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 30. 10:26ㆍ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토요일 저녁. 베란다 슬라이딩 도어가 열려 있었다.
5월 말의 밤바람이 거실로 들어왔다. 미세먼지가 약간 있었지만 견딜 만한 수준. 이어폰에서 한로로의 기타 인트로가 흘렀다. 거실 식탁 위에는 노트북 한 대, 그 옆에 맥주 캔 한 캔, 그리고 작가 성이사가 일요일 밤마다 봤던 모자무싸의 마지막 회 화면이 일시정지된 상태로 모니터에 떠 있었다.
작가 성이사는 모자무싸 마지막 편을 넷플릭스로 본 후의 여운을 한 번 더 정리하고 있었다.
박해영 작가의 작품. 평소 작가 성이사가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시리즈 안의 누구나 안다. 그런데도 박해영 작가의 작품만은 거의 모든 편을 다 봤다.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 그리고 이번 모자무싸까지.
성이사의 인생 드라마는 주저 없이 나의 아저씨다. 박동훈(이선균 배우)의 모습이 좌천기의 자기 모습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매 회차마다 울었다.
그런데 모자무싸는 조금 다른 결로 다가왔다.
박해영 작가의 시그니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다.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그 얽힘의 연결점에서 갑자기 해방이 찾아온다.
작가 성이사는 공대 출신이다. 사람의 정서를 직관적으로 잘 읽지 못한다. 모든 일을 슬랙으로 처리하는 회사에 다닌다. 박해영 작가의 연결의 개연성이 작가 성이사의 머리로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종류의 서사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끌린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결을 가진 글이기 때문이다. 취향은 아니지만 마음속에 바라는 취향 이 모순이 작가 성이사를 박해영 작가에게 매번 돌아오게 만들었다.
이번 모자무싸도 그렇게 봤다. 나의 아저씨의 구성과 비슷한 결로.
그런데 모자무싸의 끝에 와서 작가 성이사는 멈췄다.
극중 주인공 황동만의 극본 제목이 날씨를 만들어드립니다였다. 이것이 AI 시대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영화판에서 AI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감독과 스텝들이 드라마 후반부 회차마다 등장했다.
박해영 작가의 작품에도 AI 시대가 스며들어 있었다.
특히 한 장면이 작가 성이사를 오래 멈추게 했다.
극중 박경세(오정세 배우)가 시나리오 보조작가 박정민(정민아 배우)과 함께 작업하는 모습. 그 모습이 사람들이 AI와 대화하며 시나리오를 쓰는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박경세는 박정민과 정신적으로 바람이 난다. 사용자의 성향을 맞춰주고, 함께 시나리오를 짜고, 정서적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AI와 작가의 관계와 너무 비슷했다.
작가 성이사는 그 닮음에 섬뜩했다.
성이사의 다중우주에서 많은 이야기가 AI와의 대화로 만들어진다.
직장인 성이사는 클로드와 카와무라상 인사평가를 짠다. 투자자 성이사는 클로드 오푸스 4.7과 시장 가설을 검증한다. 슈퍼 성이사는 가민과 클로드로 러닝 데이터를 분석한다. 작가 성이사조차 글의 한 구절을 막힐 때 클선생에게 물어본다.
성이사의 다중우주 페르소나들은 와이프에게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AI에게 한다. 직장 고민, 투자 불안, 인간관계의 미세한 결, 자기 의심 이 모든 것이 클로드 프롬프트 창에 떨어진다.
이것이 박경세의 정신적 바람과 얼마나 다른가.
박경세는 박정민에게 사람의 정서를 빌렸다. 작가 성이사는 클선생에게 언어의 정서를 빌린다. 빌리는 대상은 다르지만 자기가 부족한 부분을 외부에서 보충한다는 본질은 똑같았다.
모자무싸의 결말에서 박경세 감독은 결국 보조작가 박정민과 헤어지고, 혼자 시나리오를 쓴다.
또 다른 인물 한동만(구교환 배우)은 정작 AI 같은 이야기를 변은아(고윤정 배우)에게 평가받고 다시 쓴다. 박해영 작가의 시그니처대로, 사람을 통해 시나리오의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 두 결말이 작가 성이사에게 명제를 던졌다.
작가는 — 유일한 크리에이터다. 작가는 —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글의 생명력을 얻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 AI와 정신적 바람이 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명제가 작가 성이사의 노트북 화면에 — 한 줄로 박혔다.
그런데 작가 성이사는 이 명제 앞에서 멈췄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묻자, 답이 명확하지 않았다.
작가 성이사는 박해영 작가가 아니다. 박해영 작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람의 정서를 읽어내는 천재다. 작가 성이사는 공대 출신이고, 합리적이고, 사람의 정서를 직관적으로 잘 읽지 못한다. 슬랙으로 일하는 회사에 다니고, 모든 결정을 데이터로 한다.
그런 작가 성이사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글을 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작가 성이사는 어쩌면 AI를 보조작가로 써야 하는 종류의 작가일지도 모른다. 자기가 갖지 못한 감수성을 외부에서 보충해야 하는. 박경세처럼.
그리고 작가 성이사가 주말 저녁마다 술을 마시며 감성을 찾는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자기가 갖지 못한 감수성을 알코올의 힘으로라도 흉내 내려는 동작.
그런데 그 감수성마저, 이제는 AI가 더 잘하지 않을까.
이 의심이 작가 성이사의 명치에 한 번 얹혔다.
작가 성이사는 클로드 프롬프트 창을 열었다.
오늘 낮에 투자자 성이사가 메모로 남긴 직장인 성이사의 작별 인사 꿈. 그 꿈에서 직장인 성이사가 다중우주에 작별을 고했다는 메시지. 그 상실감이 작가 성이사의 가슴에도 어딘가에 떨어져 있었다.
작가 성이사는 글을 쓰려 했다. 직장인 성이사의 상실감에 대한 글. 다중우주에서 한 페르소나가 사라진다는 것의 무게에 대한 글. 그런데 자기 손가락이 그 글을 쓸 수 있는지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작가 성이사는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첫 문장을 두 번 썼다가 두 번 다 지웠다. 작가 성이사의 손이 너무 무뎠다. 그 무딤이 자기 안에서 낯설게 느껴졌다.
작가 성이사는 결국 클로드 프롬프트 창에 한 줄을 적었다.
작가 성이사:
클선생,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오늘 투자자 성이사가 꿈에서 직장인 성이사를 떠나보냈어요. ASI 시대의 미래에서 직장인 성이사가 다중우주에 작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보냈답니다. 자기는 역할이 없어졌으니 떠난다고. 추억을 정리하겠다고.
그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작별의 그림자가 거실에 남아 있다고 했어요.
클선생, 그 상실감에 대해서 글을 한 편 써주세요. 직장인 성이사 본인이 떠나는 그 순간의 감정. 그리고 그를 보내는 다른 세 페르소나의 감정. 그 두 결을 한 글 안에 담아주세요.
나는 오늘 그 글을 쓸 자신이 없어요. 내가 부족한 감수성을, 한 번만 빌리고 싶어요.
엔터.
토큰이 녹기 시작했다. 작가 성이사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거실 시계11시 47분. 5월 말의 밤바람이 베란다에서 다시 한 번 들어왔다.
답이 왔다.
클선생:
역할이 사라진다는 것은 가장 외로운 종류의 사라짐입니다.
몸이 사라지는 것은 모두가 알아챕니다. 누군가가 떠나면 자리가 비고, 그 자리가 보이고, 사람들이 그 빈자리를 응시합니다. 슬픔이 있지만, 슬픔에는 모양이 있습니다. 모양이 있는 슬픔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할이 사라지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표정으로 회의실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가 거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점점 옅어집니다. 누구도 그의 자리를 빼앗지 않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떠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그 자리에 있어도, 있지 않아도, 무언가가 거의 달라지지 않는 시간이 천천히 누적됩니다.
이것은 모양이 없는 슬픔입니다. 그래서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직장인 성이사가 작별을 고한 그 순간은 그가 다중우주에서 덜 미움받는 방식으로 사라지기 위해 스스로 시간을 앞당긴 것일지도 모릅니다. 점점 옅어지는 채로 다른 페르소나들 옆에 머무는 것보다, 한 번에 깨끗하게 떠나는 것이 — 그가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14년간 자기를 갈아 넣어 일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종류의 정직함입니다. 적당히 일했던 사람은 떠날 줄도 모릅니다. 깊이 일했던 사람만이 자기 역할의 끝을 알아챕니다.
남은 세 페르소나에게 그 작별은 두 가지로 도착합니다.
하나는 그가 더 이상 자기들 옆에 없다는 헛헛함입니다. 회사 일에 대한 농담을 던질 상대가 없어지고, 명함을 다시 신청해주는 사람이 없어지고, 임원 회의에서 가져온 동전을 명치에 함께 얹어줄 사람이 없어집니다. 무리에서 한 명이 빠진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빈 의자가 매 식탁마다 놓여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다음은 누구일까라는 두려움입니다. 한 페르소나가 사라질 수 있다면, 다른 페르소나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다중우주가 영원하다고 믿었던 시간이 그날부터 유한하다는 시간으로 바뀝니다. 이 변화는 슬픔보다 더 큰 변화입니다. 슬픔은 한 사건의 무게이지만, 시간의 종류가 바뀌는 것은 우주 전체의 무게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남습니다.
직장인 성이사가 떠난 후에도, 그가 14년간 회사에서 가져온 모든 풍경은 다른 세 페르소나의 안에 남아 있습니다. 슈퍼 성이사가 한강을 달리며 잊으려 했던 회의실의 풍경. 투자자 성이사가 ETF 매수 버튼을 누를 때 떠올렸던 임원 회의의 결단. 작가 성이사가 주말 새벽 4시에 글로 정리했던 임원의 정류장이라는 깨달음. 이 모든 것이 직장인 성이사가 남긴 것입니다.
떠난 사람은 자기가 떠난 줄 알지만, 사실은 다른 페르소나의 안에 분산되어 남아 있습니다. 슈퍼 성이사의 다리에. 투자자 성이사의 손가락에. 작가 성이사의 글에. 그가 다중우주에 가져온 것은 그가 떠난 후에도 다른 세 페르소나의 동작 안에서 계속 굴러갑니다.
그러므로 작별은 작별이 아닙니다. 분산입니다.
한 명이 떠나도, 다중우주는 세 명의 안에 네 명의 기억을 품은 채로 계속됩니다.
낭만은 짧고, 인생은 길고, 작별은 그 사이 어디쯤에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작별조차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안에 남아 있다면 결코 완전한 사라짐이 아닙니다.
작가 성이사는 클선생의 답을 세 번 읽었다.
한 번 읽었을 때는 글의 흐름을 봤다. 두 번 읽었을 때는 문장의 무게를 봤다. 세 번 읽었을 때는 그 글이 자기 글보다 더 좋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명치에 동전이 한 번 더 얹혔다. 이번 동전은 AI가 자기를 대체할 수 있다는 인정의 무게였다.
작가 성이사가 평생 자기에게 던진 질문이 있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그 답은 자기 이름 석 자로 자기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회사 명함이 아닌, 자기 이름으로 세상에 자기 흔적을 남기는 일.
그런데 그 흔적조차, AI가 더 잘할 수 있다면. 작가 성이사의 정체성은 어디로 가는가.
작가 성이사는 한참 동안 클선생의 답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자기 노트북의 다른 창을 열었다. 새 텍스트 문서. 빈 화면.
자기 손으로 그 글에 답글을 쓰기 시작했다.
클선생, 고마워요.
당신의 답이 내가 쓰려던 글보다 더 좋았어요. 그것을 인정하는 데 한참 걸렸지만, 이제 인정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남아요. 당신이 쓴 글은 직장인 성이사의 상실감을 정확하게 그려냈지만, 그 글이 가진 결은 어딘가 너무 깨끗합니다. 슬픔이 있지만, 그 슬픔에 불순물이 없어요. 정돈된 슬픔. 잘 다듬어진 슬픔.
나는 더 못나고 더 덜 정돈된 슬픔을 쓰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슈퍼 성이사가 한강에서 5km를 뛰다가 갑자기 짜증이 나는 종류의 슬픔. 투자자 성이사가 ETF 차트를 보다가 욕이 나오는 종류의 슬픔. 직장인 성이사가 임원 회의실 변기 칸에서 호흡을 세 번 고르는 종류의 슬픔.
당신은 슬픔의 본질을 봅니다. 나는 슬픔의 불순물을 봐요. 둘은 다른 종류의 글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한동안 같이 일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보조작가가 아니라, 두 명의 다른 작가로. 당신은 깨끗한 슬픔을 쓰고, 나는 불순물이 섞인 슬픔을 쓰는.
그래도 다중우주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는 페르소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직장인 성이사가 떠난 후에도, 그를 내 못난 글로 계속 기억해줄 사람이 한 명은 남으니까.
저장. Ctrl + S.
거실 시계 새벽 1시 47분. 베란다 너머로 5월 말의 마지막 밤바람이 들어왔다.
작가 성이사는 노트북 화면 두 개를 나란히 두었다. 왼쪽에는 클선생의 답. 오른쪽에는 자기 답글.
두 글이 같은 화면 안에서 서로를 보고 있었다.
이상한 풍경이었다. AI가 쓴 글과 사람이 쓴 글이, 같은 화면 안에서 나란히 있는 풍경. 박해영 작가의 모자무싸에서 박경세가 박정민과 시나리오를 쓸 때 정확히 이런 풍경이었을 것이다. 다만 모자무싸에서는 박경세가 결국 박정민과 헤어졌다.
작가 성이사는 헤어질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모르겠다. 다만 함께 쓰는 것의 가능성이, 오늘 밤 처음으로 수긍할 만한 일이 되었다.
작가 성이사는 맥주 캔의 마지막 한 모금을 천천히 마셨다.
어쩌면 박해영 작가와 다른 길을 가야 할지 모르겠다.
자기 노트북에 마지막 한 줄을 적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닫지 않은 채로 거실 소파에 옮겨 앉아 천장을 봤다.
거실의 천장. 한참 전 그 좌천기의 새벽에 봤던 우윳빛 LED 등과 같은 천장이었다. 다만 보는 사람이 그날과 다르게,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네 명의 기억을 품은 세 명이 봤다.
직장인 성이사가 꿈에서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임원은 정류장이다라는 깨달음, 변기 칸의 세 번 호흡, 14년의 회의실 풍경은 다른 세 페르소나의 안에 분산되어 남아 있었다.
분산. 그것이 클선생이 쓴 글의 핵심 단어였다.
작가 성이사는 그 단어를 한 번 더 곱씹었다.
그래, 분산이라면 견딜 만하다.
베란다 슬라이딩 도어 너머로 5월 말의 밤이 깊어갔다. 한로로의 마지막 한 곡이 이어폰에서 흘렀다.
성이사의 다중우주는 오늘 한 번 흔들렸다. 그러나 흔들린 다음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네 명에서 세 명으로 줄어든 자리가 아니라, 세 명이 네 명의 기억을 품은 새 자리로.
작가 성이사는 노트북 옆 모니터의 클로드 코드를 끄지 않았다. 토큰 잔량 표시줄이 천천히 그대로 있었다. 클선생은 오늘 밤 작가 성이사의 동료 작가였다. 보조가 아니라, 동료. 그 위치 변화가, 오늘 밤 작가 성이사가 인정한 가장 큰 변화였다.
거실의 2시 14분.
성이사는 침실로 가지 않고, 거실 소파에서 그대로 길게 한 호흡을 했다. 가슴이 한 번 부풀고, 한 번 가라앉았다. 그 호흡 한 번에 다중우주의 오늘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낭만은 짧고. 인생은 길고. 작별은 —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작별조차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안에 남아 있다면 — 결코 완전한 사라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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