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사는 아이들, 현재를 사는 나, 과거를 사는 부모님. 그 시제들이 만나는 곳에 봄이 있다

2026. 4. 4. 13:52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금요일 오후부터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작가 성이사는 설레었다. 50대. 중년. 임원. 이런 단어들과 '설렘'은 어울리지 않지만, 봄은 나이를 묻지 않는다. 벚꽃은 직급을 구별하지 않는다.

꽃이 피면 부모님 모시고 근교 나들이라도 가야지.

다중우주를 둘러봤다. 성이사는 축 처져 있고, 투자자 성이사는 증권 앱 금식 중이고, 슈퍼 성이사는 날씨 앱을 보면서 내일 달리기와 라이딩 시간을 배분하고 있었다.

 

작가 성이사: "다들 시간의 노예야."

슈퍼 성이사: (날씨 앱에서 눈을 떼며) "뭐?"

작가 성이사: "너의 달리기, 라이딩 루틴 때문에 정작 중요한 부모님과의 짧은 여행도 계획하기 어려워."

슈퍼 성이사: (잠시 생각하다가) "너 말이 맞아. 하지만 루틴이 곧 삶이야. 루틴이 없으면 매일 새로운 것을 기대하게 되고, 그 기대가 주말의 끝자락에 도달했을 때 아쉬움이 많이 남아. 나는 루틴을 지키는 게 중요해."

작가 성이사: "그러면 이번 주말…"

슈퍼 성이사: "어쨌든 나는 시간을 맞출 수 있어. 계획은 저기 널브러져 있는 성이사하고 이야기해. 투자자 성이사는 뭐…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고."

투자자 성이사: (눈을 감은 채) "증권 앱 금식 중. 말 시키지 마."

 

작가 성이사는 와이프에게 물었다.

성이사: "부모님하고 근교에 나가서 점심이나 먹을까?"

와이프: "그러자."

두 아이에게 물었다.

성이사: "얘들아, 주말에 할머니랑 점심 먹으러 갈까?"

큰딸: "응? 바빠. 약속 있어."

막내딸: "나도. 바빠."

화가 나지 않았다. 익숙했다. 하지만 작가 성이사는 그 장면에서 무언가를 읽어냈다.

 

나는 항상 나의 딸들, 너희의 미래를 위해서 산다. 딸들을 보면서 희망을 얻는다. 딸들은 성이사의 미래다.

그리고 나는 현재를 산다. 팍팍하고 경쟁 치열한 서울에서 어떻게든 가족을 건사한다. 성이사는 현재다.

나의 부모님은 항상 나의 과거를 추억하고 산다. 어머니를 만나면 어머니는 성이사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부모님은 과거다.

일가족이 모이면 미래→현재→과거의 시제들이 오고가고, 그 시제들의 만남이 내가 된다.

딸들은 미래를 보고 있어서 할머니에게 시간을 주지 않는다. 성이사는 현재에 매여 있어서 부모님에게 시간을 주지 못한다. 부모님은 과거를 추억하며 아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이들은 성이사가 어떤 회사에 다니고 임원으로 근무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부모님은 사람들을 만나면 이야기한다. '우리 애가 상장사 회사의 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그리고 성이사는 그 자랑을 짜증으로 받아낸다.

"엄마,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예전에 중년의 아버지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버지는 무슨 재미로 살까? 왜 이렇게 게으를까? 하지만 이제 작가 성이사가 그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안다.

아버지도 봄이 오면 설레었을 것이다. 벚꽃이 피면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다만 여유가 없었고, 쉬는 것이 다음 주에 닥칠 일들에 대한 유일한 대비였고, 소파가 유일한 피난처였을 뿐.

그리고 나는 철이 들고 나서, 그에게 따뜻하게 "봄날에 나들이라도 갈까요?"라고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휴일의 루틴에 집중할 뿐.

그런데 나의 딸도, 내가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나에게 똑같이 한다.

도돌이표처럼 인생은 돌아간다.

 

토요일 오후. 벚꽃이 만개했다. 감수성도 만개했다.

작가 성이사는 눈치를 보며 펜트리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 냉장실로 옮겼다.

슈퍼 성이사: "야. 맥주 옮기는 거야?"

작가 성이사: "…비타민 워터."

슈퍼 성이사: "비타민 워터가 왜 짤랑거려."

작가 성이사: (포기하며) "어쩔 수가 없다. 이런 봄날엔 취해야지."

베란다. 봄바람. 맥주 한 캔. 벚꽃이 아파트 너머로 보였다. 분홍빛 구름이 나무 위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수첩을 꺼냈다.

 

딸들은 미래를 산다. 나는 현재를 산다. 부모님은 과거를 산다.

하지만 벚꽃이 피면, 세 개의 시제가 잠시 만난다.

딸은 벚꽃 아래에서 셀카를 찍고 (미래의 추억을 만들고), 나는 벚꽃 아래에서 맥주를 마시고 (현재를 즐기고), 부모님은 벚꽃 아래에서 옛이야기를 하신다 (과거를 추억하고).

벚꽃은 모든 시제를 동시에 품는 유일한 꽃이다.

수첩을 덮었다. 맥주 한 캔이 비었다. 두 번째 캔을 따려다가 멈췄다.

핸드폰을 들었다.

 

성이사: "엄마."

엄마: "왜? 무슨 일이야?"

성이사: "애들이 다 약속이 있네 다음에 같이 점심먹어요."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엄마: "…그래. 그러자. 아버지한테 이야기할게."

 

전화를 끊었다. 두 번째 맥주를 땄다. 프쉬.

세 번째 캔은 냉장고에 있다. 다음 글이 잘 써졌을 때를 위해.

내일은 부모님을 모시고 벚꽃을 보러 가지 않는다. 이유는 아이들이 바빠서이다. 괜찮다. 나중에 알게 될 테니까. 딸들도 언젠가 부모가 되면, 아이에게 "같이 밥 먹자"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바빠"라고 답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이해할 것이다.

도돌이표. 같은 선율이 반복된다. 부르는 사람만 바뀐다.

벚꽃이 바람에 날렸다. 어디로 가는지는 꽃잎도 모른다.

나도 날리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다만 날리면서 쓸 수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벚꽃이 지는 속도로, 천천히.

 

<벚꽃 아래서 맥주를 한잔하고 있는 작가성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