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렁증이 만든 AI영상 프레젠테이션

2026. 6. 6. 08:10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지난주부터 성이사는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마다 천장의 우윳빛 LED 등을 보며 같은 장면을 시뮬레이션했다. 2주 뒤, 도쿄 빅스 사무실. 글로벌 1위 유통업체 월드마켓의 글로벌 사업 VP 에드워드와의 미팅.

빅스가 주선한 자리였다. 일본 종합상사 빅스는 월드마켓의 상품을 일본으로 유통하며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있었는데, 월드마켓에서 한국 상품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더 많은 한국 상품 유통과 온라인 MD 운영 대행을 맡길 대행사를 찾고 있었다. 빅스가 석테크홀딩스의 성이사를 소개했고, 도쿄에서 미팅이 잡혔다.

성이사에게는 아주 큰 기회였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성이사는 영어를 못한다. 일본어도 못한다.

통역사를 고용해 순차 통역으로 미팅을 진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순차 통역은 시간을 두 배로 늘린다. 한 문장을 말하면, 통역이 그 문장을 옮기고, 상대가 답하면 다시 통역이 옮긴다. 그 사이에 에드워드 같은 글로벌 VP는 흥미를 잃는다. 그는 석테크홀딩스만 만나는 것이 아니다. 하루에 몇 개의 미팅을 소화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성이사에게는 프레젠테이션 울렁증이 있었다. 사람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발표의 기복이 심했다. 잘할 때는 잘하지만, 긴장하면 준비한 것의 절반도 못 꺼냈다.

이 미팅이 큰 기회로 보였기 때문에, 울렁증과 자기 의심이 더 심해졌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매일 밤 잠을 가져갔다.

목요일 점심시간. 성이사는 이어폰을 끼고 회사 앞 공원을 한 바퀴 걸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공원. 벚꽃은 졌고, 이제 초록이 짙어지고 있었다. 점심 산책은 직장인 성이사의 응급 처치였다. 머릿속이 통제되지 않을 때, 15분의 공원 한 바퀴가 호흡을 정리해주었다.

공원을 걷는 동안 성이사의 안에서 세 페르소나가 깨어났다. 혼자 걷는 시간에만 일어나는 다중우주의 만담이었다.

투자자 성이사: “이건 떡상 기회야. 월드마켓이면 회사 안에서 네 입지가 한 단계 올라가. 무조건 잘 활용해.”
슈퍼 성이사: “야, 너 하프마라톤도 완주했고 동해안 국토종주 업힐도 다 넘었어. 그까짓 미팅 하나 못 하겠어? 할 수 있어.”
작가 성이사:(시큰둥하게) “…시나리오 한 번 써줄까?”

성이사는 작가 성이사의 그 한 마디에 발걸음이 멈췄다.

작가 성이사: “월드마켓 VP라면, 석테크홀딩스가 어떤 회사인지도 모를 거야. 그러면 회사 소개, 석테크홀딩스가 뭘 할 수 있는지, 월드마켓과 협업하면 뭘 만들 수 있는지. 이 셋으로 시나리오를 짜면 돼.”

 

성이사:(혼잣말) “근데 영어를 못하잖아.”
작가 성이사: “그러니까 영상을 만들면 어때?”

성이사는 공원 벤치에 잠시 앉았다.

영상이라. 시나리오는 작가 성이사가 써준다 쳐도 비디오 편집, 영어 더빙, 필요한 영상과 자료 수집, 영상 제작 업체 발주. 적어도 한 달은 걸린다. 제작 비용도 몇 천만 원은 그냥 나간다. 2주 안에 될 일이 아니었다.

성이사는 답을 하려다가 갑자기 멈췄다.

클선생, 제선생, 지선생이 모두 출동하면?

명치에 얹혀 있던 압박감이, 그 순간 다른 종류의 무게로 바뀌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가능성의 무게로.

점심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성이사는 자리로 돌아와 맥북을 켰다.

회사 소개 자료. 빅스와의 협업 히스토리. 빅스가 유통하는 한국 인기 아이템 현황 파일. 이 세 개를 클선생에게 던졌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링크드인 프로필을 캡처해서 함께 올렸다. 에드워드. 50대 초반. 월드마켓 20년 차. 글로벌 소싱 부문에서 아시아 시장 확대를 담당. 프로필 사진 속 그는 짧게 깎은 은발에 무테 안경, 정장 대신 네이비 니트를 입고 있었다. 격식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사람의 인상.

성이사:(클선생에게)
첨부한 회사 소개, 빅스 협업 히스토리, 한국 인기 아이템 현황을 바탕으로 월드마켓 글로벌 VP 에드워드를 대상으로 한 10분 분량의 프레젠테이션 영상 시나리오를 만들어주세요.
미팅 목적: 석테크홀딩스가 월드마켓의 한국 상품 유통 + 온라인 MD 운영 대행 파트너로 적합함을 설득.
최종 골: 다음 단계 미팅(파일럿 프로젝트 논의)으로 연결.
에드워드의 배경은 첨부한 링크드인 참고.

엔터.

토큰이 녹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오늘은 평소보다 더 빠르게 들렸다.

10분 분량의 영상 시나리오가 나왔다.

인트로:
Hello, Edward. Nice to meet you.

본론은 세 부분으로 정확하게 나뉘어 있었다. 회사 소개 (석테크홀딩스 = 한국·아시아의 중립 커머스 인프라). 역량 (상품 공급, 배송, 온라인 운영 대행, 광고까지 이르는 풀 밸류체인). 협업 시너지 (월드마켓 + 석테크홀딩스가 만들 수 있는 구체적 그림).

결론:

석테크홀딩스는 상품 공급, 배송, 온라인 운영 대행에서 광고까지 모든 유통 체계에서 월드마켓과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과와 신뢰는, 오늘 이 미팅의 주최자인 빅스와의 지난 협업으로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성이사는 시나리오를 읽으며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건 작가 성이사조차 이렇게는 못 쓸 수준이었다.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의 정석. 군더더기 없고, 논리가 한 줄로 흐르고, 마지막에 빅스로 닫는 구조가 완벽했다.

작가 성이사가 지나가며 한 마디 던졌다.

작가 성이사:(쳐다보지도 않고) “나는 문학적이지 않은 글은 안 써.”

질투였다. 성이사는 그 질투를 못 들은 척했다.

성이사는 곧바로 시나리오를 영문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영문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자연스러운 비즈니스 영어. 성이사가 직접 썼다면 며칠이 걸렸을, 아니 끝내 못 썼을 영어였다.

이제 영상 제작이 문제였다.

성이사는 유튜브를 켰다. AI로 영상 만들기를 검색. 두어 시간 동안 영상들을 봤다. 그리고 두 개의 도구를 찾았다.

- 클링 — 이미지를 영상으로 만들어주는 AI 도구
- 일레븐랩스 — 영어 더빙을 자연스럽게 해주는 AI 도구

성이사는 두 도구의 결제를 회사에 요청했다. 그리고 주말 내내 AI 도구들을 공부하기로 했다.

평소 성이사의 원칙은 휴일에는 쉬자였다. 그런데 이번 주만은 이번 주만 일하자로 바뀌었다. 영어도 못하고 울렁증도 있는 사람이 통역사를 거쳐 진행하는 미팅의 공포가 그만큼 컸고, 이 미팅의 목적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영어를 잘하는 박과장에게 대신 발표를 시킬 수도 있었다.

박과장. 30대 후반. 미국에서 학부를 나온 직원. 발표가 깔끔하고 영어가 네이티브에 가깝다. 그에게 맡기면 성이사는 울렁증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성이사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AI 시대에는, 각자의 문제는 각자가 해결하는 것이 맞다.

박과장에게 맡기는 것은 과거의 방식이었다. 잘하는 사람에게 위임하는 것. 그러나 AI 시대에는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았다. 도구를 다룰 줄 아는 사람과, 다룰 줄 모르는 사람만 있었다. 성이사는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이것이 휴일에는 쉬자를 이번 주만 일하자로 바꾼 진짜 이유였다.

토요일. 일요일. 성이사는 이틀간 AI 도구에 매달렸다.

지선생(GPT)의 이미지 기능으로 필요한 장면들을 생성했다. 한국 상품이 일본 백화점에 진열된 모습. 물류 센터의 자동화 컨베이어. 온라인 쇼핑몰 운영 대시보드. 광고 캠페인 시각화. 텍스트로 묘사하면  몇 분 만에 이미지가 나왔다.

성이사는 한 가지에 놀랐다. 이미지에 텍스트 깨짐이 없었다. 예전 AI 이미지는 글자가 들어가면 깨지거나 외계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깔끔했다. 모델이 등장하는 이미지도 실제 사람인지 AI인지 구분이 안 갔다.

생성한 이미지를 클링에 넣었다. 클링이 정지 이미지를 움직이는 영상으로 만들었다. 진열대의 상품에 조명이 흐르고, 컨베이어가 돌아가고, 대시보드의 숫자가 갱신되는 10초짜리 영상 클립들이 줄줄이 나왔다.

영상 편집은 맥북의 파이널컷을 썼다. 성이사가 예전에 가족 여행 영상을 만들 때 한 번 써본 적이 있는 도구였다.

일레븐랩스로  클선생의 영문 시나리오를 영어 더빙으로 만들었다. 더빙 목소리는 성우보다 더 자연스러웠다. 발성이 좋았고, 억양이 정확했고, 강조할 부분에서 정확히 톤이 올라갔다. 성이사가 직접 영어로 말했다면 절대 낼 수 없는 발음이었다.

파이널컷에 더빙 음성을 깔았다. 그 위에 클링으로 만든 영상 클립을 얹었다. 실제 회사 사진과 회사 소개서 내용을 편집해 넣었다. 배경 음악을 깔았다. 타임라인이 10분 20초로 잡혔다.

성이사는 석대표 주관 회의를 제외한 모든 회의를 미뤘다. 그리고 영상 제작에 몰입했다.

목요일. 영상 편집이 끝났다.

성이사는 완성된 영상을 회의실 빔프로젝터로 틀어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10분 20초.

Hello, Edward. Nice to meet you.

자연스러운 영어 내레이션이 흘렀다. 깔끔한 이미지가 움직였다. 논리가 한 줄로 흘렀다. 마지막에 빅스와의 신뢰로 닫혔다. 배경 음악이 적절한 무게로 깔렸다.

영상이 끝나고,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성이사는 믿기지 않았다.

이 영상을 일주일 만에 혼자 만들었다는 것이. 영상 시나리오 + 번역 + 영어 더빙 + 장면 생성 + 편집 + 배경 음악까지 — 모두를 AI와의 협업으로, 일주일 만에.

성이사의 영상 첫 작품은 직원들과의 협업이 아니었다. 성이사와 AI의 협업이었다.

월드마켓 미팅을 그토록 걱정하던 성이사가 이제는 미팅이 기다려졌다.

마치 영화를 만든 제작자이자 감독이 시사회를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다음 주 도쿄에서의 미팅이, 성이사에게는 자기 첫 영상의 시사회 개봉일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작업을 혼자 지휘하고 마쳤다는 사실이 성이사의 자신감을 키웠다. 통역사도, 박과장도, 영상 제작 업체도 없이 혼자서 해냈다.

그런데 그 자신감 옆에, 씁쓸함이 나란히 앉았다.

성이사는 회의실 빔프로젝터를 끄며 불쑥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이래서 석대표나 빅테크 경영진들이 AI 전환과 레이오프를 확대하는구나.

영어 잘하는 박과장이 필요 없었다. 영상 제작 업체가 필요 없었다. 통역사가 필요 없었다. 디자이너가 필요 없었다. 성우가 필요 없었다. 이 모든 사람의 역할을 성이사 한 명이 AI와 함께 일주일 만에 해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효율적인가. 일곱 사람이 한 달에 걸쳐 할 일을, 한 사람이 일주일에 했다. 비용은 — AI 도구 구독료 몇 십만 원과, 토큰 비용뿐이었다.

성이사는 이 깨달음의 양면을 동시에 느꼈다. 나는 유능해졌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다른 여섯 사람의 자리가 사라진다.

그런데 성이사가 도달한 마지막 결론은, 효율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아쉬움에서 시작되었다.

영어를 못한다는 아쉬움. 울렁증이 있다는 아쉬움. 통역으로는 상대의 흥미를 못 잡는다는 아쉬움. 이 아쉬움들이 필요를 만들었고, 그 필요가 성이사를 AI 협업으로 밀어 넣었다.

만약 성이사가 영어를 잘했다면? AI 영상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울렁증이 없었다면? 그냥 직접 발표했을 것이다. 결핍이 없었다면, AI를 이렇게까지 쓸 일도 없었다.

성이사는 한 줄로 정리했다.

아쉬움이 필요를 만들고,
재능은 협업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토큰을 소비하는 것이 되어간다.

예전에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여 협업했다. 영상 제작자, 디자이너, 성우, 번역가, 통역사. 각자의 재능이 모여 하나의 결과를 만들었다.

이제는 한 사람의 아쉬움이 토큰을 소비해서 결과를 만든다. 재능의 협업이 아니라, 결핍의 토큰화.

성이사는 완성된 영상 파일을 PRESENTATION_FINAL.mov로 저장했다. 그 파일 옆에, 클로드 코드의 토큰 사용 로그가 남아 있었다. 일주일간 소비한 토큰.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 로그를 보며 성이사는 자신감과 씁쓸함을 한 번에 삼켰다. 다음 주 도쿄가, 기다려지면서도 두려웠다.

 

<성이사가 AI로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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