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다만 아직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2026. 4. 18. 08:11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민팀장의 이직. 신대리의 출산휴가.

두 사람의 빈자리를 AI가 메꿨다. 업무는 돌아가고 있었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조직이 쓰러지지는 않을 정도로. 위키는 MCP로 연동되었고, 지라 태스크는 자동 취합되었고, 일상적인 보고서는 클선생이 뽑아줬다. 다만 성이사의 일은 늘었다.

결재.

 

과거에는 민팀장 선에서 정리되던 건들이 이제 직접 올라왔다. 구매 승인, 계약 검토, 출장 신청, 예산 배정. 하루에 스무 건씩 쏟아지는 결재 요청은 마치 슬롯머신처럼 끝이 없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사내 커뮤니케이션.

 

팀원들이 다른 부서와의 대면 협의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급격히 늘었다. 과거에는 민팀장이 중간에서 정리를 했다. 민팀장에게는 7년간 쌓아온 사내 권위가 있었다. "민팀장이 그렇게 정리했으면 그런 거지"라는 무언의 합의가 조직 안에 있었다. 하지만 민팀장이 빠진 뒤, 남은 팀원들에게는 그런 권위가 없었다. 같은 말을 해도 민팀장이 하면 결론이 되고, 김과장이 하면 의견이 되는 것이다.

과거의 성이사였다면 이 문제를 외부 인재 영입이나 내부 인재 이동으로 해결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문법이다.

중간관리자를 새로 데려와봐야, 그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AI가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고, 제안까지 하는데, 중간에서 '전달'하는 사람의 가치는 계속 떨어진다. 민팀장의 공백을 사람으로 메우는 것은, 구멍 난 배에 사람을 태우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성이사에게 보고된 미해결 건은 두 건이었다.

첫 번째: 클라우드 서비스 계약 건. AWS에서 구글 클라우드로 일부 서비스를 전환할 것인지, 비용 대비 효율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인프라팀, 개발팀, 대외협력팀, 에이전시 사업본부가 한 달 넘게 커뮤니케이션 중이었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두 번째: 해외 판매 물량 배정 최적화 건. 쇼핑사업팀과 해외마켓 간의 물량 조율. 이것도 몇 주째 제자리.

성이사는 첫 번째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과거의 방식이라면 이랬을 것이다. 팀원들을 불러서 히스토리를 듣는다. 30분. 가설을 세운다. 1시간.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관련 부서에 미팅을 요청한다. 일정 조율 3일. 미팅 진행 2시간. 해당 팀 임원과 추가 협의 1시간. 결론 도출까지 최소 일주일.

성이사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성이사: (팀 슬랙방에) "성이사입니다. 현재 제가 참여하고 있지 않은 사내 슬랙 채널 중, 팀원들이 참여 중인 모든 채널에 저를 추가해 주세요."

잠시 후 김과장이 성이사의 방으로 찾아왔다.

 

김과장: (조심스럽게) "이사님, 다른 팀 사람들이 이사님이 채널에 들어가 있으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습니다. 임원이 옵저버로 있으면 대화 톤이 달라질 수 있어요."

 

성이사: "알아요. 하지만 일단 넣어줘요. 옵저버만 할 테니까."

 

김과장: "…네."

김과장이 나갔다. 성이사의 슬랙에 채널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클라우드서비스논의, #구글클라우드, #AWS, #사내AI도입, #인프라이슈, #개발팀공유. 채널마다 수백 개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사람이 읽으면 하루가 걸릴 양이었다.

성이사는 클로드 코드를 열었다. 슬랙 API를 연동하고, 채널 데이터를 MCP로 가져왔다.

 

성이사: (클로드 코드에 입력) "#클라우드서비스논의, #구글클라우드, #AWS, #사내AI도입 채널의 최근 2개월 대화를 분석해줘. 현재 논의 사항의 핵심 문제점을 정리하고, 블로커가 누구인지, 어디서 의사결정이 멈춰 있는지 파악해줘."

클로드 코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토큰이 녹아내렸다. 무척 많은 양의. 수백 개의 메시지를 읽고, 화자를 식별하고, 논점을 추출하고, 블로커를 특정하는 데 10분이 걸렸다.

결과가 나왔다.

 

클로드 코드 분석 결과:

핵심 맥락 1 — 클라우드 서비스 전환 건 AWS에서 구글 클라우드로 일부 서비스를 전환할 것인가? 비용 절감 효과는 연간 약 8%, 하지만 마이그레이션 리스크와 기존 인프라 호환성 문제가 있음.

블로커: 인프라팀 정부장. 정부장은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음. 슬랙 대화 패턴 분석 결과, 정부장은 양쪽 의견에 "검토해보겠습니다"를 반복하며 결론을 미루고 있음. 우유부단.

핵심 맥락 2 — 사내 AI 도입 건 전직원 478명 중 에이전시 사업본부 312명이 회사 AI 지원금(7:3 비율)으로 클로드와 GPT Pro를 중복 사용. 클로드 맥스 플랜은 광고 운영자동화팀과 개발팀이 주로 사용. API 비용 증가 추세.

블로커: 인프라팀 정부장 + 최이사(재무이사). 최이사가 AI 도구 도입 비용이 과다하다며 축소 지시. 정부장은 최이사의 지시와 현장의 수요 사이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음. 현재 월 AI 비용 약 4,500만 원.

제안: 클로드 엔터프라이즈 도입 시, 사용량 통제를 통해 현재 비용 수준에서 전직원 사용 가능. API 비용 할인도 기대 가능. 이 내용은 대표이사 보고 사안으로 판단됨. 보고서를 작성할까요?

 

성이사는 화면을 바라봤다. 한 달간 네 개 부서가 수백 개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해결하지 못한 문제의 구조가, 10분 만에 정리되어 있었다.

블로커는 정부장이었다.

사람이 이걸 파악하려면 각 채널의 대화를 모두 읽고, 화자들의 입장을 파악하고, 누가 결론을 미루고 있는지 추적해야 한다. 민팀장이 이 일을 해왔다. 탐문하고, 회의하고, 복도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정부장님, 이건 이번 주에 결론 내주셔야 합니다"라고 부드럽게 밀어붙이는 기술. 7년의 경험과 인맥이 필요한 일.

하지만 클로드 코드는 슬랙 대화만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10분 만에.

 

성이사는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인프라팀 정부장에게 슬랙 DM을 보냈다.

 

성이사 → 정부장: "정부장님, 현재 인프라팀·개발팀·대외협력팀·에이전시사업본부가 모두 클라우드 전환 건으로 한 달 넘게 커뮤니케이션 중입니다. 대외협력팀 입장에서는 빠른 결정이 경쟁력입니다. 저희는 계약을 챙겨야 하니, 정부장님께서 차주까지 결론을 내주세요. 추가로 길어질 경우 석대표님 포함 의사결정 회의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석대표를 꺼내는 것은 핵무기를 꺼내는 것과 같다. 실제로 쓸 생각이 없어도, 있다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결정을 촉진한다.

그리고 팀 슬랙방에 공지했다.

 

성이사 → #대외협력팀: "클라우드 건은 제가 추가로 언급하기 전까지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할 필요 없습니다. 정리 중입니다."

한 달간의 슬랙 토론이 한 줄로 종결되었다.

 

두 번째 건. AI 도입.

클로드 코드가 제안한 대로, 엔터프라이즈 도입 시 비용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현재 월 4,500만 원의 AI 비용으로 전직원이 사용할 수 있고, API 비용도 할인 가능하다는 결론.

클로드 코드: "이 내용을 대표이사 보고 자료로 정리할까요?"

성이사: "해줘."

클로드 코드가 한 페이지 제안서를 작성했다. 타이틀: 「현재 비용으로 전직원의 업무 효율을 올릴 수 있는 클로드 엔터프라이즈 도입 제안」. 비용 비교표, 예상 효과, 연간 추산 비용까지.

성이사는 제안서를 1분간 검토했다. 수정할 곳이 없었다. 석대표에게 슬랙으로 보냈다.

한 시간쯤 지났다. 석대표에게 답이 왔다.

 

석대표 → 성이사: "좋네요. 당장 진행하세요."

석대표의 의사결정 속도는 언제나 빠르다.

성이사는 석대표의 메시지를 캡처해서 정부장에게 보냈다.

 

성이사 → 정부장: "사장님이 엔터프라이즈 도입하라고 하네요. 해당 메시지 최이사(재무이사)에게 보여주시고, 기안서 올려주실 때 저는 참조로 넣어주세요."

1분 후 정부장에게 회신이 왔다.

 

정부장 → 성이사: "골치 아팠는데 너무 감사합니다 성이사님 🙏"

 

세 시간.

성이사는 세 시간 만에 사내 커뮤니케이션 두 건을 정리했다. 한 달 넘게 네 개 부서가 수백 개의 슬랙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해결하지 못한 것을.

수많은 슬랙 대화. 등장인물들의 관계. 각 부서의 이해관계. 블로커의 심리. 이 모든 복잡한 것을 성이사가 읽고 분석할 필요가 없었다. 클선생이 다 읽고 정리했다. 남은 것은 액션 배우인 성이사의 역할뿐이었다. 정부장에게 DM을 보내고, 석대표에게 제안서를 올리고, 결과를 전달하는 것.

 

대본은 AI가 썼고, 연기는 내가 했다.

성이사는 모니터를 끄며 생각했다.

 

이번 문제 해결은 혼자만 알기로 하자.

이걸 사람들에게 알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성이사가 AI로 슬랙 대화를 분석해서 블로커를 찾아냈다"는 소식이 퍼지면, 모든 사내 커뮤니케이션이 언제든 임원에 의해 분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 그러면 슬랙에서의 솔직한 대화가 사라지고, 다테마에만 남는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중간관리자들이 자기 역할의 무가치함을 자각하게 된다.

정부장이 한 달간 결론을 못 내린 이유는, 정부장의 역할이 '중간에서 조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AI가 그 조율을 3시간 만에 해버리면, 정부장의 한 달은 뭐였나? 정부장뿐이 아니다. 모든 중간관리자가 같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당신이 한 달간 한 일을 AI가 세 시간 만에 했습니다. 당신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잔인하다. 하지만 시대가 잔인한 것이지, 성이사가 잔인한 것은 아니다.

성이사는 이 사실을 팀원들에게도, 정부장에게도, 석대표에게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이걸 알리면 이번 주부터 TV와 넷플릭스에서 방영될 드라마의 제목이 현실화 된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작가 성이사: (수첩에 적으며) "드라마 제목 좋은데. 시청률 나올 것 같아."

성이사: "실화니까."

작가 성이사: "실화가 가장 무섭지."

 

<성이사가 진정한 사내 MCP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