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8. 13:57ㆍ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봄은 이미 와 있었는데, 성이사의 다중우주가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투자자 성이사는 차트에 매달려 있었고, 직장인 성이사는 민팀장의 퇴사에 흔들리고 있었고, 슈퍼 성이사는 숙취와 싸우고 있었다.
작가 성이사만이 봄의 도착을 감지했다.
아스팔트의 색이 바뀌고 있었다. 겨우내 회색빛이던 도로가 점점 시커멓게 변한다. 따뜻한 온기가 얼어붙었던 땅을 녹이고, 땅속에 갇혀 있던 수분이 아스팔트 위로 올라온다. 이것은 봄의 서명이다. 하늘이 아니라 땅이 먼저 봄을 알린다.
작가 성이사는 다중우주의 페르소나들에게 당부했다.
작가 성이사: "슈퍼 성이사, 산책할 때 이어폰 빼. 봄바람 소리 들어."
슈퍼 성이사: "뭐?"
작가 성이사: "새소리 들리기 시작했어. 박새인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아."
슈퍼 성이사: "새소리를 들으면서 뛰라고?"
작가 성이사: "뛸 때 말고 걸을 때. 그리고 출퇴근 시간에, 다들 정치 유튜브, 경제 유튜브 좀 꺼. 음악을 들어. 봄에는 음악을 들어야 해."
투자자 성이사: (이불 속에서) "나 자고 있거든."
직장인 성이사: "출근 시간에 뉴스를 안 보면 석대표한테 뒤처져."
작가 성이사: "일주일만. 일주일만 음악 들어봐.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릴 거야."
그리고 작가 성이사 자신도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우연이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한 노래. 한로로의 '사랑하게 될 거야'.
처음에는 그냥 봄 노래인 줄 알았다. 멜로디가 따뜻했고,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기타 반주가 봄바람처럼 흘렀다. 투자자 성이사의 패닉과 직장인 성이사의 우울로 가라앉아 있던 다중우주에, 이 노래가 봄 햇살처럼 스며들었다.
좋다. 그냥 좋았다.
그런데 가사를 다시 읽어보니, 봄 노래가 아니었다.
작가 성이사: (가사를 음미하며) "…잠깐. 이거 표면적 의미랑 실제 의미가 다르네."
봄날의 감성 위에 덧씌워진, 더 깊은 이야기. 작가 성이사의 눈이 반짝였다. 이런 이중 구조의 가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뮤지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0+0'을 들었다. 이 노래는 더 명확했다. 숫자로 시작하는 제목인데, 결국 이야기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작가 성이사가 에세이에서 '자판기'를 메타포로 썼듯, 한로로는 '0+0'을 메타포로 쓰고 있었다.
작가 성이사: "클선생, 한로로라는 뮤지션 알아?"
클선생: "네, 알고 있습니다.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가입니다.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책도 출간했습니다."
작가 성이사: "…국문학과?"
클선생: "네. 음악과 글, 두 가지 매체로 자기 서사를 만들어가는 아티스트입니다."
작가 성이사의 가슴이 뛰었다. 대학교에서 컴퓨터사이언스를 졸업한 이공계 출신인 자신. 40이 넘어서 왠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성이사의 다중우주에 나타난 페르소나. 전공도, 배경도, 경력도 글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글을 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국문학을 전공하고, 뮤지션으로 도전하고, 작가로서도 도전하며, 자기 서사를 완성시켜가고 있다. 음악으로 표현하고, 글로 표현하고, 두 매체를 넘나들며 하나의 세계를 짓고 있다.
작가 성이사: (혼잣말) "자몽살구클럽…"
한로로의 세계에 '자몽살구클럽'이라는 키워드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작가 성이사는 미소를 지었다.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만의 세계를 짓는 것. 작가 성이사가 '성이사의 다중우주'를 짓고 있듯, 한로로는 자몽과 살구, 앞자리를 따면 '자살'이라는 키워드로 어쩌면 자살방지를 위한 세계를 짓고 있었다.
작가 성이사: (수첩에 메모하며) "외부의 결핍을 극복하는 성장기가 아니라, 자기 생각을 서사로 만드는 사람. 자기 주도의 창작."
과거에는 가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감동이었다. 외부의 결핍이 내면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서사. 하지만 요즘 작가 성이사가 끌리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외부의 결핍이 아니라, 내면의 표현. 평범한 사람이 자기 생각을 자기 언어로 세상에 내놓는 행위. 인위적인 성공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과 성공.
시대가 변했다. 점점 더 개인화되고 있다. SNS가 개인 미디어가 되고, AI가 개인 도구가 되고,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시대. 한로로는 그 시대의 문법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 성이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50대가 되어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설레이는 일이다.
토요일 저녁.
10km를 전력 질주한 슈퍼 성이사는 지쳐 있었고, 투자자 성이사와 직장인 성이사는 맥주 몇 잔을 음미한 뒤 다시 휴식 모드로 들어갔다. 다중우주가 조용해졌다.
작가 성이사의 시간이 왔다.
맥주 한 캔을 옆에 놓고, 이어폰을 꽂았다. 한로로의 음악이 흘렀다. 넷플릭스에서 '월간 남친'을 틀었다.
작가 성이사: (보다가 맥주를 뿜을 뻔하며) "푸흐—"
슈퍼 성이사: (옆에서 깜짝 놀라며) "야! 뭐야!"
작가 성이사: (웃음을 참으며) "이거 뭐야… 대사가 미쳤어…"
월간 남친은 웃겼다. AI 매칭 시스템이 등장하긴 했지만, 그런 시대적 메시지 따위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봄밤에 맥주 마시며 볼 수 있는, 가볍고 따뜻한 시리즈. 머리를 비우기에 완벽했다.
이번 주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코스피가 천 포인트 넘게 빠졌다가 반등했고, 7년을 함께한 민팀장이 떠나기로 했고, AI는 여전히 무서운 속도로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투자자 성이사는 탈진했고, 직장인 성이사는 흔들렸고, 슈퍼 성이사는 그 사이에서 10km를 뛰었다.
작가 성이사는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싶었다.
작가 성이사: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수첩을 펴며) "이번 주의 기록."
한로로의 음악이 이어폰에서 흘렀다. '사랑하게 될 거야'의 기타 인트로가 봄밤의 공기와 섞였다.
작가 성이사는 적었다.주식이 빠지는 속도보다 봄이 오는 속도가 빠르다. 사람이 떠나는 속도보다 꽃이 피는 속도가 빠르다. AI가 발전하는 속도보다 아스팔트가 따뜻해지는 속도가 빠르다.
그리고 이 모든 속도를 기록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넷플릭스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한로로의 노래가 끝났다. 맥주 캔이 비었다.
작가 성이사는 수첩을 덮고 창밖을 바라봤다. 밤이었지만, 내일은 봄이 조금 더 번져 있을 것이다. 아스팔트는 조금 더 시커멓게, 나무는 조금 더 연초록으로, 공기는 조금 더 따뜻하게.
봄은 자판기다.
겨울이라는 동전을 넣으면, 반드시 봄이 나온다.
다만, 언제 나올지는 봄이 정한다.
우리는 기다리면 된다. 기다리면서, 쓰면 된다.
슈퍼 성이사가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10km의 전력질주의 피로가 그를 집어삼킨 것이다. 투자자 성이사와 직장인 성이사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다중우주의 세 기둥이 모두 쓰러진 밤에, 작가 성이사만이 깨어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4시가 된다. 작가 성이사의 시간이 시작된다.
하지만 오늘은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다중우주의 잠든 페르소나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투자자 성이사. 이번 주 고생했어. 아내한테 배워. 데이터를 봐.
직장인 성이사. 민팀장을 보내는 건 네 잘못이 아니야. 시대의 잘못도 아니야. 그냥 시간이야.
슈퍼 성이사. 숙취에도 뛰는 너를 존경해. 그리고 미안해. 다섯 번째 캔은 내 잘못이야.
작가 성이사는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한로로의 멜로디가 아직 귓속에 남아 있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녹고 있었다. 주가도, 관계도, 근육도, 마음도.
녹는 것은 아프다. 하지만 녹아야 흐른다.
흘러야 어딘가에 도착한다.
성이사의 다중우주는 계속된다.
봄이 번지는 속도로,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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