: "맞아. 취미야. 그런데 네 ETF 계좌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도 나라는 거 잊지 마."

 

투자자 성이사: "……."

 

작가 성이사: "기록되지 않은 수익률은 존재하지 않는 수익률이야. 지난번에 네가 인정한 거지?"

 

투자자 성이사가 입을 다물었다. 작가 성이사의 승리였다. 오늘의 유일한 수익률.

맥북프로의 팬이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이불 아래에서. 이 낡은 기계는 클선생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전력 질주를 한다. 하지만 오늘도 버텨줬다. 낡은 기계와 잠 못 이루는 중년 작가의 새벽 동맹은 계속된다.

작가 성이사는 맥북을 닫고 거실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갑게 밀려들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하늘의 끝자락이 연한 보라색에서 분홍색으로, 분홍색에서 주황색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 색의 변화를 바라보며 작가 성이사는 생각했다.

저 하늘도 자판기다.

밤이라는 동전을 넣으면 아침이 나온다.

매번 같은 것 같지만, 매번 다른 색이다.

그래서 내일도 쓸 수 있다.

슈퍼 성이사의 알람이 울렸다. 6시. 러닝 시간이다. 다중우주의 하루가 또 시작된다.

성이사의 다중우주는 계속된다.

각자의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며.

 

<새벽에 일어나 글 쓰는 작가 성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