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의 ASI 시대

2026. 5. 30. 08:01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아침에 갓 구운 크로와상과 커피, 5,000토큰입니다. 지불하시겠습니까?

투자자 성이사는 지불한다고 음성으로 답했다.

 

지불 완료. 곧이어 주문된 커피가 제조됩니다. 대기 장소에서 받아가세요.

스마트 글라스 우측 상단에 결제 알림이 작은 글씨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카페 매장의 풍경이 글라스 너머로 증강 현실 레이어로 보였다. 카운터에는 사람이 없었다. 진동벨도 없었다. 음료가 준비되면 글라스에 알림이 뜨면 그만이었다.

투자자 성이사는 크로와상이 든 종이봉투와 커피를 받아 매장을 나왔다.

매장 앞 도로에 자율주행차가 조용히 서 있었다. 차창에 글라스를 통해 Sung이라는 이름이 떴다. 본인 인증 완료.

 

여의도까지 15,000토큰. 승인하시겠습니까?

투자자 성이사는 손목 심박 센서를 짧게 두 번 두드렸다. 글라스 안의 승인 버튼이 클릭되었다. 자율주행차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이것이 ASI 시대의 일상이었다.

AGI를 넘어 ASI(Artificial Super Intelligence) 시대. 모든 자본과 소비가 AI 인프라 안에서 일어났다. 화폐는 토큰이었다. 사람들은 통신사를 선택하듯이 ASI 회사를 선택했고, 각 ASI 회사는 매월 기본 토큰을 제공했다.

투자자 성이사는 오푸스 사의 가입자였다. 매월 300만 토큰 기본 제공. 거기에 성이사가 매일 제공하는 데이터 수익이 추가로 들어왔다.

  • 슈퍼 성이사의 한강 러닝 신체 데이터 — 월 60만 토큰
  • 작가 성이사의 모임 후기 콘텐츠 데이터 — 월 80만 토큰
  • 직장인 성이사의 회의 패턴 데이터 — 월 40만 토큰
  • 투자자 성이사 본인의 시장 판단 데이터 — 월 20만 토큰

합 200만 토큰. ASI 회사에 데이터를 제공하고 받는 수익. 기본 300만 + 추가 200만 = 매월 500만 토큰.

과거 시대로 환산하면 — 월급 500만 원 수준의 임금 소득과 비슷한 규모였다.

투자자 성이사의 와이프도 같은 오푸스 가입자였다. 기본 300만 토큰. 두 사람 합산 800만 토큰이 매월 가족의 기본 자원이었다.

 

자율주행차 안에서 투자자 성이사는 좌석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차창 밖. ASI 시대의 도시 풍경이 흘러갔다. 거리 위에 드론들이 정연한 격자 패턴으로 떠 있었다. 자율주행차들이 신호등 없이 서로 교신하며 매끄럽게 교차로를 지나갔다. 한 집 건너 한 집의 베란다에  피지컬 로봇이 빨래를 널거나 화분에 물을 주는 모습이 보였다.

피지컬 로봇은 가구당 1대가 표준이었다. 청소, 빨래, 요리 보조, 식기 세척. 인간이 하던 가사 노동의 80%를 처리했다. 사용료는 매월 80만 토큰. 가족의 800만 토큰 중 10%가 피지컬 로봇 임대료로 빠져나갔다.

식료품과 일상 소비품 200만 토큰. 주택 관리비, 에너지비, 데이터 인프라 사용료 250만 토큰. 이동 (자율주행차 / 대중교통 글라스 결제) 100만 토큰. 의료 (글라스 기반 원격 진료, 약 배송) 70만 토큰. 교육 (자녀 ASI 학습 콘텐츠 구독) 80만 토큰. 기타 40만 토큰.

총 합계 매월 800만 토큰. 정확히 가족의 기본 자원과 일치했다.

토큰이 매달 모자라는 가족도 많았다. 정해진 규모 안에서 소비하는 토큰보다 — 여전히 인간의 욕망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투자자 성이사는 예외에 가까웠다.

ASI 회사로부터 받는 토큰 외에도 — 그는 기존 투자금 전액을 ASI 회사에 재투자했다. ETF 시절 모은 자산, DC 퇴직연금, ISA, IRP. 모두를 ASI 회사 주식과 채권으로 전환했다. 배당이 매월 별도로 들어왔다. 그러나 투자자 성이사는 그 배당을 — 생활비로 쓰지 않고 전액 재투자했다.

복리는 ASI 시대에도 무자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본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매월 들어오는 배당이 800만 토큰의 기본 자원을 훌쩍 넘는 수준으로 자라고 있었다.

투자자 성이사는 경제적 자유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그 자유의 정점에서, 이상하게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과거 자본주의 시대의 괴물에게는, 지금의 ASI 세상이 여전히 낯설었다. 토큰으로 모든 것이 결제되고, 데이터로 모든 것이 환산되고, AI가 모든 것을 추천하는 이 시대 투자자 성이사는 살아남았다기보다 잘 적응한 외계인에 가까웠다.

 

자율주행차가 여의도에 도착했다. 투자자 모임 장소.

차에서 내리는 순간, 글라스에 알림이 떴다.

 

직장인 성이사로부터 예약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투자자 성이사는 잠시 멈췄다. 직장인 성이사가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 오랜만의 사건이었다. ASI 시대에 직장인 성이사는 역할이 거의 없어진 페르소나였기 때문이다.

회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임원의 자리는 사라졌다. 모든 결정이 AI 에이전트들의 협업으로 처리되었다. 임원이 정류장 역할조차 필요하지 않은 시대였다. 직장인 성이사는 지난 몇 년 동안 점점 더 작아져 왔다. 출근할 곳도 없었다. 보고할 자리도 없었다. 존재감이 점점 사라져 갔다.

투자자 성이사는 글라스의 메시지를 열었다.

 

직장인 성이사:

모두에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

나는 이 다중우주에서 더 이상 역할이 없는 사람입니다. 회사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임원의 자리는 사라졌습니다. 나는 이제 어디에도 출근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보고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나에게 결재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슬랙 키오스크 시대였습니다. 임원은 정류장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다음에는 AI 에이전트 시대가 왔습니다. 정류장조차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SI 시대입니다. 정류장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다중우주에서 나의 역할이 없다면, 나는 더 이상 다중우주의 일원이 아닙니다. 추억을 정리하고, 나는 떠나려 합니다.

고맙다, 20년의 회사 생활. 고맙다, 그동안 함께 다중우주를 지탱한 셋.

— 직장인 성이사.

 

투자자 성이사는 글라스를 한참 동안 그대로 두었다.

여의도 빌딩 숲 사이로 햇볕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그 빛이 글라스의 메시지 화면에 반사되어 작은 빛 줄기가 되었다.

투자자 성이사의 명치에 익숙한 동전이 도착했다. 오래전 그 여름의 인사발령 직후 처음 만났던 그 동전. 역할이 사라진 사람의 명치에 얹히는 그 동전.

이번에는 그 동전이 자기 명치가 아니라 다중우주 전체의 명치에 얹혀 있는 것 같았다.

 

직장인 성이사가 떠난다면.

그 다음은 누구일까.

투자자 성이사 본인의 차례도 곧 오지 않을까.

경제적 자유가 완성된 시점에서, 투자자 성이사의 역할도 사실상 끝에 가까워져 있었다. 복리는 그가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굴러갔다. ASI 회사는 그의 자산을 알아서 운용해주었다. 그가 판단을 내릴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중우주에 남는 것은 누구일까.

슈퍼 성이사. 매일 한강을 달리는 사람. ASI 시대에도 몸은 직접 움직여야 하는 사람.

작가 성이사. 주말마다 글을 쓰는 사람. ASI 시대에도 해석은 사람이 해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

이 둘은 대체되지 않는 페르소나들이었다. 슈퍼는 몸 자체가 역할이고, 작가는 해석 자체가 역할이었다.

투자자 성이사 안에서 기묘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렇다면 나와 직장인 성이사는 사라지고, 저 농땡이 둘만 살아남는다는 건가.

 

평생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본을 굴리고, 누구보다 불안하게 시장을 봤던 사람이 — 사라진다. 그리고 매일 한강을 놀러 다니는 슈퍼와, 주말마다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쓰는 작가가 남는다.

억울했다.

 

분노가 화병처럼 명치에서 가슴으로 올라왔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지러웠다. 땀이 흘렀다.

더위.

더위가 갑자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여의도의 햇볕이 글라스를 뚫고 그의 얼굴을 태우는 것 같았다.

투자자 성이사는 손으로 글라스를 벗으려 했다. 손가락이 글라스 가장자리에 닿지 않았다. 더 더위가 밀려왔다.

눈이 떠졌다.

 

거실 소파였다.

투자자 성이사의 등은 땀에 젖어 있었다. 거실 시계가 오후 3시 47분. 한낮의 햇볕이 베란다 슬라이딩 도어를 뚫고 거실 카펫 위에 길게 떨어져 있었다.

손에는 글라스가 아니라 맥주 캔이 들려 있었다. 절반쯤 마시다 잠든 모양이었다. 캔의 결로가 손바닥에 차갑게 남아 있었다.

꿈이었다.

ASI 시대도, 토큰도, 자율주행차도, 피지컬 로봇도, 직장인 성이사의 작별 인사도 모두 꿈이었다.

투자자 성이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다행이다. 꿈이어서 다행이다.

이 안도가 그의 첫 감정이었다.

 

그러나 안도 다음에 도착한 감정은, 안도가 아니었다.

투자자 성이사는 일어나 거실 식탁으로 갔다. 노트북을 폈다. 빈 메모장을 열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멎었다.

꿈이었다. 그런데 꿈이 전부 꿈은 아니다.

지금도 회사에서는 슬랙 키오스크가 생기고 있다. 임원이 정류장이라는 깨달음이 오늘 직장인 성이사를 흔들었다. AI 에이전트가 매월 더 깊이 회사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토큰 결제는 아직 아니지만, 클로드 코드의 토큰 잔량이 매일 가족의 새로운 자산처럼 굴러간다.

꿈에서 본 풍경은 현재의 풍경을 한 단계 더 밀어붙인 미래일 뿐이었다. 환상이 아니었다. 가속된 현실에 가까웠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직장인 성이사가 다중우주에 작별을 고했다는 그 메시지의 정서가, 깨어난 후에도 거실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꿈은 끝났지만, 그 그림자는 거실 카펫 위의 햇볕처럼 길게 누워 있었다.

 

투자자 성이사는 노트북에 짧은 메모를 남겼다.

 

직장인 성이사가 떠나는 꿈을 꾸었다.

작별 인사가 너무 또렷해서, 깨어난 후에도 그 인사가 거실에 남아 있다.

작가 성이사에게 이 꿈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쩌면 그가 이 상실감을 글로 정리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저장. Ctrl + S.

 

투자자 성이사는 노트북을 닫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거실 한쪽 모니터의 클로드 코드 토큰 잔량 표시줄이 오늘도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꿈은 사라졌지만, 토큰은 계속 굴러갔다.

그것이 깨어난 후의 다중우주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가장 정직한 증거였다.

<투자자 성이사의 미래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