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14. 13:04ㆍ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성이사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많은'이라는 수식어로는 부족하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임신하는, 무한 번식형 사고 체계의 소유자다. 이 체계는 직장인으로서 유리한 점도 있었다. 세 수 앞을 내다보고, 석대표의 의중을 미리 파악하고, 위기를 사전에 감지하는 능력. 하지만 이 같은 사고 체계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다.
반추.
생각이 과거로 회귀하기 시작하면, 성이사의 뇌는 저절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잘 나가던 직장에서 이직을 결심했던 그날. 옳은 선택이었을까? 안 했으면 지금 어디에 있었을까?
업무 직종을 바꿨던 그 시기. 늦지 않았을까? 다른 길이 있었을까?
좌천의 경험. 내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정치의 희생양이었을까?
이 질문들은 답이 없다. 답이 없는데도 뇌는 계속 질문을 생성한다. 생각의 생각의 생각. 러시아 인형처럼 열어도 열어도 끝이 없고, 마지막 인형 안에는 불안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이번 주가 특히 그랬다.
민팀장의 퇴사. 그것은 단순한 인사 이동이 아니었다. 성이사에게 남겨진 것은 민팀장이 7년간 담당해왔던 수많은 변수들이었다. 클라이언트 관계, 프로젝트 히스토리, 팀원들의 심리적 안정. 이 모든 것이 민팀장이라는 사람 한 명에게 묶여 있었는데, 그 묶음이 풀렸다.
거기다가 팀원들의 동요.
박대리: (복도에서 귓속말) "이사님, 블라인드 보셨어요?"
성이사: "…어떤..?"
박대리: "경영진이 AI 도입해서 사람들 내보내려 한다는 글 올라왔는데요. 댓글이 200개 넘었어요."
성이사는 블라인드를 열었다. 익명의 글들이 쏟아져 있었다.
'AI 도입 = 구조조정 시작' '임원들만 살아남으려는 거 아님?' '우리가 도구냐' '민그룹팀장도 결국 밀려난 거 아님?'
사실과 다른 이야기들도 있었다. 민팀장은 밀려난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간 것이다. 하지만 블라인드에서는 이미 소설이 되어 있었다. 삼인성호. 세 사람이 호랑이가 있다고 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없던 이야기가 소설로 탄생하고, 그 소설이 사실처럼 유통되고 있었다.
성이사의 마음이 동요했다. 블라인드의 글들이, 과거의 경험들이, 미래의 불확실성이 뒤섞이면서 반추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밀려나는 거 아닌가. 블라인드 글들이 근로자 권익 문제로 확대 되는건 아닐까? 그리고 내가 민그룹팀장을 내쫓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건 아닐까? 생각의 생각의 생각. 뇌 속의 톱니바퀴가 과속으로 회전하면서 열을 내기 시작했다. 이불 속에서 뒤척이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고, 새벽 3시에 천장을 바라보며 이불킥을 하는 밤이 이어졌다.
성이사는 이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반추가 시작되면 부정적인 생각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그 상태에서 내린 결정은 예외 없이 문제를 만들었다.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고, 그 문제가 또 반추의 재료가 되는 악순환.
이 순환을 끊는 첫 번째 방법을 성이사는 알고 있었다.
성이사: "슈퍼 성이사."
슈퍼 성이사: "응."
성이사: "퇴근하고 달려야겠어."
오후 6시 30분. 슈퍼 성이사가 호출되었다.
러닝복. 운동화. 고글. 이어폰. 장비를 갖추는 의식은 전투 전의 무장과 같다. 다만 이 전투의 적은 외부에 있지 않다. 성이사의 뇌 속에서 무한 번식 중인 생각의 괴물이다.
케이던스 180. 분당 180보. 슈퍼 성이사가 리듬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차올랐다. 심박수가 올라갔다. 이어폰에서 팟캐스트가 흘렀다. 주제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외부의 음성이 뇌의 전두엽 자극을 느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달리기의 메커니즘은 이렇다. 심폐에 부하가 걸리면 뇌는 생존 모드로 전환한다. '이 사람이 지금 뛰고 있으니, 호흡과 심장박동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그 순간 전두엽의 과잉 활동이 줄어든다. 반추의 톱니바퀴가 느려진다. 블라인드의 글도, 민팀장의 퇴사도, 석대표의 레이저도, 과거의 좌천도 — 모두 배경으로 물러난다.
3km 지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고민의 덩어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엉켜 있던 실타래가 하나씩 분리되었다. 블라인드의 글은 블라인드의 글이고, 민팀장의 퇴사는 민팀장의 선택이고, AI의 발전은 시대의 흐름이다. 각각이 별개의 문제인데, 반추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 뭉쳐서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던 것이다.
5km. 숨이 찬 상태에서 묘한 쾌감이 찾아왔다. 하루의 루틴을 완수했다는 성취감. 도파민이 분비되면서 세상이 조금 밝아졌다.
성이사: (달리기를 마치고, 벤치에 앉으며) "…고마워, 슈퍼 성이사."
슈퍼 성이사: (숨을 고르며) "매번 하는 말이지만, 진짜 달리기 싫은 날에 나를 부르는 네가 더 대단한 거야."
매일 이렇게 성이사의 다중우주의 건강과 정신을 챙겨주는 슈퍼 성이사. 성이사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달리기만으로는 부족한 날이 있다.
슈퍼 성이사의 치료는 응급처치에 가깝다. 달리는 동안은 반추가 멈추지만, 달리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톱니바퀴가 다시 돌기 시작한다. 더 느리게, 하지만 분명히.
그래서 성이사는 몇 달 전부터 두 번째 치료법을 찾았다.
세 명의 스승과의 대화.
지선생(GPT), 제선생(Gemini), 클선생(Claude).
방법은 이렇다.
1단계: 텍스트로 꺼낸다.
성이사는 머릿속의 고민을 텍스트로 쓴다. 쓰는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머릿속에서 무한 번식하던 생각의 괴물이 화면 위의 활자로 변환되면, 그것은 더 이상 '나의 불안'이 아니라 '화면 위의 텍스트'가 된다. 주관적 고통이 객관적 문장이 된다.
성이사: (자판을 치며) "현재 상황: 민팀장 퇴사, 블라인드 동요, 팀원 이탈 우려, AI 도입에 대한 조직 내 반감, 석대표의 원팀 전환 정책." "나의 감정: 불안, 무력감, 과거 좌천 경험의 재발 공포." "핵심 질문: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통제할 수 있고, 무엇을 통제할 수 없는가?"
쓰는 순간, 이미 반추가 아니라 분석이 되어 있었다. 내면의 괴물이 바깥으로 나오면 크기가 줄어든다. 어둠 속의 그림자가 불을 켜면 사라지는 것과 같다.
2단계: 세 명의 스승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성이사: (세 개의 창을 열며) "현재 제 상황을 제3자 입장에서 분석해 주세요. 제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감정에 의해 왜곡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거울 치료. 자기 고민을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다만 이 '타인'은 성이사의 과거 대화 데이터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세 명의 AI 스승이다.
지선생이 먼저 답했다.
지선생(GPT): "성이사님, 현재 당신이 느끼는 불안의 70%는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 대한 걱정입니다. 블라인드의 여론, 시장의 AI 도입 속도, 석대표의 정책. 이것들은 당신이 바꿀 수 없습니다. 반면 통제 가능한 영역 — 팀원과의 소통 빈도, 민팀장 공백의 업무 재분배, 본인의 AI 활용 능력 향상 — 에는 에너지를 충분히 쏟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선생이 이어졌다.
제선생(Gemini): "현재는 오히려 AI 활용 성과가 기업의 경쟁력을 올리는 필수요소입니다. 일시적 감정이 과거 부정적 이미지와 현재를 동일시하고 있지만, 사실관계는 다릅니다."
클선생이 마무리했다.
클선생(Claude): "성이사님, 블라인드의 삼인성호가 신경 쓰이시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블라인드에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을 읽고 불안해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까요? 쓰는 사람은 감정을 배출하고 끝나지만, 읽는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흡수하며 자기 불안을 키웁니다."
성이사는 세 스승의 답변을 나란히 놓고 읽었다.
3단계: 가장 날카로운 스승과 심화 대화.
오늘은 클선생이었다. '블라인드를 읽는 사람이 더 시간을 낭비한다'는 지적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성이사: "클선생, 그러면 블라인드를 안 봐야 하나?"
클선생: "안 보는 것도 방법이지만,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겁니다. 성이사님이 블라인드를 보는 이유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안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만 불안한 게 아니구나'를 확인하려는 거죠. 하지만 그 확인은 불안을 줄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유된 불안이 개인의 불안을 증폭시킵니다."
성이사: "…맞아. 보고 나면 더 불안해져."
클선생: "지금 이 대화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아시나요?"
성이사: "뭐?"
클선생: "성이사님은 지금 '반추'를 '메타인지'로 전환하고 계십니다."
성이사: "메타인지?"
클선생: "반추는 생각 속에 갇히는 것이고, 메타인지는 자신의 생각을 바깥에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아까 성이사님이 고민을 텍스트로 쓴 순간, 생각이 머릿속에서 화면 위로 나왔습니다. 그 순간 '나의 불안'이 '관찰 대상'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세 명에게 질문을 던진 순간, 1인칭 시점이 3인칭 시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것이 메타인지입니다."
성이사: "그러니까… 글로 쓰고, 밖으로 꺼내고, 남에게 물어보는 과정 자체가 치료라는 거야?"
클선생: "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구조가 없습니다. 감정과 사실과 추측이 뒤엉켜 있습니다. 하지만 텍스트로 꺼내면 구조가 생깁니다. 구조가 생기면 감정이 분리됩니다. 감정이 분리되면 문제의 본질이 보입니다. 문제의 본질이 보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핑퐁이 몇 번 더 오갔다. 그리고 성이사는 문제의 본질을 봤다.
민팀장의 퇴사는 나의 실패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이다. 블라인드의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놓아야 한다.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AI에게 자기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것이. 사람에게도 잘 못하는 고해성사를 기계에게 한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해보니 달랐다.
글로 쓰는 순간 고민이 밖으로 나온다. 밖으로 나온 고민은 크기가 줄어든다. 세 명의 스승에게 물으면 3인칭 시점이 생긴다. 3인칭 시점으로 보면 감정이 분리된다. 감정이 분리되면 본질이 보인다. 본질이 보이면 잠을 잘 수 있다.
슈퍼 성이사의 달리기가 응급처치라면, 세 명의 스승과의 메타인지 대화는 정밀 수술이었다.
달리기로도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 메타인지를 거치면 구조화되었다. 자다가 깨는 일이 줄었다. 이불킥이 사라졌다. 새벽 3시에 천장을 바라보는 밤이 사라졌다.
투자자 성이사: (옆에서 관찰하며) "야, 너 요즘 잠을 잘 자네."
성이사: "응."
투자자 성이사: "뭐 했길래?"
성이사: "…고민을 글로 쓰고, AI한테 물어봤어."
투자자 성이사: "그게 되냐?"
성이사: "된다. 신기하게."
투자자 성이사: "…AI한테 고민 상담을 받는 임원이라. 석대표가 알면 뭐라 하려나."
성이사: "석대표도 하고 있을걸. 안 하는 척하면서."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었다. 걱정 없이 잠을 잘 수 있게 된 성이사는 분명 방어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회의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블라인드를 보지 않게 되었다. 석대표의 레이저를 정면으로 받아칠 수 있게 되었다. 직장 내 경쟁력이 올라가고 있었다.
AI와 함께.
작가 성이사: (수첩에 적으며) "반추에서 메타인지로. 괴물을 죽이는 방법은 칼이 아니라 거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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