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8. 10:20ㆍ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화요일 오전 9시. 개장 종이 울렸다.
투자자 성이사는 화면을 켰다. 지난 금요일, 원칙대로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하며 추가 매수를 했던 바로 그 주식들이 화면에 떠 있었다.
빨간색이길 바랐다.
파란색이었다.
코스피 지수가 무너지고 있었다. 숫자가 떨어지는 속도가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자유낙하에 가까웠다. 반도체, 원전, 증권. 투자자 성이사가 믿었던 삼총사가 동시에 바닥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투자자 성이사: "……."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뛴 것 같은 그 물리적 충격. 롤러코스터가 정점에서 떨어지는 순간의 무중력 상태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의 흉강 안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직장인 성이사: (옆에서 조용히) "…얼마나 빠졌어?"
투자자 성이사: "…말하기 싫어."
직장인 성이사: "그래도 말해."
투자자 성이사: "금요일에 산 것만 마이너스 4%. 전체 포트폴리오는…" (목소리가 작아지며) "…보기 싫어."
하지만 투자자 성이사의 뇌는 패닉 속에서도 계산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패닉 때문에 계산이 더 빨라졌다. 숫자를 읽고, 해석하고, 시나리오를 돌리는 속도가 평소의 세 배였다. 그리고 그 계산 끝에 하나의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건 과매도다.
투자자 성이사: (갑자기 눈빛이 바뀌며) "…잠깐. 이거 오히려 기회 아니야?"
직장인 성이사: "뭐?"
투자자 성이사: "이 회사들이 진짜 이만큼 떨어질 회사들이야? 반도체 파운드리 수주 잔고가 사상 최대인 회사가, 이란 때문에 이만큼 빠지는 게 말이 돼?"
직장인 성이사: "네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잖아."
투자자 성이사: "아니, 이건 내가 아는 영역이야. 남들이 패닉이고, 주가가 실적 대비 말도 안 되게 빠졌을 때, 이 회사가 정말로 이 가격일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으면 들어가는 거야. 내 투자 철학이잖아. 그리고 CMA에 아직 실탄이 남아 있어."
직장인 성이사: "…금요일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투자자 성이사: "금요일은 금요일이고 오늘은 오늘이야. 금요일보다 더 싸졌으니까 더 좋은 거지."
직장인 성이사: (한숨) "…네 돈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화요일 오후장. 투자자 성이사는 CMA 계좌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실탄을 꺼냈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매수 버튼을 눌렀다. 금요일의 물타기에 화요일의 물타기를 더한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믿었다. 평균 매입 단가가 내려갔다. 반등만 하면 금요일의 손실까지 메꿔진다.
계산은 완벽하다.
다만, 시장이 계산대로 움직인 적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화요일 퇴근 후. 넥스트장(시간 외 거래).
투자자 성이사는 오후에 매수한 주식의 가격을 확인했다.
더 떨어져 있었다.
매수가보다 추가로 2% 하락. 화면의 파란 숫자가 눈에 박혔다. 금요일에 산 것, 화요일 오후에 산 것, 전부 마이너스. 이중 물타기가 이중 손실이 되어 있었다.
투자자 성이사: (멍하니 화면을 보며) "……."
작가 성이사: (조심스럽게) "…괜찮아?"
투자자 성이사: "…유튜브 틀어줘."
작가 성이사: "뭘?"
투자자 성이사: "주식… 긍정적으로 말하는 채널. 아무거나."
투자자 성이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틀었다. "지금이 매수 기회입니다", "이 구간을 버텨야 합니다", "반등은 반드시 옵니다". 주식 유튜버들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정신승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목소리들이 필요했다. 마취제처럼. 수면제처럼.
투자자 성이사는 유튜버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꿈속에서도 차트가 보였다.
수요일.
성이사의 다중우주 역사상 가장 긴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전 9시 개장과 동시에 코스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투자자 성이사가 지금까지 주식을 해왔던 어떤 시기보다도 빠르게, 어떤 하락장보다도 깊게, 시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반도체. 파란색. 더 진한 파란색. 원전. 파란색. 더더 진한 파란색. 증권. 파란색. 거의 남색.
투자자 성이사: (손이 떨리며) "바닥이… 바닥이 어디야…"
바닥이 없었다. 지하 1층을 뚫으니 지하 2층이 나왔고, 지하 2층을 뚫으니 지하 3층이 나왔다. 지하 밑에 지하. 핵 벙커까지 뚫을 기세로 숫자가 내려갔다.
투자자 성이사가 패닉에 빠졌다.
진짜 패닉이었다. 과거의 불면증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불안이었지만 지금은 공포였다. 두 번의 물타기가 두 번의 족쇄가 되어 발목을 잡고 있었고, CMA는 텅 비어 있었고, 손절하자니 금액이 너무 크고, 버티자니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패닉은 다중우주 전체로 번졌다.
작가 성이사: (펜을 내려놓으며) "…나도 아무것도 못 하겠어."
슈퍼 성이사: (러닝화를 쳐다보며) "…나도."
투자자 성이사의 불안이 다중우주의 공기를 오염시켰다. 작가 성이사는 한 줄도 쓸 수 없었고, 슈퍼 성이사는 러닝화를 신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성이사의 다중우주 전체가 마비 상태에 빠졌다. 네 명의 페르소나가 모두 투자자 성이사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오후장이 되자 더 빠졌다.
투자자 성이사: (거의 울먹이며) "내가… 내가 믿었던 게 다 틀렸나 봐."
슈퍼 성이사: "……."
작가 성이사: "……."
침묵. 다중우주가 침묵했다.
그때, 직장인 성이사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석대표한테서 슬랙이 왔다.
[석대표: 성이사, 파트너사 계약서 검토 언제 끝나?]
석대표의 슬랙 한 줄이 직장인 성이사의 뇌에 전기 충격을 가했다. 그렇다. 나의 메인 잡은 직장인이다. 직장인이 주식 걱정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을 못 한다면, 그건 프로의 모습이 아니다.
직장인 성이사: (벌떡 일어나며) "야."
투자자 성이사: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뭐."
직장인 성이사: "한 번만 들어. 제발."
투자자 성이사: "……."
직장인 성이사: "지금 이 하락이 정상이 아니라는 거, 나도 알아. 너도 알잖아. 이란 사태 때문에 패닉 셀이 나온 거지, 이 회사들의 펀더멘탈이 무너진 게 아니잖아."
투자자 성이사: "…그건 맞는데."
직장인 성이사: "그리고 네가 한 투자를 믿자. 지금 여기서 던질 거야? 바닥에서?"
투자자 성이사: "바닥인지 어떻게 알아."
직장인 성이사: "몰라. 하지만 본다고 한들 뭐가 달라져? 네가 화면을 노려본다고 주가가 올라가? 안 올라가. 금요일에도 안 올랐고, 화요일에도 안 올랐고, 오늘도 안 올라가.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투자자 성이사: "……."
직장인 성이사: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있어. 석대표한테 보고서 올리는 거. 그게 지금 이 다중우주에서 유일하게 통제 가능한 일이야."
투자자 성이사가 처음으로 화면에서 눈을 뗐다.
직장인 성이사: (슈퍼 성이사에게) "야, 넌 지금 당장 음악 틀고 공원 한 바퀴 돌아와."
슈퍼 성이사: "…지금?"
직장인 성이사: "지금. 작가 성이사도 같이 가. 봄바람 쐬고 와. 여기 있어봐야 투자자 성이사 패닉만 전염돼."
슈퍼 성이사가 러닝화를 신었다. 작가 성이사가 옆에 섰다. 둘은 사무실을 나와 회사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이어폰에서 음악이 흘렀다. 봄이었다. 주식시장은 지하 핵 벙커를 향해 추락 중이었지만, 공원에는 개나리가 피어 있었고, 벚꽃 봉오리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바람이 따뜻했다.
작가 성이사: (걸으며) "…날씨 좋다."
슈퍼 성이사: "응."
작가 성이사: "주식은 빠지는데 봄은 오네."
슈퍼 성이사: "봄은 차트를 안 보니까."
두 사람은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15분. 그 15분이 다중우주의 공기를 갈아줬다.
사무실로 돌아온 성이사의 다중우주는 리셋되어 있었다. 직장인 성이사가 다시 리딩을 잡았다. 투자자 성이사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화면을 끄고 뒤로 물러났다. 이 세계의 주인은 직장인 성이사다. 적어도 오후 6시까지는.
성이사는 흔들림 없이 석대표가 시킨 파트너사 계약서 검토를 마무리했다. 클로드 코워크가 정리한 분석 보고서에 본인의 코멘트를 추가하고, 슬랙으로 석대표에게 보냈다.
[성이사: 파트너사 계약서 검토 완료했습니다. 리스크 포인트 3건, 협상 제안 2건 첨부합니다.]
[석대표: 👍]
엄지 하나. 석대표의 만족의 표현이다. 성이사는 자리에서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퇴근 후. 바통이 슈퍼 성이사에게 넘어갔다.
슈퍼 성이사는 5km 저녁 달리기를 했다. 평소보다 짧았지만, 오늘은 달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신체가 움직이면 뇌가 리셋된다. 도파민이 분비되고, 코르티솔이 내려가고, 세상이 조금 덜 무섭게 보인다.
건강하게 돌아온 슈퍼 성이사가 샤워를 마치고 거실에 나오자, 아내가 소파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투자자 성이사: (조심스럽게) "자기."
아내: "응."
투자자 성이사: "…괜찮아? 당신도 주식…"
아내도 별도로 투자를 하고 있었다. 투자자 성이사는 아내의 포트폴리오를 정확히 모르지만, 적지 않은 금액이 들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이면 아내도 패닉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의외로 담담했다.
아내: (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뭐가?"
투자자 성이사: "오늘… 많이 빠졌잖아. 코스피 천 포인트 넘게."
아내: (고개를 들며) "당신 그 회사들 데이터 봤어?"
투자자 성이사: "뭐?"
아내: "현재 수주 잔고, 분기 실적, 앞으로의 기대 매출. 다 명확하잖아. 지금 떨어지는 게 정상이야?"
투자자 성이사: "…아니."
아내: "아닌 거 알면서 왜 쫄아. 오히려 오늘 샀어?"
투자자 성이사: "…화요일에 샀어."
아내: "오늘은?"
투자자 성이사: "…실탄이 없어."
아내: (한숨) "그것 봐. 타이밍 관리를 못 한 거잖아. 금요일에 다 넣고 화요일에 또 넣으면 수요일에 뭘로 사."
투자자 성이사는 할 말이 없었다.
나름 투자에 자신이 있었다. 포트폴리오 이론도 공부했고, 클선생과 밤새 시뮬레이션도 돌려봤고, 손실 회피 편향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세 마디가 그 모든 이론서를 압축하고 있었다.
데이터가 명확한데 왜 쫄아. 오늘 샀어? 실탄 관리.
똑부러진다. 투자자 성이사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패닉에 빠져 유튜브에서 정신승리를 하고 있을 때, 아내는 데이터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목요일.
아내의 말대로였다.
코스피 지수가 천 포인트 넘게 빠졌던 수요일을 뒤로하고, 주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반도체가 올랐다. 원전이 올랐다. 증권이 올랐다. 어제 지하 핵 벙커까지 내려갔던 차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투자자 성이사: (화면을 보며) "…이걸 왜 수요일에 못 샀지."
직장인 성이사: "실탄이 없으니까."
투자자 성이사: "그걸 왜 금요일에 다 써버렸지."
직장인 성이사: "욕심이니까."
투자자 성이사: "……."
투자자 성이사는 현재 포트폴리오를 다시 봤다. 금요일 매수분, 화요일 매수분. 아직 마이너스인 종목이 있고, 본전 근처인 종목도 있다. 팔아서 이득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투자자 성이사: (조용히) "…나 잠시 쉴게."
직장인 성이사: "뭐?"
투자자 성이사: "이 따뜻한 봄날에, 너희 셋이 일상을 열심히 살아. 나는… 좀 쉬어야겠어."
작가 성이사: "괜찮아?"
투자자 성이사: "괜찮아. 그냥 지쳤어. 마이너스가 나는 것보다, 아내한테 진 게 더 지쳐." (쓴웃음)
투자자 성이사는 성이사의 다중우주의 주인공 자리를 세 명의 페르소나에게 양보했다.
투자자 성이사: "직장인 성이사, 석대표한테 잘해. 슈퍼 성이사, 봄이니까 많이 뛰어. 작가 성이사, 이번 주 이야기 좀 기록해 줘. 나는 주말 내내 잔다."
작가 성이사: "…주말 내내?"
투자자 성이사: "응. 자는 동안에는 차트를 안 보니까."
투자자 성이사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증권 앱은 꺼져 있었다. 알림도 꺼놨다. 화면이 어두워지고, 다중우주에서 투자자 성이사의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나머지 세 명이 서로를 바라봤다.
직장인 성이사: "…쟤 진짜 자는 거야?"
슈퍼 성이사: "자게 놔둬. 잠이 최고의 리밸런싱이야."
작가 성이사: (수첩을 꺼내며) "이 장면, 쓸 수 있어."
봄바람이 불었다. 다중우주의 한 축이 잠들었지만, 나머지 셋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투자자 성이사가 잠든 사이,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
주가도, 봄도, 마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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