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1. 10:03ㆍ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4월인데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오는 듯한 날씨가 이어졌다.
슈퍼 성이사는 매일 달리기와 일요일 한강 라이딩을 지속하고 있었다. 지속의 댓가도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딸리는지 눈 떨림 증상이 생겼고, 늘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마그네슘 부족인지, 카페인 과다인지, 아니면 그냥 51세의 몸이 보내는 신호인지.
하루쯤 쉬어도 될 텐데.
하지만 슈퍼 성이사는 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외부의 약속이나 정말 몸이 안 좋을 때를 제외하면, 퇴근 후에 의식처럼 매일 달린다. 슈퍼 성이사의 정체성이다. 달리지 않으면 슈퍼가 아니라 그냥 성이사다.
그런데 오늘, 퇴근길에 비가 왔다.
비가 오고 기온이 떨어지자, 감기 기운이 느껴졌다. 목 안쪽이 살짝 따끔거렸고, 콧물이 흘렀다. 평소라면 이 정도는 무시하고 우중런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눈 떨림 + 비염 + 감기 기운.
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오는 것은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신호다. 이런 상태에서 비를 맞으며 뛰면, 작은 감기가 큰 병으로 바뀔 수 있다. 51세의 면역 시스템은 30대처럼 너그럽지 않다.
슈퍼 성이사: (창밖을 보며) "…오늘은 쉬어야 하나."
하지만 '쉰다'는 단어를 슈퍼 성이사의 사전에서 찾는 것은 어려웠다. 대신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계단 오르기.
성이사는 21층 아파트의 20층에 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다음, 비상계단으로 20층까지 올라온다. 그리고 다시 엘리베이터로 1층으로 내려가서 또 20층까지 올라온다. 5번 반복하면 100층 계단 오르기. 약 30분의 시간과 300kcal의 열량 소모.
달리기 대체 운동으로 나쁘지 않다.
슈퍼 성이사는 1년에 대략 20번 정도만 한다. 자주 하지는 않는 운동. 하지만 오늘처럼 비가 오고, 면역력이 떨어진 날에는 이 운동이 답이었다.
준비는 간단했다. 반바지, 운동화, 골전도 이어폰. 허리밴드에 스마트폰을 넣지 않고, 그냥 손에 들었다. 계단 오르기는 30분이라 짧다. 손에 들고 있어도 부담이 없다.
이어폰에서 팟캐스트가 흘렀다. 경제 팟캐스트. 투자자 성이사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 슈퍼 성이사도 가끔은 투자자 성이사에게 양보한다.
엘리베이터로 1층. 비상계단으로 20층. 다시 엘리베이터로 1층. 다시 비상계단으로 20층.
비상계단을 처음 오르기 시작하면, 평소에 보지 못한 풍경이 나타난다.
5층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의 정원. 비에 젖은 벚꽃 잎들이 바닥에 깔려 있다. 분홍빛 카펫. 평소에 엘리베이터로 휙 지나가던 풍경이, 계단을 오르니 멈춰서 보이게 된다.
10층 창문 너머. 멀리 한강이 보인다. 비 오는 한강은 회색이다. 평소에 슈퍼 성이사가 달리던 코스. 오늘은 그 길을 비상계단에서 내려다본다.
15층 창문 너머. 옆 아파트의 창문들이 보인다. 어떤 집은 불이 켜져 있고, 어떤 집은 어둡다. 누군가는 저녁을 먹고 있고, 누군가는 TV를 보고 있고, 누군가는 출근을 위해 옷을 다리고 있을 것이다. 각자의 삶.
슈퍼 성이사: (15층 창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속으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층에서 살아가는구나."
20층. 도착. 다시 엘리베이터로 1층.
계단 오르기는 달리기와 다르다.
같은 동작의 반복이라 지루하다. 변화가 없다. 한 발 올리고, 다른 발 올리고, 또 한 발 올리고. 다리 근육의 같은 부위에 같은 부하가 반복적으로 걸린다.
그리고 땀이 많이 난다. 밖에서 달리면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지만, 비상계단에는 바람이 없다. 그래서 더 덥고, 더 답답하다.
하지만 묘하게 평화롭다.
밖에서 달릴 때는 신호등을 기다리고, 사람을 피하고, 자전거를 비켜서 가야 한다. 외부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해야 한다. 하지만 비상계단에는 아무도 없다. 슈퍼 성이사 혼자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30분.
그래서 생각이 정리된다.
이번 주의 회사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카와무라상의 인사평가. 정부장과의 클라우드 건. 황과장과의 청담동 저녁. 그리고 다음 주에 닥칠 일들.
3번째 오르기. 4번째 오르기.
…근데 지금이 4번째인가, 5번째인가?
슈퍼 성이사는 계단을 오르며 가끔 헷갈린다. 4번 올라오고 끝낼 때도 있고, 6번 올라오고 끝낼 때도 있다. 그래서 가민 워치에 계단 오르기 모드를 추가해서 정확히 몇 층을 올라왔는지 확인한다.
오늘도 가민이 알려줬다. 현재 80층. 100층 목표까지 20층 남음.
슈퍼 성이사: (가민을 보며) "아, 이번이 5번째구나."
마지막 한 번. 1층으로 내려갔다가, 마지막으로 20층을 오른다. 다리가 묵직했다. 허벅지가 뜨겁고, 종아리가 뻐근했다. 하지만 어깨와 가슴은 가벼웠다. 외부 세계의 무게가 비상계단의 콘크리트 벽 사이로 빠져나간 느낌.
20층 도착. 100층 완료.
성이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오자,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투자자 성이사가 말했다.
투자자 성이사: "야."
슈퍼 성이사: "왜."
투자자 성이사: "계단 오르기 할 때 슈퍼블라스트 신지 마. 그건 한강 달리기용이잖아. 계단 오르기는 별도의 안 신는 신발 따로 준비해서 써."
슈퍼 성이사: "…쟤네 다 신어."
투자자 성이사: "신지 마. 그러면 또 새로 사잖아. 우리 신발장에 12켤레 있어. 그중에 안 신는 거 골라서 계단용으로 써."
슈퍼 성이사: "12켤레 다 데일리로 로테이션 중이거든?"
투자자 성이사: "12켤레를 어떻게 다 로테이션해?"
슈퍼 성이사: "기능별로. 데일리는 모어 4, 템포는 노바블라스트 5, 장거리는 슈퍼블라스트 3, 회복은 보메로 프리미엄, 카본은 베이퍼플라이…"
투자자 성이사: "…말 끊고 싶다."
슈퍼 성이사: "야, 인정해."
투자자 성이사: "뭘?"
슈퍼 성이사: "우리 아파트가 얼마인지 알아?"
투자자 성이사: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슈퍼 성이사: "신발장의 면적이 몇 평인지 알아?"
투자자 성이사: "…네 평 정도?"
슈퍼 성이사: "그래. 4평. 우리 아파트 평당 시세로 환산하면 신발장의 면적 가치는 상상에 맡길께. 그 안에 신발을 쟁여놓는 것 자체가 보관료를 내는 거라고."
투자자 성이사: "…그러니까 더 안 사야지!"
슈퍼 성이사: "아니야. 보관료가 어차피 나가는 거니까, 그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해. 운동에 잘 쓰고, 새로운 신발이 나오면 또 경험해보고, 그게 신발장의 진정한 ROI야."
투자자 성이사: "……."
슈퍼 성이사: "그게 취미생활이지."
투자자 성이사: (멍하니) "…언제 저런 경제적 방어 논리를 개발했대."
슈퍼 성이사: (만족스러운 미소) "내 옆에 너가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면역이 생긴 거야."
투자자 성이사: "야, 너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잔소리하면, 너는 그 잔소리를 학습해서 다음 잔소리를 막을 논리를 개발해. 점점 강해지고 있어."
슈퍼 성이사: "그게 진화야."
투자자 성이사: "…내가 너의 진화를 돕고 있는 거구나."
비 오는 날의 100층. 슈퍼 성이사의 다리는 묵직했고, 투자자 성이사의 마음은 더 묵직했다.
아파트의 공간 가치를 신발 보관료로 환산하는 다중우주가,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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