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23. 08:29ㆍ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이란 전쟁 발발 이후, 시장의 신경이 줄곧 날카로웠다.
지난주 코스피가 8,000을 찍었다. 한국 시장에 그런 숫자가 가능하다는 것을 투자자 성이사는 평생 처음 봤다. 차트의 막대 끝이 8,000선 위로 올라간 그 순간, 그는 드디어 시장이 한 단계 점프했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가면 성이사가 회사 안에서 겪는 AI 전환 압박과 미래의 암담함을, 투자자 성이사가 안에서 다 감싸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8,000을 찍은 주가가 미끄럼틀을 타기 시작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었다. 화요일 -2.3%. 수요일 -1.8%. 목요일 -3.1%. 금요일 -2.4%. 그리고 이번 주 월요일 아침 블랙 먼데이. 코스피가 한 번에 5%대 폭락. 차트의 막대가 밑으로 길게 떨어진 빨간 막대 하나로 다음 주의 분위기를 결정해버렸다.
투자자 성이사는 이런 하락장을 맞으면 어느 순간 주식 앱을 보지 않는다. 공포에 사로잡히기 싫어서다. 화면에서 빨간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손실 금액 환산이 시작된다. 오늘 점심값 몇 끼가 날아갔다. 이번 분기 보너스의 절반이 빠졌다. ETF 적립금 6개월치가 사라졌다. 환산이 시작되면 결정이 흔들린다. 그래서 안 본다.
대신 클로드와 함께 짜둔 DC 리밸런싱 계획도 4주째 실행을 못 하고 있었다. 분명히 4월 첫 주에 채권 비중 5% 줄이고 주식 비중 5% 늘리기가 계획이었는데, 손가락이 매수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지금 매수하면 더 떨어지는 거 아닌가. 그 한 줄의 의심이, 4주째 같은 자리에서 손가락을 묶어두고 있었다.
투자자 성이사는 거실 식탁 앞에 앉아 그가 만든 투자 대시보드를 열었다.
대시보드의 첫 화면. 미국 시장 트래커.
- 나스닥 100: ATH (All Time High) 갱신, 매일 신고가 경신 중.
이상한 현실이었다. 한국 시장은 무너지고 있는데, 나스닥은 매일 새 기록을 찍는다. 두 시장의 디커플링이 이번처럼 명확하게 보인 적이 있었나.
- 미국 생산자 물가지수: 상승.
- AI 자금줄 / 벤처 투자 자금: 불투명. 마지막 분기 -12%.
- 일본 기준 금리: 상승 (BOJ 0.5% → 0.75%).
- 미국 10년물 채권 금리: 4.8% (상승 추세).
- WTI 유가: 매일 상승. 90달러 돌파.
투자자 성이사의 안에서 익숙한 패턴 인식이 작동했다.
닷컴 버블 직전. 2008 금융 위기 직전. 코로나 초반. 우크라이나 전쟁 초반.
그가 평생 겪은 큰 하락의 직전에는 비슷한 신호가 있었다. 금리와 유가가 동시에 오르고, 자금줄이 줄어들고, 한 지역의 전쟁이 터지고, 시장의 한쪽은 ATH를 갱신하는데 다른 쪽은 무너진다. 디커플링의 정점이 보통 큰 하락 직전에 있다.
투자자 성이사의 머리 안에서 첫 번째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금은 현금화하라. 잃지 마라. 다음 기회를 노려라.
이것이 그가 평생 배운 위기론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같은 머리 안에서 두 번째 메시지가 떠올랐다.
투자자 성이사는 시선을 들어 거실 너머의 식탁을 봤다. 식탁 위에는 오늘 아침 성이사가 정리해둔 우리 팀 AI 전환율 보고서 초안이 놓여 있었다. 그 보고서를 떠올리자 다른 그림이 그려졌다.
성이사의 업무는 국내·해외 파트너사 관리를 중심으로 한 사업 지원이다. 사실상 사람을 만나는 것이 직업이다. 그런 성이사조차 — 최근 모든 회사 업무를 AI로 한다.
- 인사평가: 클로드 코드로 5분 안에 정리.
- 회의록: 코덱스로 자동 요약.
- 파트너사 관리 전략: 클로드 오푸스 4.7과 매일 상의.
- 파트너사의 최신 뉴스: 매일 데일리로 자동 클리핑.
하루에 성이사가 회사에서 사용하는 토큰량이 어마어마하다. 클로드 Max 플랜을 쓰고 있는데도 가끔 한도가 빠듯하다. 그런 성이사가 이번 주에 다시 전사 AI 전환율 보고를 준비하고 있다.
석대표는 회사 전체 운영을 AI로 전환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노동 인건비는 AI 토큰 비용보다 비싸진다. 업무 노하우 차이도 줄어든다.
지금은 발 빠르고 똑똑한 석대표가 다른 대표들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하지만 다른 회사의 대표들도 곧 같은 방향으로 갈 것이다. 구글, 오픈AI, 앤트로픽 같은 AI 회사들은 데이터센터를 더 많이 지을 수밖에 없다. AI Capex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투자자 성이사의 머리 안에서 두 번째 메시지가 떠올랐다.
AI 투자는 거품이 아니라 실존이다. 승자 독식이다. 지금 멈칫하면 후회한다.
이것이 현실론적 긍정론이었다.
위기론과 긍정론이 같은 머리 안에서 싸웠다.
- 위기론: 잃지 마라. 다음 기회를 노려라.
- 긍정론: 지금 놓치면 나중에 후회한다.
투자자 성이사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거실 시계가 9시 14분을 가리켰다. 아내는 침실에서 이미 자고 있었다. 노트북 팬 소리. 클로드 코드의 토큰 잔량 표시줄이 옆 모니터에서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투자자 성이사는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직장인 성이사가 겪는 문제를 보면, 결국 노동 생산성은 점점 더 AI 대비 떨어진다. 그 자리에 AI가 보급된다. 더욱이 지금의 AI는 상시 작동하지 않는다. 챗봇에 물어보거나,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거나, API를 호출하는 식이다. 호출 기반 동작. 그럼에도 이만큼 AI 소비량이 폭증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서 하반기부터 AI 글라스가 나올 예정이다. 글라스는 호출이 아니라 상시 작동한다. 차량에 타면 차량과 교신하고, AI끼리 협업하는 에이전트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린다. 그렇게 되면 AI 데이터센터는 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결론: 노동력 단가는 싸지고, AI는 기하급수적으로 보급된다.
그렇다면 지금 투자를 멈칫하는 건, 미래의 금융 자본 기회를 날리는 시간일 수 있다.
투자자 성이사는 노트북 옆 모니터를 봤다.
클로드 오푸스 4.7. 토큰 잔량 표시줄. 그가 매일 들어가는 가장 깊은 사고 파트너.
새 프롬프트 창을 열었다.
투자자 성이사: (타이핑)
나의 가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반기부터 AI 글라스가 본격 출시되고, 자율주행 전기차와 집안의 IoT 디바이스들이 에이전트로 서로 교신하기 시작하면 — AI Capex는 지금의 호출 기반 사용량과는 다른 차원으로 폭증할 것입니다. 즉 지금 AI 회사들의 데이터센터 투자는 거품이 아니라 향후 5년 수요를 미리 짓는 행위에 가깝다고 봅니다.
이 가설을 검증해주세요. 특히 다음 세 가지를 비교 분석해주세요.
1. AI 글라스의 실제 출시 시점과 예상 보급률. 2. 자율주행 자동차의 에이전트화가 데이터센터 부하에 미치는 영향. 3. IoT 디바이스 에이전트화가 AI Capex에 미치는 시간차.
그리고 이 가설이 맞다면, 한국 코스피의 단기 하락 (이란 전쟁 + 금리 상승)에도 불구하고 AI 관련 자산 비중을 늘려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을 부탁합니다.
엔터.
토큰이 녹기 시작했다.
투자자 성이사는 그동안 그가 만든 투자 대시보드의 다른 탭을 열었다. DC 퇴직연금 리밸런싱. 4주째 미실행 상태였던 그 화면.
채권 비중 -5%. 주식 비중 +5%.
손가락이 매수 버튼 위에 올라갔다.
거실의 침묵. 클로드 코드 모니터의 토큰 표시줄. 시계의 9시 18분.
투자자 성이사는 4주 만인, 내일 매수 버튼을 누르기로 하고 알람을 걸었다.
딸깍.
결정의 무게는 마우스 클릭 한 번이었다. 그러나 그 클릭이 가능해지기까지 4주가 걸렸다. 그 4주 동안 투자자 성이사는 매일 같은 두 메시지 사이에서 흔들렸다. 잃지 마라와 놓치지 마라.
흔들림의 끝에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이유는 시장의 차트가 아니라 식탁 위의 보고서 때문이었다. 성이사의 AI 전환율 보고서. 그 보고서가 보여주는 노동 생산성의 미래. 그것이 결국 투자자 성이사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 다중우주에서 가장 큰 결정은 항상 다른 페르소나의 풍경을 보고 내려진다. 투자자 성이사는 직장인 성이사의 책상을 보고 결정했고, 슈퍼 성이사는 작가 성이사의 새벽을 보고 일찍 일어나고, 작가 성이사는 투자자 성이사의 차트를 보고 글을 쓴다.
다중우주는 네 페르소나가 서로의 풍경을 빌려보며 작동한다.
투자자 성이사는 노트북을 닫지 않은 채 침실로 향했다. 클로드의 분석 답변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다. 그 사이에 자야 했다. 내일 아침 양압기 앱이 보여줄 오늘 밤의 숙면 시간은, 어제보다 30분쯤 더 길 것 같았다.
매수 버튼을 누른 다음 잠은 망설이는 4주의 잠보다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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