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평가와 면담자료는 AI로 만들 수 있지만 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2026. 3. 21. 16:34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성이사에게는 하나의 재능이 있었다. 사람의 의도를 읽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상대방의 의도와 상태가 마치 수족관 유리 너머의 물고기처럼 투명하게 보였다. 이 물고기는 지금 배가 고프다, 저 물고기는 영역 다툼을 하고 있다, 이 물고기는 수면 위로 뛰어오르고 싶어 한다. 성이사의 업무 대부분이 협상과 협업, 그리고 필요시 설득이었기 때문에, 이 재능은 그를 지금의 자리까지 끌어올린 핵심 엔진이었다.

 

외부에는 수많은 파트너 회사들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고, 내부에는 석대표라는 거대한 암초와, 동료이자 경쟁 상대인 임원들이라는 조류, 그리고 함께 일하는 부하직원들이라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있었다. 성이사는 이 바다를 15년간 항해해왔다. 파도를 읽고, 바람을 맞추고, 때로는 조류에 몸을 맡기며.그런 그에게도 취약한 해역이 있었다.

부하직원들과의 대화. 그중에서도 특히 여직원들과의 대화였다.

 

50대. 꼰대. 이 두 단어가 성이사의 이마에 보이지 않는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는 것을 성이사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여직원들과 티타임을 가질 때, 자신도 모르게 훈계 모드가 작동하는 것을 느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이라는 문장이 혀끝까지 올라왔다가, 삼키는 데 드는 에너지가 회의 자료 만드는 것보다 컸다. 자칫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혹시라도 잘 못 비유를 들었을때 성인지 감수성의 문제도 생길 수 있다. 그것은 석대표의 레이저보다 더 성이사를 긴장시켰다.

 

그래서 성이사는 방벽을 쌓았다.

슬랙으로 이야기하고, 답변은 이모티콘으로 한다. 👍, 👀, ✅. 이 세 개의 그림문자가 성이사와 여직원들 사이의 공용어였다. 직장인으로서 서로의 임무만 챙기자. 선을 긋자. 감정의 바다에 발을 담그지 말자.

 

세상에는 그 선을 넘어야만 하는 날이 있다. 가위바위보처럼 피할 수 없고, 세금처럼 미룰 수 없는 것. 인사평가 면담.

더욱이 민팀장의 퇴사로, 민팀장의 팀원들까지 성이사가 직접 면담을 해야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한 해를 평가하고, 면전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칭찬도, 지적도, 경고도.

 

남자 직원들의 경우는 수월했다. 성이사가 틈틈이 기록해둔 업무 성과와 인사 자료를 펼쳐놓고 팩트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남자 직원의 감정까지 배려할 이유가 없었다. 면담은 무미건조하게 끝났다. 커피 한 잔이 식기 전에.

 

하지만 여직원의 경우는 달랐다. 성이사의 뇌 속에서 경보등이 미리 켜졌다. 이성에 대한 언어의 태도. 업무 감수성. 자칫 감정적 스크래치를 내면, 그것은 슬랙의 이모티콘으로 봉합할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성이사는 매번 이 면담 앞에서 긴장했다. 마치 중요한 거래처의 계약 미팅보다 더.

 

금요일 면담 대상: 김대리.

민팀장 팀의 대리급 직원. 성이사는 김대리와 직접 일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민팀장이 중간에서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팀장이 떠난 지금, 성이사가 직접 평가를 해야 한다.

성이사는 인사평가 자료를 모아두고 제선생에게 면담 자료 정리를 요청했다.

 

성이사: "제선생, 김대리 인사평가 면담록을 만들어줘. 성과, 주의점, 고쳐야 할 것까지 다 넣어."

제선생은 훌륭하게 정리해줬다. 정량적 평가, 정성적 평가, 개인 역량, 개선 필요 사항, 근태 및 지각. 체계적이고 깔끔하고 냉정한 보고서.

그리고 제선생이 빨간 얼럿을 하나 띄웠다.

 

제선생(Gemini): "김대리의 평가 기간 중 지각이 10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차 외 병가도 있으며, 재택 전환 요청도 복수 건 확인됩니다. 이 부분은 면담 시 반드시 언급하시고, 인사팀에도 기록을 공유하시기를 권합니다."

지각 10번. 성이사의 눈썹이 올라갔다.

 

문득 민팀장의 업무 인수인계서가 떠올랐다. 인수인계서에는 팀원별 특이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김대리 항목에 이런 메모가 있었다.

"김대리 몸에서 열이 나서 독감 증세가 아닐까 걱정하며 재택근무 요청함. 병원에서 진단서 발급받아서 인사팀에 제출하라고 함."

비슷한 내용의 기록이 몇 건 더 있었다. 그리고 근태 기록을 확인해보니, 병가 다음 날은 정상 출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루만 아팠다가 다음 날 나은 것이다. 성이사에게 의심이 생겼다.

 

성이사: "제선생, 김대리의 병가와 재택 요청 패턴을 어떻게 봐?"

 

제선생: "냉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각 10회는 동일 직급 평균의 세 배입니다. 그리고 공유해 주신 민팀장의 기록을 참조하면 출근이 어려운 상황에서 병가나 연차 대신 재택부터 요청하는 패턴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재택근무는 업무 수행이 전제인데, 몸이 아파서 출근을 못 하는 사람이 재택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성이사: "…그렇지."

 

제선생: "성이사님, 김대리의 업무 성과 기록까지 종합적으로 다시 검토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면담 시 이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다른 직원들에게 형평성 문제가 생깁니다."

제선생의 말은 정확했다. 하지만 정확한 만큼 날카로웠고, 날카로운 만큼 성이사를 두렵게 했다.

그녀를 만나서 이걸 말해야 한다고?

 

성이사가 김대리 면담을 미루기 시작했다.

월요일. '오늘은 다른 직원 면담이 있으니까.' 화요일. '자료를 좀 더 정리해야겠어.' 수요일. '석대표 미팅이 있으니까 내일 하자.' 목요일. '…내일이 금요일이니까 주 마감 전에 하면 되지.'

그런데 미루는 사이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성이사가 김대리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 '오늘은 지각 안 했나?' 회의실에서 김대리가 발표할 때. '일은 제대로 하는 건가?' 슬랙에서 김대리의 메시지를 볼 때. '이 보고서, 제대로 쓴 건 맞을까?'

의심은 증거 없이도 자라는 식물이다. 물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펼치고, 성이사의 시야를 가렸다.

이대로 가면 면담이 아니라 심문이 될 것 같았다.

 

금요일 아침. 면담 1시간 전.

성이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자기 상태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의심이 커질 대로 커진 상태에서 면담을 하면, 냉정한 평가가 아니라 감정적 추궁이 될 수 있다. 제선생의 날카로운 분석이 성이사의 뇌 속에서 확증 편향의 재료로 변질되고 있었다.

성이사는 지선생과 클선생에게 물었다.

 

성이사: "제선생이 이렇게 평가했어. 그리고 지금 나의 감정이 점점 그녀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 같아. 자칫 내 의심이 분노나 태도로 나올까 봐 두려워."

솔직한 고백이었다. 임원이 부하직원에 대한 감정적 편향을 AI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어쩌면 이 시대에서만 가능한 종류의 고해성사였다.

지선생이 먼저 답했다.

 

지선생(GPT): "성이사님, 지금 느끼시는 것은 확증 편향의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제선생의 객관적 데이터가 맞을 수 있지만, 그 데이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성이사님의 감정이 개입되면서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면담에서는 팩트만 이야기하세요. 지각 10회, 근태 기록. 이것은 숫자입니다. 숫자에 감정을 얹지 마세요."

클선생이 이어졌다.

 

클선생(Claude): "동의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인사 평가의 목적은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남기는 것입니다. 근태 문제에 대한 코멘트를 인사팀에 전달하시면, 연봉 협상과 이후의 조치는 인사팀의 영역입니다. 성이사님이 그녀의 삶의 사정까지 판단하실 필요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성이사: "그러니까… 팩트만 말하고, 판단은 인사팀에 넘기라는 거지?"

 

클선생: "네. 그리고 면담 시 감정을 개입시키지 마세요. 지금 성이사님의 의심은, 확증 편향이 만든 서사입니다. 데이터는 데이터이고, 서사는 성이사님의 상상력이 만든 겁니다."

 

확증 편향이 만든 서사. 그 표현이 성이사의 머리를 때렸다. 맞았다. 지각 10번이라는 숫자에, 병가 패턴이라는 단서에, 민팀장의 메모라는 증거를 더해서, 성이사의 뇌가 하나의 소설을 써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문제가 있다'라는 소설을.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숫자만 말하면 된다.

 

금요일 오전 10시. 면담.

김대리가 성이사의 방으로 들어왔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문이 있다고 성이사는 생각했다. 자기 의지로 여는 문과, 불려서 여는 문. 김대리는 후자의 문을 열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긴장과 함께 무언가를 준비한 사람의 여유가 섞여 있었다.

 

김대리: (밝은 표정으로) "이사님, 안녕하세요! 오늘 넥타이 잘 어울리시네요."

성이사는 순간 당황했다. 넥타이를 칭찬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석대표는 넥타이 색을 보고 "장례식 가냐"라고 했던 사람이다. 칭찬이라는 무기에 성이사의 가드가 살짝 내려갔다.

하지만 지선생과 클선생의 목소리가 뇌 속에서 또 올랐다. 감정을 개입시키지 마세요.

 

성이사: (앉으며) "감사합니다. 앉으세요."

성이사는 준비한 면담 자료를 펼쳤다. 지선생과 클선생의 조언대로, 팩트만 말하기로 했다.

 

성이사: "김대리, 민팀장 부재로 제가 인사평가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대리: "네."

성이사: "아시다시피 저는 김대리의 업무 성과를 직접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팀장이 남겨놓은 기록으로 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대리: "네, 이해합니다."

 

성이사: "기록에 따르면, 업무 성과와 개인 역량은 작년 인사평가 기록과 유사한 수준입니다."

김대리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무난했다.

 

성이사: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단어가 공기를 바꿨다. 김대리의 미소가 0.5도 줄어드는 것을 성이사의 눈치 센서가 감지했다.

 

성이사: "지각과 근태는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대리: "……."

 

성이사: "평가 기간 중 지각이 10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가와 재택 전환 요청도 복수 건 있고요. 현재의 근태는 다른 직원들에게도 영향이 있습니다."

성이사는 숫자만 말했다. 감정을 얹지 않았다. 의심을 표현하지 않았다. 병가의 진위를 따지지 않았다. 숫자. 기록. 팩트.

 

성이사: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같이 일하기 어려워집니다. 이건 마지막 경고입니다."

김대리의 얼굴색이 변했다. 밝은 표정이 사라지고,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김대리: "이사님, 저의 근태는 다 사정이 있었어요…"

성이사는 여기서 멈춰야 했다. 사정을 들으면 감정이 개입된다. 감정이 개입되면 확증 편향이 작동한다. 확증 편향이 작동하면 판단이 흐려진다.

 

성이사: "자세한 사정은 인사팀, 또는 저에게 서면으로 제출해 주세요."

 

냉정했다. 하지만 이것이 클선생과 지선생이 알려준 가장 안전한 거리였다. 감정의 바다에 발을 담그지 않는 것. 숫자의 땅에 서 있는 것.

김대리의 눈이 붉어졌다. 금새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성이사의 내면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충돌했다. '멈춰. 여기까지만.' 그리고 '그래도 한마디 더 해야 하지 않나.'

성이사는 첫 번째 목소리를 선택했다.

 

성이사: "오늘 면담은 여기까지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대리가 일어섰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문을 열고, 나갔다.

딸깍.

 

금요일 오후. 성이사는 창밖을 바라봤다.

잘한 걸까. 모르겠다. 숫자만 말했다.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았다. 클선생과 지선생의 조언대로 했다. 인사팀에 코멘트를 전달했다.

하지만—

김대리의 눈이 붉어지던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불편함? 죄책감? 아니면 안도감?

안도감. 그것이 성이사를 가장 불편하게 만든 감정이었다. 할 말을 다 하고 면담을 끝냈다는 안도감. 그것은 석대표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고 👍 하나를 받았을 때의 안도감과 구조적으로 같았다. 사람을 상대로 한 면담이, 업무 보고와 같은 감정으로 끝났다는 것.

 

성이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아무리 제선생, 지선생, 클선생과 이야기해도, 결국 실행하는 배우는 나다.

AI가 대본을 써주고, 연출 지시를 해주고, 리허설까지 시켜줘도, 무대 위에 서는 것은 성이사 본인이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는 대본에 없는 일이 벌어진다. 김대리의 "넥타이 잘 어울리시네요"도 대본에 없었고, 그녀의 눈이 붉어지는 것도 대본에 없었고, "자세한 사정은 서면으로 제출해 주세요"라는 대본에 없던 애드립도 성이사의 입에서 나왔다.

 

현실은 늘 대본과 한 문장씩 어긋나 있다. 서른 문장 분량의 면담에서 대본대로 간 것은 스물아홉 문장이었고, 마지막 한 문장은 성이사의 즉흥이었다. 그리고 그 한 문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성이사는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섰다. 월요일이면 김대리의 서면이 올 것이다. 아니면 안 올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성이사의 역할은 끝났다.

 

사람의 상태를 드라이하게 기록을 파악하는 것은 AI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 앞에 서서 정확하게 말하는 법은, 매번 상황이 달랐고 애드립이 많았다. 그 애드립은 성이사의 총체적인 태도이자 삶의 지식이다.

딸깍. 문이 닫히는 소리는 언제나 같지만, 문 너머로 사라지는 사람의 표정은 매번 달랐다.

 

<성이사는 여직원과 인사평가 면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