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 오피스

2026. 5. 30. 07:52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성이사의 명함 지갑이 어제 비었다.

월요일 아침. 회의실에 들어가기 직전, 정장 안주머니에서 명함 지갑을 꺼내 열었더니 빈 가죽이 보였다. 한 장도 없었다. 어제 빅스의 마츠다 상무 라인 신규 담당자와의 미팅에서 마지막 두 장을 건넸던 것을 잊고 있었다.

 

성이사는 회의실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 이상하다. 명함이 떨어지면 평소처럼 그룹웨어에서 신청하면 되는데.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온 성이사는 그룹웨어를 열었다. 익숙한 화면. 휴가 신청. 결재 라인 점검. 그런데 — 명함 신청 메뉴가 없었다.

스크롤을 위아래로 두 번 더 굴렸다. 없었다.

새로 생긴 메뉴들이 보였다. AI 도구 사용 신청. 전사 클로드 코드 토큰 정산 보고. 워크플로우 실행 로그. 그런데 가장 기본이라 생각했던 명함 신청은 사라져 있었다.

 

성이사는 슬랙을 열어 총무팀 김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성이사: "김팀장님, 명함 신청을 하려는데 그룹웨어에서 명함 신청서가 안 보이네요. 어떻게 신청하면 될까요?"

3분 후 답이 왔다.

 

김팀장: "이사님, 명함 신청은 이제 총무팀 업무지원 슬랙 앱에서 가능합니다. 채널 좌측 Apps 메뉴에서 들어가시면 됩니다."

뒤이어 짧은 메시지가 더 따라왔다.

 

김팀장: "지난주부터 모든 총무 업무가 슬랙 앱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못 받으셨다면 사내 공지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성이사는 안 받았다고 답하지 않았다. 받았는데 왜 안 봤지라는 답을 받기보다, 그런가요, 한번 해보겠습니다가 더 빠른 답이었다.

 

슬랙 앱 메뉴를 클릭했다.

작은 키오스크 같은 화면이 떴다. 메뉴 목록이 줄지어 있었다.

  • PC 구매/수리
  • 사무용품 요청
  • 건물 지원 (회의실 예약 외)
  • 출입증 재발급
  • 명함 신청
  • 사내 비품 분실 신고
  • 기타 요청

성이사는 명함 신청을 클릭했다.

워크플로우가 펼쳐졌다. 자동으로 사내 디렉토리에서 정보를 불러와 다섯 칸이 미리 채워져 있었다.

  • 국문 이름: 성동훈
  • 직위: 대외협력팀 이사
  • 전화번호: 자동 채움
  • 영문 이름: 자동 채움
  • 이메일 주소: 자동 채움

화면 아래에 한 줄.

 

위 정보로 명함 200장을 신청하시겠습니까? 차주 수요일 일괄 배송 예정입니다.

성이사는 확인을 클릭했다.

신청 완료. 슬랙 알림이 차주 배송일에 자동으로 전송됩니다.

 

5분이었다.

5분 전까지 성이사는 그룹웨어 화면 앞에서 왜 메뉴가 없지를 고민했다. 5분 후 명함이 신청되어 있었다. 김팀장과의 대화는 없었다. 결재 라인도 없었다. 승인 대기도 없었다. 그냥 키오스크 앞에서 음료 한 잔을 주문하는 것처럼, 일이 처리되어 있었다.

성이사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상한 감각이 명치에 도착했다. 동전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거대한 카페의 끝줄에 서 있는 손님의 감각에 가까웠다.

 

성이사는 그 감각의 정체를 잠시 생각했다.

지난주에는 빅스와의 계약 검토를 했다. 평소라면 법무팀 회의실로 가서 두 시간 동안 조항을 함께 짚었을 텐데, 이번에는 다른 방식이었다.

클로드에 계약서 PDF를 업로드. 5분 안에 위험 조항 6건 / 모호 표현 12건 / 누락 사항 3건 정리. 그 정리본을 슬랙 워크플로우로 법무팀 검토 요청 앱에 자동 전송. 진이사의 법무팀에서 4시간 후에 AI 분석 검증 완료, 추가 검토 필요 항목 2건이라는 답변이 슬랙으로 도착. 그 답변에서 추가 검토 요청을 다시 클릭. 이번에는 진이사 본인이 직접 답을 보내왔다. 세부 조정 끝. 계약서 최종본 첨부.

이 모든 과정에서 회의실 미팅에 소요된 시간은 0분이었다.

성이사가 마지막으로 진이사의 얼굴을 본 게 언제였더라. 한 달 전 임원 회의 자리에서. 그 후로는 슬랙 메시지와 워크플로우 알림으로만 만났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변화는 회사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거의 모든 부서가 자기만의 슬랙 앱을 만들기 시작했다.

  • 마케팅팀 자료 요청 — 자료 종류, 사용 목적, 필요 시점만 선택
  • 디자인팀 의뢰 — 사이즈, 톤, 데드라인 입력
  • 재무팀 비용 정산 — 영수증 사진 첨부, 항목 분류 자동
  • HR 인사 발령 확인 — 본인 인사 기록 조회

각 부서가 카운터가 되고, 각 임원과 직원이 키오스크의 손님이 되었다.

성이사는 며칠 전 강남의 한 카페에서 본 풍경을 떠올렸다. 카운터 앞에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두 대의 키오스크가 있었고, 손님들은 그 앞에서 음료를 주문했다. 주문한 음료가 준비되면 진동벨로 알려드립니다. 진동벨이 띵 울리면 손님이 직접 카운터로 가서 음료를 가져갔다. 카페 직원과 손님 사이의 대화는 거의 없었다.

석테크홀딩스의 회사도 비슷한 풍경으로 가고 있었다. 각 부서의 슬랙 앱이 키오스크였고, 임원과 직원들이 그 앞에서 주문을 했다.

 

성이사가 이 풍경을 보며 느낀 것은 조직도의 변화였다.

기존의 한국 회사 메신저는 조직도가 있는 메신저였다. 누가 누구의 위에 있고, 누가 어느 본부 소속이고, 누가 누구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지가 화면 안에 위계로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메신저를 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매번 확인할 수 있었다.

슬랙은 다르다. 슬랙에는 위계가 없다. 채널이 있고, 그룹이 있고, 다이렉트 메시지가 있고, 앱이 있을 뿐이다. 조직도는 사내 디렉토리 깊은 곳에 데이터로 묻혀 있을 뿐, 화면 위에 그림으로 떠 있지 않다.

물론 사람들은 여전히 이사님, 팀장님, 과장님이라는 호칭을 쓴다. 호칭은 위계의 마지막 유물이다. 그러나 슬랙 안에서 실제로 일을 해보면, 호칭이 작동하는 자리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슬랙 워크플로우에서는 임원 성이사가 총무팀 사원 신청자보다 우선시되지 않는다. 둘 다 명함 신청 요청자일 뿐이다. 슬랙 앱 안에서는 모두가 같은 키오스크 앞의 같은 손님이다.

성이사는 그 풍경의 본질을 한 줄로 정리했다.

같은 회사일 뿐, 각자 개인 사업자처럼 슬랙에 모여 있는 거대한 공유 오피스.

 

이 풍경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이사 안에서 무언가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업무는 슬랙으로 키오스크 형식으로 처리한다. 업무의 해결 방안과 전문성은 마크다운 파일 기반의 클로드 코드로 각자 정리한다. 그렇다면 임원은 무엇을 하는가.

성이사는 자기에게 물었다. 내가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가.

  • 카와무라상의 인사평가 — 클로드 코드 5분
  • 빅스 계약서 검토 — 클로드 + 진이사 워크플로우
  • A사와의 분기 KPI 점검 자료 — 클로드 코드 + 슬랙 자동 전송
  • 마케팅팀 요청 자료 — 슬랙 앱 클릭 한 번
  • 명함 신청 — 슬랙 앱 클릭 한 번

이 중 임원이 직접 한 일은 무엇이었나.

확인. 클릭. 승인. 검토.

성이사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정확한 결론에 도달했다.

 

임원은 정류장이다.

업무가 와서 잠시 머무는 곳. 확인을 받는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난 14년간 성이사가 임원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했는지 — 결정권자, 사업 전략의 설계자, 조직의 리더 — 모두가 이 한 줄로 정리되어 있었다. 정류장. 더 정확히는 클릭이 한 번 더 거쳐가는 정류장.

 

이 깨달음이 명치에 새로운 무게로 자리 잡았다. 동전도, 카페 끝줄의 감각도 아니었다. 역할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순간의 헛헛함에 더 가까웠다.

성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비실에 가서 따뜻한 차 한 잔. 그 차 한 잔의 시간 정도가, 오늘 본 풍경을 정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의식이 될 것 같았다.

탕비실 가는 길. 회의실 4호 앞을 지나갔다.

회의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 틈으로 두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김부사장: "정실장, 잠깐 제 말을 들어봐요."

 

정실장: "네."

 

성이사는 한 발자국 멈췄다. 그냥 지나가도 됐는데, 두 사람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른 결이 느껴졌다.

 

김부사장: "미래기획실에서 회사 데이터 요청을 다 슬랙 앱과 슬랙 채널로 처리하라고 했죠?"

정실장: "네. 그렇습니다."

김부사장: "이런 건 — 회의를 하고 얼굴을 보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정실장의 목소리가 잠깐 멎었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성이사가 평소 알던 동그랗고 유순한 인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미세하게 날이 선 톤이었다.

 

정실장: "김부사장님, 저희가 슬랙과 워크플로우 기반으로 업무를 진행하고, 기존 업무도 모두 AI화로 진행하라는 게 대표님 지시 사항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가는 게 맞고, 불필요한 회의는 줄어드는 게 맞습니다."

성이사의 발이 회의실 문 앞에서 멈췄다.

 

회의실 안에서 버럭 하는 소리가 났다. 김부사장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김부사장: "지금 제가 불필요한 회의를 한다는 겁니까?"

펜의 끝을 테이블에 두 번 두드리는 소리. 김부사장의 긴장 신호. 평소 회의에서는 두 번이 한계인데, 이번에는 네 번이 연이어 났다.

 

김부사장: "정실장, 제가 요청한 자료가 단순 자료가 아니에요. 회사 전략 IR 자료입니다. 우리 회사 투자사이자 광고주에게 브리핑할 자료. 이런 건 얼굴을 보고, 상황을 함께 짚어보고, 그 다음에 요청하는 게 맞지 않나요?"

성이사는 회의실 문 앞에서 완전히 멈췄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실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더 차분했지만 더 단단했다.

 

정실장: "김부사장님."

한 박자.

정실장: "필요하신 내용을 말 대신 슬랙 앱에 남겨주시면, 6하 원칙에 의거한 명확한 정리가 됩니다. 저희도 그 내용을 기반으로 업무하기 더 쉽고, 부사장님도 원하는 자료를 더 정확히 얻으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 시간도 절약되고, 대표님 방침에도 맞지 않을까요?"

회의실 안의 공기가 한 번 더 무거워지는 것이  문 밖에서도 느껴졌다.

 

성이사는 이 풍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김부사장의 분노는 정실장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 분노는 시대의 흐름에 대한 것이었다.

김부사장은 50대 중반. 광고 에이전시 부문장. 그가 이 회사에서 임원 자리까지 올라온 방식은 — 회의실에서 얼굴을 보고, 와인을 마시며, 신뢰를 쌓고, 전략을 짜는 방식이었다. 그것이 그의 경력의 무기였다. 그 무기가 — 슬랙 앱과 워크플로우로 대체되고 있었다.

정실장은 40대 초반. 미래기획실장. 클로드 코드와 MCP로 전사 실시간 대시보드를 2주 만에 구축한 사람. 그녀의 무기는 데이터와 자동화였다. 그녀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언쟁은 AI 시대의 두 세대 간 충돌이었다. 김부사장은 자기 세대의 무기를 지키려 했고, 정실장은 새 세대의 무기를 정착시키려 했다.

 

그 순간. 회의실 문이 조금 더 열렸다. 김부사장이 성이사를 알아본 것이다.

 

김부사장: (약간 안도한 목소리로) "어, 성이사님. 잠깐 들어와 봐요. 우리 의견이 좀 갈리는데…"

성이사는 회의실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정실장도 성이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세 사람의 시선이 회의실 안에서 한 번 교차했다.

김부사장의 표정: 성이사님, 같은 50대 임원이잖아. 내 편을 들어줘.

정실장의 표정: 성이사님, 책사 라인의 일원으로서 합리적 판단을 해주세요.

두 사람 모두에게 — 성이사가 자기 편을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성이사는 잠시 회의실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하얗게 켜져 있었다. 평소 회의 때는 신경 쓰지 않던 그 빛이, 이상하게 오늘은 너무 밝게 느껴졌다.

성이사는 입을 열었다.

 

성이사: "음… 이건 좀 애매한데, 대표님과도 상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 박자.

성이사: "제가 만들까요? 대표이사 분쟁조정 슬랙 요청 앱. ㅎㅎㅎ"

농담이었다. 농담이라는 신호로 ㅎㅎㅎ를 끝에 붙였다.

김부사장이 잠깐 헛웃음을 흘렸다. 정실장은 입꼬리만 한 번 미세하게 움직였다. 둘 다 완전히 풀린 표정은 아니었지만, 회의실 안의 공기가 한 톤 가벼워졌다.

성이사는 그 순간 회의실 문을 천천히 닫으며 자리를 비웠다. 딸깍.

 

자리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성이사는 자기 행동을 정리했다.

오늘 자기가 한 일은 책임과 판단을 석대표에게 미룬 것이었다.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양쪽 중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다. 그저 최종 결정권자에게 공을 넘긴 것뿐이었다.

이것이 오늘 새로 정의한 임원의 정확한 역할이었다. 정류장. 의견이 오면 — 대표에게 다음 정거장으로 넘겨주는 정류장.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합리화냐 인간적이냐. AI로 판단 가능한가 아니면 석대표에게 맡길 것인가.

 

성이사 안에서 네 개의 질문이 굴러갔다. 그러나 어느 질문에도 직접 답하지 않았다. 모든 답을 위로 미루는 것이 오늘의 임원이 가진 가장 합리적인 동작이었다.

성이사는 자리에 돌아와 다시 클로드 코드를 켰다. 토큰이 녹기 시작했다.

오늘 임원 회의 자리에서  두 임원의 언쟁 사이에서 자기가 어떻게 답을 회피했는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임원은 정류장이다. 그리고 그 정류장도, 곧 자동화될지 모른다.

토큰이 계속 녹았다. 정류장의 일을 다른 정류장이 정리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