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8. 11:31ㆍ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변화는 석대표의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커뮤니케이션 조직에서 원팀으로 전환한다."
경영진 회의에서 내려온 이 한 줄의 지시가 성이사의 조직을 뿌리째 흔들었다.
기존의 방식은 이랬다. 사람들은 각자 부족한 부분이 있고, 그 부족함을 서로 메꿔주며, 그 사이를 커뮤니케이션으로 연결하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임원 밑에 그룹팀장, 그룹팀장 밑에 팀장. 수직의 커뮤니케이션 라인이 정돈되어 있으면 각자의 능력이 조합되어 성과가 만들어졌다. 이 구조에서 중간 관리자의 가치는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성이사도 느끼고 있었다. 이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성이사 자신만 봐도 그랬다. 전략 분석은 클선생, 제선생, 지선생과 정리하고, 보고서는 클로드 코워크로 뚝딱 만들어서 석대표에게 슬랙으로 날린다. 그룹팀장에게 "이거 정리해 주세요"라고 할 일이 줄었다. 팀장에게 "이거 확인해 주세요"라고 할 일도 줄었다. 성이사 혼자— 아니, 성이사와 AI가 둘이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가 눈에 띄게 넓어진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성이사: (팀원 박대리의 자리를 지나가며) "박대리, 그 공급사 데이터 정리 다 됐어요?"
박대리: "아, 네. 어제 에이전트 돌려서 이미 끝냈습니다. 슬랙으로 보내드렸는데요."
성이사: "…어제?"
박대리: "네. 자동화 파이프라인 만들어놨거든요. 데이터 들어오면 자동으로 정리되게."
성이사는 슬랙을 확인했다. 어젯밤 11시에 박대리가 보낸 파일. 열어보니 완벽했다. 과거에는 그룹팀장이 지시하고, 팀장이 확인하고, 대리가 실행하는 삼단계 프로세스가 필요했던 작업이, 이제 대리 한 명과 AI 에이전트 하나로 끝나고 있었다.
성이사는 오히려 이런 팀원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AI 에이전트를 스스로 활용해서 업무 자동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은 중간 관리자를 거치지 않고, 성이사에게 직접 결과물을 보여줬다. 커뮤니케이션 라인이 단축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단축의 가장 큰 피해자는, 중간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다.
금요일 오전. 민그룹팀장이 면담을 요청했다.
민팀장. 7년을 함께한 사람. 성이사가 이 조직에 부임했을 때부터 옆에 있었던 사람. 클라이언트가 갑자기 미팅을 요청하면 새벽에라도 자료를 만들어주던 사람. 성이사가 석대표에게 깨지고 돌아오면 아무 말 없이 커피를 가져다주던 사람.
민팀장: (성이사의 방에 들어서며) "이사님, 시간 되세요?"
성이사: "어, 들어와. 앉아요."
민팀장이 소파에 앉았다.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성이사의 10년 차 눈치 센서가 즉각 반응했다. 석대표의 눈꺼풀 떨림은 0.3초 단위로 읽지만, 7년을 함께한 동료의 표정은 한눈에 읽힌다.
이 표정은…
민팀장: "이사님, 최근에 업무 방식이 많이 바뀌었잖아요."
성이사: "네."
민팀장: "솔직히 여쭤볼게요. 지금 이렇게 일하는 게… 맞는 건가요?"
성이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 질문을 매일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팀장: "저는 기획을 하고, 커뮤니케이션을 설계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게 제 역할이었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그 다리가 필요 없어진 것 같아요. 이사님이 AI로 직접 다 하시고, 팀원들도 에이전트로 알아서 하고. 제가 중간에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성이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것이 AI 시대의 진짜 전쟁이었다. 토큰이 빠지는 속도가 아니라, 사람이 빠지는 속도. 석대표의 '원팀 전환' 정책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석대표가 아니었어도 이 변화는 왔을 것이다. 피그마와 어도비가 기획자들의 필수 도구였던 시대가 있었다. 그 전에는 파워포인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AI 에이전트가 그 모든 것을 대체하고 있고, 피그마와 어도비의 주가가 그 증거였다. SaaS 시장의 공포. 그것은 곧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의 공포이기도 했다.
성이사: "민팀장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같은 고민을 합니다."
민팀장: "이사님도요?"
성이사: "저도 AI가 결국 내 일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까, 적응하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에요. 지금은 과도기입니다. 민팀장님도 에이전트와 직접 일하시는 걸 권합니다."
성이사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공허했다. '에이전트와 일하세요'라는 조언이, 7년 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다리를 놓아온 민팀장에게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이 안정화된 그 주 금요일 오후.
민팀장이 다시 면담을 요청했다.
성이사는 알았다. 이번 면담의 내용이 무엇인지.
민팀장: "이사님."
성이사: "네."
민팀장: "퇴사하려고 합니다."
역시.
민팀장: "저는… 제 능력을 좀 더 이해해줄 수 있는 곳으로 가려고요.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있고, 그걸 필요로 하는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성이사는 민팀장의 눈을 바라봤다. 흔들림이 없었다. 충분히 고민한 사람의 눈이었다.
성이사: "…잠시만, 제가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성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이사: (속으로) "슈퍼 성이사."
슈퍼 성이사가 응답했다. 성이사는 사무실을 나와 회사 근처 공원으로 갔다. 한 바퀴. 15분. 이번 주에 두 번째 공원 산책이다. 주식 패닉 때도 공원을 돌았고, 민팀장의 퇴사 앞에서도 공원을 돈다. 공원은 다중우주의 응급실이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붙잡아야 하나.
붙잡을 수 있나.
붙잡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본질적으로 성이사가 "퇴사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해도 바뀔 것은 없다. 석대표의 정책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AI의 발전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의 자리는 계속 좁아질 것이다. 민팀장이 이 회사에 남아도 같은 고민을 내년에 또 할 것이다.
성이사는 공원을 다 돌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민팀장을 다시 불렀다.
성이사: "민팀장님."
민팀장: "네."
성이사: "충분히 고민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민팀장: "…네."
성이사: "저도 민팀장님이 어떤 존재인지, 저와 어떻게 일해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7년이잖아요."
민팀장: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네."
성이사: "그래서 퇴사는 보류해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민팀장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성이사: "하지만…"
성이사가 잠시 멈췄다. 다음 문장을 말하는 것이 이번 주 주식 폭락보다 어려웠다.
성이사: "본질적으로, 제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바뀔 것이 없다는 걸, 민팀장님도 너무 잘 알고 계시죠."
민팀장: "……."
성이사: "충분히 마음 정리를 하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민팀장: (고개를 끄덕이며) "…네."
성이사: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퇴사일은 업무 정리되는 날짜를 말씀해 주세요. 인사팀에는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민팀장: "…감사합니다, 이사님."
민팀장이 일어섰다.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딸깍.
성이사는 창밖을 바라봤다.
7년.
신입 팀장일 때 데려와서, 그룹팀장으로 키우고, 수십 번의 야근과 수백 번의 미팅을 함께하고, 석대표의 독설을 같이 맞고, 연말 회식에서 같이 취한 사람.
그 사람의 이별 통보가, 이번 주 코스피 천 포인트 폭락보다 충격적이었다.
주식은 반등한다. 어제 천 포인트 빠졌다가 오늘 다시 올랐다. 숫자는 그렇다. 내려갔다 올라간다. 하지만 사람은 반등하지 않는다. 한번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공백은 숫자로 메꿀 수 없다.
작가 성이사: (조용히) "…민팀장이 간다고?"
성이사: "응."
작가 성이사: "…어떻게 느꼈어?"
성이사: "모르겠어. 화가 나는 건지, 슬픈 건지, 아니면 부러운 건지."
작가 성이사: "부러워?"
성이사: "…AI보다 자기 능력으로 살고 싶다는 사람이. 나도 그러고 싶거든."
작가 성이사: "……."
성이사: "하지만 난 못 가잖아. 아직은."
성이사는 민팀장을 응원하기로 했다. AI보다 사람의 힘을 믿는 민팀장을. 시대에 역행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는 그 선택을.
왜냐하면 성이사도 결국 AI가 아니기 때문이다.
클로드가 계약서를 분석해도, 코워크가 보고서를 만들어도, AI가 민팀장의 7년을 대체할 수는 없다. 야근 후 새벽에 보내온 카톡 한 줄, "이사님, 자료 보내드렸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의 마침표에 담긴 피로와 책임감. 그것은 토큰으로 환산할 수 없다.
성이사는 모니터를 켰다. 석대표에게 보낼 인사팀 협조 메일을 써야 했다. 그리고 민팀장이 빠진 후의 조직도를 다시 그려야 했다.
클로드가 도와줄 것이다. 조직도 재설계, 업무 재분배, 인력 충원 계획.
하지만 민팀장이 문을 닫고 나간 그 딸깍 소리만은, 어떤 AI도 채워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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