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리를 건너는 사람, 직장인 성이사의 파인다이닝 인류학

2026. 4. 25. 07:59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오랜만에 황과장과 함께 저녁 미팅이 잡혔다.

상대는 IT 공룡이라 불리는 글로벌 기업 A사. 성이사 회사의 핵심 광고 매체 파트너이자, 영원한 갑. 매년 KPI를 체크당하고, 경쟁사와 비교당하고, "올해는 더 잘해주세요"라는 압박을 받는 관계.

오늘 저녁은 1분기 성과를 축하한다며 A사가 사는 자리. A사에서 성이사 회사 담당인 구실장과 김매니저가 참석한다.

A사가 예약을 하면 와인을 곁들일 수 있는 파인다이닝이다. 정해진 공식이다.

성이사는 회사를 나서며 거울을 한 번 봤다. 넥타이를 만지고, 머리를 정돈하고. 황과장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황과장: "이사님, 오늘 어디예요?"

성이사: "청담동. 이름 외우기 어려운 프렌치."

황과장: (한숨) "또 거기예요…"

성이사: "또 거기야."

택시를 잡았다. 강남 방향. 다리를 건넜다.

 

청담동. 골목 안쪽의 작은 건물. 입구에는 간판도 없이 영어 두 글자만 쓰여 있다. 들어가면 내부는 어둡고 조용하고, 직원들은 속삭이듯 말하고, 의자는 묘하게 앉기 불편하다.

불편함이 곧 격이다. 편하면 격이 떨어진다는 것이 이 세계의 룰이다.

A사의 구실장과 김매니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환한 미소로 성이사와 황과장을 맞이했다.

 

구실장: "성 이사님~ 오랜만이에요. 1분기 너무 잘해주셔서 저희가 한턱 쏘는 자리예요."

성이사: "감사합니다, 구실장님. 부담스럽게 이렇게…"

부담이 안 되는 척, 부담스러운 표정. 직장 생활 15년 차의 표정 연기.

쉐프가 나와서 음식 소개를 시작했다.

 

쉐프: (부드러운 목소리로) "오늘 시작은 노르망디산 굴 위에 유자 그라니타와 캐비어를 올린 아뮤즈 부쉬입니다. 굴의 미네랄과 유자의 산미, 캐비어의 짭조름함이 한 입에 어우러집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오~"

성이사는 핸드폰을 꺼내 음식 사진을 찍었다. 사실 성이사는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다. 어디에 올릴지도 모르는 사진을 찍는 이유는 단 하나, 갑님들의 선택이 탁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와, 이거 사진 좀 남겨야겠네요"라는 말과 함께 찍는 사진은, 음식의 기록이 아니라 충성의 의식이다.

와인이 나왔다. 소믈리에가 잔에 따라줬다. 성이사는 와인잔을 흔들었다. 한 모금. 홀짝.

 

김매니저: "성 이사님은 어떤 와인 좋아하세요?"

성이사의 머릿속에서 알람이 울렸다. 함정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부르고뉴를 좋아합니다"라고 하면 "어느 도멘?"이라는 후속 질문이 온다. "보르도를 좋아합니다"라고 하면 "그랑크뤼 클라세 중에서?"라는 질문이 온다. 답을 모르면 무지가 드러난다. 답을 알아도 그다음 질문이 온다.

가장 안전한 답은 무지를 미덕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성이사: "저는 와인은 잘 몰라서요. 추천해 주세요. 오늘은 김매니저님 픽으로 가시죠."

김매니저: (만족스러운 미소) "제가 좋아하는 부르고뉴 화이트가 있는데…"

미션 완료. 갑님이 추천하게 만들고, 그 추천에 감탄하면 된다.

사실 성이사가 좋아하는 것은 소맥과 고기다. 삼겹살에 소맥. 그것이 진짜 성이사다. 와인잔을 흔드는 이 사내는, 청담동에 들어오는 순간 만들어진 다른 인격이다.

 

식사 중반.

A사의 두 사람은 능숙하게 화제를 운영했다. 본사의 이번 분기 전략. 다른 광고 에이전시들의 동향. 미국에서 시작된 새로운 광고 솔루션. 그리고 은근한 압박.

 

구실장: "올해 한국 시장이 좀 어렵죠. 다른 에이전시들도 비슷하게 고전하고 있어요. 그래도 성 이사님 회사는 매년 성장하시니까…"

성이사의 통역기가 작동했다. 번역: 다른 에이전시들도 비슷하게 못하고 있으니, 너희가 더 잘해야 한다.

성이사: "감사합니다. 저희도 더 노력해야죠."

김매니저: "2분기에는 새로운 캠페인 라인업도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기대가 큽니다." 번역: 2분기 매출 목표를 더 높이세요.

성이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과장이 옆에서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진지한 표정. 갑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받아 적는 모습. 황과장은 진짜 받아 적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 적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성이사는 알고 있다. 이것도 직장 생활 7년 차의 연기.

 

와인이 두 병째 비워질 무렵. 본격적으로 레퍼토리가 시작되었다.

구실장: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제가 미국에서 학교 다닐 때 이런 와인을 자주 마셨거든요.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에서…"

김매니저: "저도 영국 유학 시절에 와인 클래스를 들었는데, 그때 알게 된 게…"

 

성이사는 매번 듣는 레퍼토리였다. 또 시작이구나. 미국 유학 시절의 나파밸리. 영국 유학 시절의 와인 클래스. 호주 워킹 홀리데이의 시드니 펍. 도쿄의 미슐랭 라멘집. 이들의 인생은 GPS가 전 세계에 찍혀 있다.

성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척했다. 와인잔을 천천히 흔들면서. 이 와인잔 흔드는 동작 하나 익히는 데도 5년이 걸렸다.

황과장은 달랐다. 황과장은 진심으로 듣고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마치 다큐멘터리 〈상류사회의 일상〉을 시청하는 시청자처럼.

황과장은 동경하고 있다. 30대 후반의 매니저, 광고 매체사 관리 담당. 글로벌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한다.

성이사는 황과장의 표정을 보면서 약간 안쓰러웠다. 그게 다가 아닌데.

 

저녁 식사가 끝났다. 호구 조사도 끝났다. 이제 헤어질 시간. 그리고 매번 반복되는 그 질문.

구실장: "성 이사님, 어디 사세요?"

성이사: "강북이에요. 다리 건너가야 해요."

김매니저: (살짝 미소) "아, 다리를… 저희는 가까워요. 걸어서 갈 수도 있어요."

구실장: "저는 서초예요."

김매니저: "저는 송파."

매번 같은 패턴이다. 강남, 서초, 송파에 산다는 것을 자랑하는 마지막 의식. 거주지 계급장.

재수탱이들.

 

성이사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정중하게.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 너무 즐거웠습니다. 잘 들어가십시오.

택시를 잡으려고 길에 서 있을 때, 황과장이 말했다.

황과장: "이사님, 저 한잔 더 해도 돼요?"

성이사: "어디서?"

황과장: "근처 맥주집에서요. 가볍게."

성이사는 웃었다. 황과장도 똑같은 마음이구나.

 

근처 맥주집. 어두운 조명. 작은 테이블. 청담동의 파인다이닝과는 정반대의 공간. 성이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생맥주 두 잔. 가볍게 한 잔만 하고 헤어지는 것을 시뮬레이션했다.

황과장: "이사님."

성이사: "응?"

황과장: "쟤네들 왜 이렇게 있는 척하는 거예요? 정말 재수없어요."

성이사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성이사: "오~ 황과장 본심 나오네."

황과장: "솔직히요. 매번 같은 레퍼토리. 유학, 강남, 와인. 다른 이야기는 못 하나봐요."

성이사: "안주 하나 시키자."

황과장: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 얌전 떠느라 배고팠어요."

성이사: "나도 똑같아."

피쉬앤칩스를 시켰다. 맥주를 한 모금 더. 본격적으로 솔직해지는 시간.

 

황과장: "이사님, 진짜 이상한 게요. 쟤네들이랑 저녁 먹고 집에 가면 항상 배고파요. 분명 풀코스로 먹었는데."

성이사: "정확해. 음식이 작잖아. 예쁜데 양은 없고."

황과장: "그게 음식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정서적 허기일까요?"

성이사는 잠시 생각했다.

 

성이사: "정서적 허기 쪽인 것 같아."

황과장: "왜요?"

성이사: "보통 SKY 나온 사람들은 평생 대학 자랑으로 살잖아. 한때 공부 잘했다는 것 가지고 평생을. 근데 저분들은 그것보다 더 갔지. 유학에, 글로벌 IT 회사. 얼마나 자랑하고 싶겠어. 라이프스타일도 거기에 맞춰 꾸미고 싶고."

황과장: "근데 그게 본질을 가리는 거 같아요."

성이사: "정확해. 그런 것들을 빼면 자기 본질에 집중을 못 하지. 연예인이랑 비슷해. 보여주는 삶이잖아. 매일 본인이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어디에 사는 사람으로 보이는지를 신경 써야 하는 삶."

황과장: "잠깐, 이사님 진짜 와인 좋아하세요?"

성이사: (맥주를 들이키며) "내가 좋아하는 건 이거야. 생맥주."

황과장: "그러면 왜…"

성이사: "을이니까."

황과장: "……."

황과장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황과장: "근데 이사님, 들으셨어요? 글로벌 IT 기업들 또 레이오프 한대요. 어떤 회사는 10%."

성이사: "AI 때문에?"

황과장: "네. 우리 석대표님도 그렇지만, 다른 회사들도 만만치 않네요. 거의 다 AI 전환을 명목으로 인력 정리에 들어가고 있어요."

성이사는 맥주잔을 들고 잠시 생각했다.

 

성이사: "그래서 오늘 쟤네들 좀 재수없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

황과장: "왜요?"

성이사: "적어도 아직 AI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하잖아."

황과장: (잠시 멈췄다가) "…아."

성이사: "사람을 만나서 와인 마시고, 헛소리 들어주고, 다리를 건너 가는 거. 이게 아직은 우리의 일이야. 그게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지는 거고."

황과장: "약간 재수없긴 하지만, 그래도 만나는 게 다행이네요. 그리고… 저분들도 언제 레이오프 당할지 모르는데. 어쩌면 상대적으로 우리가 편한 걸까요?"

성이사: "그렇게 생각해."

황과장: "어떻게요?"

성이사: (피식 웃으며)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라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황과장이 웃었다. 진짜 웃음. 청담동 파인다이닝에서 보였던 다큐멘터리 시청자의 표정이 아니라, 30대 후반 직장인의 진짜 표정.

 

황과장: "이사님, 한 잔만 더해요."

성이사: "한 잔만이야. 내일 회의 있어."

황과장: "한 잔만이라뇨, 두 잔."

성이사: "…너 진짜 한 잔만이라고 안 끝내잖아."

황과장: "이사님이 가르쳐주신 거예요. 갑한테는 얌전 떨고, 을끼리는 솔직하게."

성이사: "내가 언제 그렇게 가르쳤어."

황과장: "방금이요."

성이사는 한숨을 쉬며 두 번째 맥주를 시켰다. 두 번째가 세 번째가 될 것이고, 세 번째는 네 번째가 될 것이다. 다리를 건너 강북으로 돌아가는 택시비가 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투자자 성이사가 어디선가 째려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정서적 허기를 채워야 하는 날이다.

파인다이닝의 굴 위에 캐비어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종류의 허기를.

<성이사는 청담동 다이닝바에서 갑들과 한잔 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