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 AI 대시보드와 임원 그리고 우리의 상사는 클부사장.

2026. 5. 23. 07:18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일요일 오후 3시.

성이사는 거실 식탁에서 노트북을 폈다. 떡볶이 냄새가 아직 거실에 남아 있었다. 아내가 정리하는 그릇 소리. 달그락, 달그락. 일요일의 그 시간에 그 소리가 들리면, 성이사의 안에서 시계 하나가 다시 돌기 시작한다.

 

내일 아침 9시. 임원 회의.

석테크홀딩스의 월요일 아침 회의는 매주 같은 패턴이었다. 부서별 주요 현안과 매출 보고를 5~10분씩. 성이사의 보고는 국내·해외 협력업체 동향이 중심이라 거의 5분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일요일 저녁부터 머릿속에 다음 날의 보고가 굴러다녔다.

성이사는 메모장을 열었다. 마츠다 상무 라인 동향. 카와무라상의 이번 주 진행 사항. A사와의 분기 KPI 점검. 빅스 신규 어카운트 진행률. 세 줄, 네 줄, 다섯 줄.

저녁 10시. 양압기를 켜고 자리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 양압기 앱이 보여주는 숙면 시간은 1시간 17분이었다. 일요일 밤은 매주 그랬다. 잠을 잔 게 아니라, 내일을 시뮬레이션한 밤이었다.

 

월요일 아침 8시 50분. 회의실.

부서별 보고가 평소처럼 흘러갔다. 광고 에이전시 부문 김부사장. 커머스 사업 부문 이부사장. 재무팀 최이사. 홍보팀 김이사. 법무팀 진이사. 그리고 성이사.

5분의 동향 보고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평소대로 오늘의 회의는 별일 없이 끝날 것 같았다.

 

그런데.

석대표의 부엉이 눈썹이 한 번 일렁였다. 안경 너머의 안광이 빛났다. 성이사는 그 신호를 안다. 회사에서 14년을 함께한 사람이 가진 패턴 인식. 부엉이 눈썹이 저렇게 일렁이면, 오늘 무언가 지시 사항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석대표: "정실장, 대시보드 열어주세요."

성이사는 시선을 회의실 입구 쪽으로 옮겼다.

 

미래기획실 정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40대 초반. 단정한 단발머리. 옅은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회색 슬랙스. 손에는 노트북 하나, 그리고 작은 가죽 노트.

평소 정실장의 인상은 동그랗고 유순한 인상이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여우였다. 임원진들이 그녀를 보는 시선에는 친근함과 경계심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의 정실장은 평소와 미묘하게 달랐다. 노트북을 회의실 화면에 연결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한 박자 빨랐다. 그리고 얼굴에는 굳이 표현하자면  드디어라는 종류의 자신감이 옅게 떠 있었다.

성이사의 명치에 익숙한 동전 하나가 잠깐 얹혔다. 그 동전은 오래전 그 여름의 인사발령 이후로 가끔 다시 찾아오는 신호였다. 오늘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난다는 신호.

회의실 화면에 대시보드가 떴다.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전사 실시간 현황판

회의실의 임원들이 동시에 얼음이 되었다.

 

화면 안에는 모든 부서의 보고 내용, 매출 데이터, 세일즈포스 오퍼튜니티, 고객 문의 트래픽이 한 화면에 정렬되어 있었다. 그래프. 막대. 트렌드 라인. 그리고 오른쪽 사이드바에는 AI 요약이라는 라벨 아래 부서별 핵심 이슈가 세 줄씩 자동 요약되어 있었다.

방금 성이사가 5분간 보고한 마츠다 라인 신규 어카운트 진행률이 화면 어느 한 칸에 그래프로 떠 있었다. 성이사가 일요일 저녁에 정리한 그 내용이, 정실장의 화면에는 이미 있었다.

 

석대표: "정실장이 팀원 둘과 회사의 모든 정보를 클로드 MCP와 코드를 활용해서 만든 대시보드입니다. 제작 기간 2주."

김부사장: (반사적으로) "정실장 팀에 개발자가 있나요?"

정실장: "없습니다."

회의실이 다시 한 번 얼음이 되었다.

 

정실장: "사내 SaaS 시스템과 사내 데이터만 가지고, 클로드 코드를 이용한 바이브 코딩으로만 만들었습니다."

석대표: "정실장, 만족도는요?"

정실장: (한 박자 망설이다가) "제가 그동안 다른 임원분들 귀찮게 해드리고, 여러 가지 사항들 질문 드리고 리포팅도 받았는데… 이제는 그렇게 안 해도 되어서, 다른 임원분들이 편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편해지지 않을까.

성이사는 그 한 마디에서 정실장의 드디어가 어디서 왔는지를 정확히 읽었다. 그것은 너희들 보고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었다.

 

성이사는 회의실 안의 임원들 표정을 스캔했다.

김부사장. 광고 에이전시 부문장. 50대 중반. 양복 깃에 회사 배지. 평소 표정 변화가 적은 사람인데, 오늘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내려가 있었다. 손가락이 펜을 쥐고 있다가, 펜의 끝을 테이블에 두 번 두드렸다. 그가 긴장할 때의 버릇이었다.

 

이부사장. 커머스 사업 부문장. 김부사장보다 두세 살 어린 50대 초반. 약간 마른 체형. 평소 회의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사람인데, 오늘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안경을 한 번 살짝 올렸다 내렸다.

 

재무팀 최이사, 홍보팀 김이사, 법무팀 진이사 이 세 명의 표정은 방관자의 표정이었다. 자기 부서가 직접 타격받지 않는 영역. 그러나 모두의 시선이 옆자리를 향하고 있었다. 같은 부서장끼리, 같은 임원끼리, 누가 먼저 입을 열까를 살피는 시선.

 

성이사 본인의 표정은 거울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아마 세 가지 생각이 동시에 굴러가는 표정이었을 것이다.

하나, 다음 주부터 내 5분 보고는 필요 없어진다. 그러면 나는 뭘 하지.

둘, 정실장 저 여우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쳤구나.

셋, 그래도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렇게 될 줄 알기는 했다.

세 번째 생각이 가장 무거웠다. 글로벌 IT 공룡 M사의 임원을 얼마 전에 만났을 때, 그는 10% 레이오프가 진행 중이고 자기 자리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후배에게 밀리든, 새로 들어오는 임원에게 밀리든, AI에게 밀리든 어차피 예정된 미래였다. 다만 그 예정된 미래가 오늘 회의실에서 갑자기 현재가 되었을 뿐이다.

 

석대표: "다음 주부터 임원 회의는 현황 보고와 매출 보고가 없습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한 번 더 가라앉았다.

 

석대표: "대신 본인 팀의 업무를 얼마나 AI화로 전환하는지 — AI 전환율 보고를 받겠습니다. 본인 팀의 업무 R&R을 정리하시고, 각각의 퍼센티지를 정리해 놓으세요. 정실장은 이번 주까지 모든 임원들의 데이터를 받고 정리해 주세요."

 

석대표: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각각의 AI 비율과 병목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봅시다. 특히 직원들의 오퍼레이션과 개발자들의 개발 업무는 AI화를 높이고, 필요시 전사에 AI 툴 보급을 어떻게 할지 정실장이 별도 보고해 주세요."

석대표는 말을 마치자마자 노트북을 덮고 회의실을 나갔다. 그의 등 뒤로 회의실 문이 딸깍 닫혔다.

남은 임원들이 정실장을 째려봤다.

 

김부사장이 먼저 입을 뗐다. 펜으로 테이블을 두 번 두드리던 그 손가락이 이제는 정실장을 향하고 있었다.

 

김부사장: "정실장, 이런 일을 진행하면 미리 이야기를 주셨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 사이의 간격이 평소보다 짧았다. 그는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김부사장: "광고 에이전시 부문은 이미 많은 부분을 AI 툴들을 통해서 소재 제작, 영상 제작 등을 하고 있습니다. 자동화도 진행 중이고요. 안 그래도 직원들을 쪼고 있어서 긴장도가 올라가는데, 이런 상황에서 AI 진행 비율을 더 올리면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까 싶은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세요?"

이부사장이 안경을 다시 살짝 올렸다.

 

이부사장: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본부장급 두 명이 그렇게 말하자, 본부 산하의 다른 임원들도 모두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며 정실장을 째려봤다. 정실장의 동그랗고 유순한 인상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인상 안에서 여우의 눈이 한 번 깜빡였다.

 

정실장은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최이사. 김이사. 진이사. 책사급 임원들. 그러나 그쪽에서도 명확한 동의 신호가 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성이사에게 멈췄다.

성이사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안다.

도와주세요.

미래기획실, 재무팀, 홍보팀, 법무팀, 대외협력팀 이 다섯 부서는 대표이사의 책사에 가까운 조직이었다. 사업 본부 두 곳(광고·커머스)이 전선이라면, 책사 다섯은 참모였다. 정실장은 같은 참모 라인에 SOS를 보내고 있었다.

성이사는 잠시 망설였다. 망설임의 무게가 명치에 한 번 더 얹혔다.

 

성이사: "저도… 솔직히 당황스러웠습니다."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성이사로 옮겨졌다.

 

성이사: "그런데 대표님 성향, 다들 아시지 않나요?"

한 박자 멈췄다.

 

성이사: "이렇게 이야기 해봐야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인데. 직원들의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면, 김부사장님과 이부사장님이 한번 대표님께 직접 말씀 주시는 건 어떨까요? 두 분이 가신다면 저는 동행하겠습니다."

이 한 마디로 회의실의 공기가 다시 바뀌었다.

 

본부장급 부사장들이 석대표를 찾아가 간청을 했을 때 어떤 호통과 불이익이 돌아오는지 회사의 인사 조치 역사가 이미 모두에게 증명한 바였다. 14년간 함께한 성이사가 그 한 마디를 던진 순간, 회의실 안의 모두가 상황을 인지했다.

모두들 한숨만 한 번씩 쉬었다. 김부사장은 펜을 노트 위에 다시 놓았다. 이부사장은 안경을 한 번 더 올렸다. 회의실의 문이 차례로 딸깍 열리고 닫혔다. 약속이 있어서요, 오후 일정이… 같은 핑계들이 짧게 흘러나왔다.

 

성이사도 회의실을 나서려는데, 정실장이 옆에서 짧게 말을 건넸다.

정실장: "성이사님, 시간 되시면 커피 한잔 어떠세요?"

성이사는 조금 껄끄럽지만 추가 정보도 들을 겸 응했다.

 

회사 근처 스타벅스. 정실장이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깊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가죽 노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손가락이 평소보다 느렸다. 자신감의 막이 한 겹 벗겨진 모습.

정실장: "성이사님, 제 인생에서 2주의 시간이 그냥 날아간 것 같아요."

성이사: "왜요?"

정실장: "대표님이랑 아침, 점심, 퇴근 전 하루 3차례 회의를 했어요. 매번 제가 정리한 내용을 드리면, 대표님이 그걸 다시 클로드로 추론·분석해서 답을 주세요."

성이사: "어떤 식으로요?"

정실장: "예를 들어 제가 광고 영업 관련해서 기회비용 대시보드를 만들겠다고 하면, 대표님이 세일즈포스 MCP 연동은 이렇게 하고, 오퍼튜니티 데이터는 이런 방식으로 가져오라고 본인이 직접 클로드로 확인하시고 답을 주세요. 세일즈포스, 슬랙, 구글 워크스페이스, 레거시 데이터베이스 전부 클로드가 순식간에 파악하고 정리하니까."

정실장은 잔을 들고 잠시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한 박자 멈췄다.

 

정실장: "저는 대표님이 아니라 클부사장님과 일하는 것 같아요."

성이사는 그 표현에 잠깐 웃을 뻔했다. 클부사장. 클로드를 부사장 자리에 앉힌 호칭. 정실장이 그 자리에서 만들어낸 신조어. 그러나 웃음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다른 감정이 명치에 먼저 도착했다.

섬뜩함.

 

석대표는 개발자가 아니다. 그런 그가 개발자가 아닌 정실장을 통해 회사 모든 부서의 실시간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성이사 안에서 질문이 떠올랐다.

임원과 관리자가 필요할까.

일의 보직도, 경력도, 연륜도, 도메인 지식도 이젠 차이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14년의 경험이 14일의 클로드 코드 학습보다 빠르다는 보장이 없다. 마츠다 상무 라인을 처음부터 만든 사람이 자기 한 명뿐이라는 강점도, 그 라인의 모든 데이터가 전사 실시간 현황판에 정렬되는 순간 약해진다.

 

정실장은 본인의 감정과 상황을 누구에겐가 털어놓아야 했고, 같은 책사 라인의 성이사가 자기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성이사는 정실장을 이해한다.

하지만 성이사에게도 함께 일하는 팀원들이 있다. 카와무라상. 김대리. 그리고 신대리(육아휴직 중). 다음 주에 이들에게 우리 팀의 AI 전환율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이 셋의 업무 중 어떤 비율이 AI로 대체 가능한지를 퍼센티지로 적어내야 한다.

성이사는 정실장과 커피를 마저 마시고 스타벅스를 나왔다.

 

자리에 돌아온 성이사는 — 오늘의 당황스러운 지시 사항을 팀원들에게 바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대신 클로드 프롬프트 창을 열었다.

 

오늘 임원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지시가 있었습니다. 대표가 미래기획실에 전사 실시간 현황판 대시보드를 만들도록 했고, 다음 주부터 임원 회의는 매출 보고가 아닌 AI 전환율 보고로 바뀝니다. 우리 팀의 업무 R&R 중 AI 전환 가능 비율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팀원들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어조와 순서, 그리고 팀원들이 불안을 줄일 수 있는 프레임을 함께 제안해 주세요.

엔터.

 

토큰이 녹기 시작했다.

성이사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잠시 멈췄다.

어쩌면 성이사의 팀원이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석대표와 무엇이 다른지를 물어볼 것 같다.

그 생각이 명치에 한 번 더 동전을 얹었다.

이번 동전은 오래전 그 여름의 동전과는 다른 종류였다. 그때의 동전은 내가 회사 안에서 갈아치워졌다는 신호였고, 오늘의 동전은 내가 AI를 갈아치우는 쪽에 서야 한다는 신호였다. 같은 무게, 다른 방향. 두 번 다 명치에 들어왔다.

성이사는 토큰이 녹는 화면을 계속 바라봤다.

회사에서 보낸 하루였지만, 마치 회사가 끝나기 시작하는 하루 같았다.

<석테크홀딩스의 임원 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