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14. 16:27ㆍ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성이사의 다중우주에 이번 주는 큰 사건이 없었다.
이것은 축복이었다. 지난 2주간의 폭풍 — 주식 폭락, 민팀장 퇴사, 숙취 러닝, 증권시장의 롤러코스트 — 를 지나고 나니, 아무 일 없는 한 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다중우주 전체가 절감하고 있었다.
투자자 성이사는 관망 모드에 들어가서 조용했다. 직장인 성이사는 민팀장의 퇴사 후속 처리를 진행 중이었지만, 블라인드의 소음은 잦아들었고, 석대표의 레이저도 이번 주는 출력이 약했다. 슈퍼 성이사는 왼쪽 무릎을 케어하면서 거리를 줄여 달리고 있었는데, 특이한 점이 하나 생겼다.
슈퍼 성이사: (마사지건을 들고, 진지하게) "왼발아, 수고했다."
투자자 성이사: "…또 발한테 말하고 있어."
슈퍼 성이사: "오늘부터 왼쪽 다리부터 마사지야. 평생."
투자자 성이사: "이 인간이 진짜…"
별일 없는 한 주였다. 다만, 작가 성이사를 제외하면.
작가 성이사는 외로웠다.
처음에는 그 감정의 정체를 몰랐다. 그냥 기분이 묘했다. 답답한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닌데, 무언가가 비어 있는 느낌. 마치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려 했는데 뭘 꺼내려 했는지 잊어버린 것 같은, 그런 공허함.
원인을 찾는 데 이틀이 걸렸다.
이번 주, 성이사의 다중우주 구성원 모두가 AI 스승들과 깨달음을 얻었다.
직장인 성이사는 클선생, 제선생, 지선생과 메타인지 대화를 통해 반추의 악순환을 끊었다. 블라인드를 보지 않게 되었고, 잠을 잘 자게 되었고, 직장 내 경쟁력이 올라갔다.
투자자 성이사는 세 스승과 합의해서 관망 전략을 세웠다. 야수의 심장이 이성의 심장으로 바뀌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용기를 배웠다.
슈퍼 성이사는 제선생과의 운동 데이터 분석을 통해 왼발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7년 만에 부상의 원인을 이해하게 되었다.
모두가 AI와 대화하고, AI와 깨닫고, AI와 함께 더 나아지고 있다.
그런데 작가 성이사만 빠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작가 성이사도 클선생과 함께 글을 쓰고 있었다. 에피소드의 초고를 함께 잡고, 편집을 하고, 구조를 논의했다. 하지만 그것은 도구적 협업이었다. 직장인 성이사가 경험한 것처럼 내면의 고민을 AI에게 털어놓고 메타인지를 경험한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작가 성이사의 영역 — 감성, 창작, 영감 — 은 AI와 '논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적어도 작가 성이사는 그렇게 느꼈다.
작가 성이사: (속으로) "다들 AI로 더 스마트해지고, 더 건강해지고, 더 안정되고 있어. 성이사의 다중우주가 점점 최적화되고 있어. 근데…"
감성은?
감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거 아닌가.
이성이 강해질수록 감성의 자리가 줄어든다. 데이터가 정밀해질수록 직관의 여지가 사라진다. 메타인지가 발달할수록 순수한 감정의 분출이 줄어든다. 성이사의 다중우주가 AI를 통해 합리적으로 최적화될수록, 작가 성이사가 숨 쉴 공간은 좁아지고 있었다.
이 다중우주에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이성뿐이라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주말 새벽. 작가 성이사는 4시에 일어나 또각또각 자판을 쳤다.
한 주를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글이 써지지 않았다. 주식 이야기도, AI 이야기도, 러닝 이야기도 이번 주는 소재가 약했다. 별일 없는 한 주의 저주.
봄을 느끼기 위해 음악을 틀었다. 한로로의 '사랑하게 될 거야'가 이어폰에서 흘렀다. 지난주에 빠져들었던 그 멜로디. 봄의 온기가 귀를 통해 스며들었다.
그리고 커피를 내렸다. 브런치용 빵을 하나 꺼냈다. 주말 아침의 여유. 이것은 작가 성이사만의 시간이다.
여유를 즐기며 유튜브를 켰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이 화면을 채웠다.
'클로드 코드 완벽 활용법 2026' '코스닥 액티브 ETF 수익률 비교' '아식스 슈퍼블라스트3 개봉기' 'n8n × 클로드 자동화 파이프라인 구축'
작가 성이사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작가 성이사: "…유튜브에 봄이 없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성이사의 다중우주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었다. 직장인 성이사의 AI 도구, 투자자 성이사의 ETF, 슈퍼 성이사의 러닝화. 성이사의 다중우주가 추구하는 콘텐츠를 큐레이션해서 돌려주는 거울. 그 거울에 작가 성이사의 얼굴은 없었다.
작가 성이사: "이건 내 유튜브가 아니라 다른 세 명의 유튜브야."
유튜브를 껐다. 유튜브 뮤직으로 전환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베란다로 나갔다.
바깥 풍경.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인데도 쌀쌀하지 않았다. 공기에 수분이 돌아와 있었다. 겨울의 건조한 칼바람이 사라지고, 부드러운 바람이 베란다를 스쳤다.
봄은 유튜브에 없다. 봄은 베란다에 있다.
작가 성이사는 다시 안으로 들어와 넷플릭스를 켰다. 원피스 시즌 2가 떠 있었다. 재생을 눌렀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지난주 '월간 남친'을 볼 때의 몰입감이 없었다. 10분 만에 시청을 중단했다.
쓰다 만 블로그를 다시 열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글이 써지지 않았다.
작가 성이사는 멍때리고 있는 세 페르소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직장인 성이사는 소파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아마 석대표에게 보낼 슬랙 메시지를 구상 중일 것이다. 투자자 성이사는 창밖을 보며 아무 생각 없는 표정이었다. 관망의 평화. 슈퍼 성이사는 왼쪽 다리에 마사지건을 대고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모두 평화로웠다. AI 스승들과의 대화 덕분에 각자의 문제를 구조화하고 해결하고 안정을 찾은 상태.
그리고 나만 글이 안 써지고 있다.
습관이 무서웠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이 막막함 앞에서, 작가 성이사도 어느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도 AI 스승들과 같이 작업을 해야 하나.
클선생에게 "이번 주 에피소드 소재 추천해 줘"라고 물으면, 아마 열 개 정도의 아이디어를 1분 안에 쏟아낼 것이다. 제선생에게 "블로그 글의 구조를 잡아줘"라고 하면, 서론·본론·결론에 후크와 전환점까지 설계해줄 것이다. 지선생에게 "이 초고를 다듬어줘"라고 하면, 문장 하나하나를 연마해줄 것이다.
그러면 글이 나올 것이다. 분명히.
하지만—
그게 내 글이야?
작가 성이사는 멍때리는 세 명에게 물었다.
작가 성이사: "야."
직장인 성이사: (고개를 돌리며) "뭐?"
작가 성이사: "나도 세 스승과 같이 작업을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침묵이 흘렀다. 1초. 2초. 3초.
그리고 셋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직장인 성이사: "하지 마."
투자자 성이사: "하지 마."
슈퍼 성이사: "하지 마."
작가 성이사가 눈을 크게 떴다.
작가 성이사: "…뭐?"
직장인 성이사: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작가 성이사, 너라도 그냥 인간답게 살아달라."
투자자 성이사: "나는 이미 AI 없으면 매수 버튼도 못 눌러. 스승들 합의 없으면 관망이야. 그게 좋은 건 맞는데… 가끔 야수의 심장이 그리워. 그때가 더 '나'였어."
슈퍼 성이사: "나는 제선생 덕분에 왼발의 비밀을 알게 됐어. 고마워. 근데 이제 달리고 행동하는 내가 아니라 분석하는 내가 되고 있는것 같아."
셋의 말이 하나로 수렴했다.
직장인 성이사: "이 다중우주에서 AI를 안 쓰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해. 그래야 우리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증거가 남으니까."
투자자 성이사: "너의 글은 AI가 못 써. 수익률은 AI가 분석해주지만, 새벽 4시에 맥북한테 이불 씌우는 그 감정은 AI한테 설명이 안 돼."
슈퍼 성이사: "숙취에 달리는 5km의 고통을 AI가 알아? 몰라. 근데 너는 그걸 글로 쓸 수 있잖아. 그게 네 역할이야."
작가 성이사는 멍하니 셋을 바라봤다.
작가 성이사: "…너희가 나한테 이렇게 말해줄 줄 몰랐어."
직장인 성이사: "우리 셋이 AI로 최적화될수록, 네가 필요해져. 기록하는 사람. 느끼는 사람."
작가 성이사: "……."
직장인 성이사: "그러니까 제발, 클선생한테 소재 추천받지 마. 네가 멍때리다가 떠오르는 한 줄이, AI가 1초 만에 쏟아내는 열 개보다 낫다."
작가 성이사는 베란다로 다시 나갔다.
이어폰을 꼈다. 한로로의 음악이 다시 흘렀다. 봄바람이 불었다. 유튜브에는 없던 봄이, 여기에 있었다.
수첩을 꺼냈다.
쓸 수 없으면 쓸 수 없는 대로. 영감이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AI에게 물어보지 않고, 혼자 멍때리다가 떠오르는 한 줄을 기다리기로 했다.
5분이 지났다. 10분이 지났다.
그리고 한 줄이 떠올랐다.
성이사의 다중우주에는 AI 스승이 세 명 있다. 그리고 인간이 한 명 있다. 그 인간은 새벽 4시에 낡은 맥북에 이불을 씌우고, 숙취에 마신 맥주의 캔 수를 세며, 꽃이 피지 않은 베란다에서 봄을 느끼고, 유튜브에 봄이 없다는 사실에 외로워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쓴다. AI는 쓸 수 없는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글을.
작가 성이사는 수첩을 덮었다. 충분했다. 오늘의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고, 커피가 나왔다.
거실로 돌아오니 슈퍼 성이사가 마사지건을 들고 있었다.
슈퍼 성이사: "글 써졌어?"
작가 성이사: "한 줄."
슈퍼 성이사: "한 줄이면 됐지 뭐."
작가 성이사: "응. 한 줄이면 됐어."
다중우주가 조용했다. 봄이 오고 있었다.
AI 스승 세 명이 지키는 합리적인 세계 한가운데에, 인간 한 명이 수첩을 들고 서 있었다.
인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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