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4. 11. 09:13ㆍ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성이사는 노트북의 구석에서 오래된 파일 하나를 발견했다.
파일명: 「50대를 위한 경쟁력 유지 계획_2024.docx」
2년 전에 세운 계획서. 50대가 되기 전에, 48세의 성이사가 50대의 생존을 위해 쓴 전략 문서였다. 성이사는 파일을 열었다. 마치 고고학자가 유적지에서 토기를 발굴하듯, 조심스럽게.
「50대를 위한 경쟁력 유지 계획」
- AI 활용도 늘리고 N8N을 연동해서 최대한 업무 자동화하기
- 영상편집 기술 습득하기
- 영어 및 외국어 공부로 해외 파트너사 직접 만들기
- 50대에도 실무 업무 경쟁력을 유지하기
성이사는 화면을 바라보며 웃었다. 쓴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이었다. 마치 고등학교 졸업앨범에서 "장래희망: 대통령"이라고 쓴 것을 발견한 느낌.
2년 전의 나는 참 열심히 살려고 했구나.
AI와 N8N으로 업무 자동화. 2년 전에는 이것이 최첨단이었다. N8N의 노드를 연결하고, 자피어로 트리거를 만들고, 슬랙 봇을 세팅하는 것이 '자동화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클로드 코드의 MCP 방식으로 해결된다.
노션, 슬랙, 세일즈포스, 구글 워크스페이스. 회사가 도입한 SaaS 프로그램들이 클로드 기반에서 모두 자동화된다. 슬랙의 여러 채널에서 동시에 논의 중이던 내용을 클로드 코드로 가져와서, 채널별 이슈 사항과 블로커를 정리하고, 누가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하려고 하는지까지 분석한다.
과거에 이걸 하려면 중간관리자가 각 채널을 모두 읽고, 취합하고, 정리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지금은 2분.
성이사는 2번 항목을 봤다. '영상편집 기술 습득하기.' 성이사는 프리미어 프로를 한 달 배우다가 포기했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AI가 영상을 만든다. 텍스트를 넣으면 영상이 나온다. 프리미어 프로를 배울 이유가 사라졌다.
3번 항목. '영어 및 외국어 공부로 해외 파트너사 직접 만들기.'
성이사는 이 항목에서 가장 오래 멈췄다.
현재 성이사는 더 이상 외국어 공부를 하지 않는다.
모든 문서는 AI 번역이 정확하다. 일본 출장에서 마츠다 상무와의 대화도, 김과장이 통역을 했지만 사전에 클로드로 미팅 시나리오를 일본어로 준비해갔다. 그리고 곧 AI 디바이스 — 메타의 스마트글래스 같은 기술 — 이 외국어 문제를 내년까지 해결해줄 것 같았다. 실시간 통역이 안경에 내장되는 시대.
그래서 동기부여가 안 된다. 외국어를 배울 동기가.
어쩌면 성이사의 부족한 시간과 부족한 능력을 모두 AI가 지원해주는 형태가 된 것이다. AI를 쓰지 않으면 성이사의 업무 역량은 급격히 반감된다. 2년 만에 AI가 회사 생활에 들어온 것은 정말로 컸다.
4번 항목. '50대에도 실무 업무 경쟁력을 유지하기.'
성이사는 50대가 되었다. 그리고 업무 경쟁력을 AI를 통해 유지하고 있다. 50이 되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후배 임원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것이었고, 생물학적으로 그들과 경쟁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경쟁력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쟁 상대는 더 이상 선배 임원이 아니라 AI가 되었기 때문이다.
40대 후배 임원이 50대 선배 임원을 밀어내는 시대가 아니라, AI가 모든 임원의 존재 이유를 묻는 시대. 세대 간 경쟁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모두가 같은 위협 앞에 서 있으니까.
성이사는 파일을 닫으며 생각했다.
2년 전의 계획은 틀리지 않았다. 방향은 맞았다. 다만 속도를 예측하지 못했다. 2년이면 충분할 줄 알았던 변화가, 6개월 만에 와버렸다.
그날 오후, 성이사는 복도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
박차장.
8년 전 성이사와 같이 일했던 사람. 당시 30대 중반의 패기 넘치던 팀원. 지금은…
성이사: "어, 박차장? 오래간만이야."
박차장: (반갑게) "이사님! 진짜 오래간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성이사: "그럭저럭. 박차장은?"
8년 만에 본 박차장은 여전히 차장이었다. 진급에 미끄러졌는지, 직급이 그대로였다. 40대 중반의 차장. 성이사의 눈치 센서가 박차장의 표정에서 피로와 좌절을 읽어냈다.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박차장: (한숨) "이사님, 저 요즘 힘들어요. 오부장 아시죠?"
성이사: "오부장? 마케팅팀?"
박차장: "네. 경력도 연차도 저보다 낮은데 부장으로 승진했잖아요. 요즘 AI 전환이다 뭐다 하면서 팀 전체를 뒤집어놓고 있는데, 솔직히 저는 동의가 안 돼요."
성이사: "어떤 부분이?"
박차장: "AI로 다 바꾸겠다는 건데,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부장은 뭐든 AI, AI 하는데, 그래서 팀 분위기가 완전히…"
박차장의 불만은 길었다. 오부장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 AI 전환에 대한 거부감, 자신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에 대한 분노.
박차장: "그래서 저는 다른 부서로 옮기고 싶어요. 영업총괄 박이사님 팀으로요. 박이사님은 여전히 사람 중심으로 일하시고, 인간미가 느껴져요. 이미 이야기 중이에요."
성이사는 잠시 생각했다.
박이사. 과거 성이사의 부하직원이었다. 최근에 만나봐도 AI보다는 사람들과 협업하고, 프레젠테이션하고, 저녁이면 회식을 하는 스타일. 과거에는 이런 장점이 조직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가?
성이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이사: "박차장, 하나만 물어볼게."
박차장: "네."
성이사: "과거에 박차장은 누구보다 욕심이 많았어.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사까지 가겠습니다'라고 했던 것 같은데."
박차장: "……."
성이사: "그런데 지금은 누구 밑에서 일할 것을 고민하는구나."
박차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성이사: "내 생각에… 이제는 개인의 경쟁력 시대인데, AI를 더 잘 활용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 요즘은 AX 전환이 판을 치는 시대니까. 한번 생각해 봐."
박차장: "……."
성이사: "물론 박이사하고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문장을 끝내지 않았다. 끝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박차장과의 티타임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성이사는 씁쓸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과 '누구와 일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
성이사는 직장 생활 내내 전자였다. 누구 밑에서 일할 것인가보다, 내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시대가 변하면 어떻게 편승하고 경쟁력을 가져갈 것인가. 그것이 성이사를 임원까지 끌어올린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8년 만에 만난 박차장은 여전히 '누구와 줄을 설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30대의 박차장이 40대 중반이 되어서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AI 시대에 개인의 능력을 증폭시켜 포지셔닝하느냐, 과거의 성공 방식으로 살아가느냐.
아직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성이사는 박차장과의 대화에서 왠지 모를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것은 박차장에 대한 답답함이 아니라, 8년 전 자기 밑에서 일하던 패기 넘치던 30대가 줄 서기를 고민하는 40대가 된 것에 대한, 시간에 대한 답답함이었다.
작가 성이사: (수첩에 적으며) "2년 전의 계획서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시대가 더 빨랐을 뿐이다. 그리고 8년 전의 박차장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세상이 더 빨랐을 뿐이다."
성이사는 노트북을 닫았다. 파일명 「50대를 위한 경쟁력 유지 계획_2024.docx」는 이제 고고학 유물이 되었다. 2년 된 유물. 이 속도라면 내년의 계획서도 6개월 만에 유물이 될 것이다.
그래도 계획은 세워야 한다. 유물이 될 줄 알면서도.
왜냐하면 계획을 세우는 행위 자체가 '아직 현역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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