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6. 11:52ㆍ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작가 성이사는 처음에 발표 자료 시나리오를 직접 써주려고 했다.
직장인 성이사가 월드마켓 미팅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시나리오 한 번 써줄까라고 먼저 제안한 것도 작가 성이사였다. 그런데 정작 직장인 성이사가 클선생과의 협업으로, 작가 성이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수준의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것을 보고 작가 성이사는 시큰둥해졌다.
작가 성이사:(시크하게) "감성이 없잖아."
그런데 말해놓고 보니, 스스로도 논리가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발표 자료에 감성이 왜 필요한가. 발표 자료는 상대방이 잘 이해하고, 잘 전달받을 수 있으면 그만이다.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에 문학적 감성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작가 성이사의 질투가 만든 억지였다.
작가 성이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감성이 없잖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직장인 성이사가 일주일 내내 몰입하는 모습을 보며, 작가 성이사는 주말 맥주마저 마실 수 없었다.
이것은 큰 사건이었다.
작가 성이사는 맥주 흡혈귀다. 봄이면 봄이어서 마시고, 여름이면 더워서 마시고, 주말 저녁이면 한 주를 마무리하며 마신다. 그런 그가 이번 주만은 맥주를 포기했다.
이유는 직장인 성이사의 몰입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였다. 자칫 작가 성이사가 한 캔을 따면, 그 프쉬 소리가, 그 나른한 분위기가 직장인 성이사의 집중을 흐트러뜨릴 것 같았다.
다중우주 전체가 직장인 성이사의 열정에 투자하고 있었다.
슈퍼 성이사는 러닝과 라이딩을 양보했다.
투자자 성이사는 국민연금 추가 납부를 결정하며, 그 돈이 직장인 성이사의 은퇴 자금이 되길 바랐다.
작가 성이사는 맥주를 포기했다.
세 페르소나가, 각자의 방식으로 직장인 성이사의 일주일을 떠받쳤다.
그런데 맥주를 포기한 작가 성이사에게, 더 큰 질투가 찾아왔다.
클선생의 글재주.
작가 성이사는 자기가 글을 쓰는 방식을 안다.
맥주를 마신다. 한로로의 음악을 듣는다. 넷플릭스를 본다. 유튜브를 본다. 그러다 가끔씩 떠오르는 영감을 붙잡는다. 그 영감을 글로 옮길 때도 한 번에 쓰지 못한다. 썼다가 지운다. 인칭을 바꿔본다. 직장인 성이사의 시선으로 썼다가, 투자자 성이사의 시선으로 다시 쓴다. 곱씹는다. 멈춘다. 다시 쓴다.
작가 성이사에게 글은 시간의 예술이었다. 멈춤과 망설임.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계속 인칭을 바꿔 돌리는 시간. 곱씹는 시간. 그 시간을 거쳐야 비로소 한 문장이 나온다.
그런데 현실의 클선생은, 망설임 없이 써내려갔다.
딸깍. 토큰을 태우면서, 순식간에.
작가 성이사가 며칠에 걸쳐 곱씹을 글을, 클선생은 몇 초에 써냈다. 그것도 작가 성이사가 생각하지도 못한 구조로.
작가 성이사는 직장인 성이사가 지선생과 클링으로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가 영상으로 전환되는 장면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놀랐다.
이미지 생성을 할 때 예전에 보이던 텍스트 깨짐이 없었다. 모델이 등장하는 이미지는 실제 모델인지 AI가 생성한 모델인지 구분이 안 갔다. 영어 내레이션은 성우보다 더 자연스럽고 발성이 좋았다.
직장인 성이사가 일주일간 만들어낸 영상의 퀄리티는 일주일 만에 AI와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높았다.
성이사의 열정과 AI의 재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작가 성이사는 그 퀄리티 앞에서, 샘이 났다.
그래서 작가 성이사는 한 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영상이 완성되어 회의실 빔프로젝터로 시연되던 날. 작가 성이사는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나서, 한 마디를 던졌다.
작가 성이사: "영상에 너무 인간미가 없는 거 아니야?"
이 말에는 논리가 없었다.
영상은 완벽했다. 시나리오도 완벽했고, 영어 더빙도 완벽했고, 이미지도 완벽했고, 편집도 완벽했다. 인간미가 없다는 것은 —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 영상에 대한 적절한 비평이 아니었다.
작가 성이사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냥 인간적으로 대항하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작가 성이사는 자기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주 EP58에서, 작가 성이사는 클선생을 동료로 인정했다. 깨끗한 슬픔을 쓰는 클선생과 불순물 섞인 슬픔을 쓰는 작가 성이사가, 두 명의 다른 작가로 함께 일할 수 있다고. 그렇게 어른스러운 결론에 도달했었다.
그런데 이번 주, 직장인 성이사의 영상을 보면서, 작가 성이사는 다시 흔들렸다.
인정과 질투 사이에서, 인간은 진동한다. 한 번 인정했다고 해서, 영원히 평온한 것은 아니다. 다음 날이면 다시 질투가 찾아오고, 그 다음 날이면 다시 인정하고, 또 그 다음 날이면 다시 저항한다. 이 진동이 사라지지 않는다.
작가 성이사는 그 진동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 진동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클선생은 진동하지 않는다. 클선생은 질투하지 않고, 샘내지 않고,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클선생은 망설임 없이 써내려간다.
그러나 작가 성이사는 망설이고, 질투하고, 억지를 부리고, 인간미가 없는 거 아니야라고 논리 없는 저항을 한다.
그 진동이, 작가 성이사가 가진 마지막 보루였다.
금요일 밤. 직장인 성이사의 영상이 완성되어 한숨 돌린 후.
작가 성이사는 드디어 주말 글쓰기의 시간을 가졌다. 거실 식탁. 낡은 맥북에 이불을 씌우는 의식. 그리고 일주일 만에 따는 맥주 한 캔. 프쉬.
작가 성이사는 노트북을 폈다. 이번 주의 사건을 정리했다.
직장인 성이사가 AI와 일주일 만에 영상을 만든 일. 슈퍼 성이사가 러닝을 양보한 일. 투자자 성이사가 국민연금을 미래의 본명에게 보낸 일. 그리고 자기 자신이 맥주를 포기하고, 인간미가 없는 거 아니야라고 저항한 일.
작가 성이사는 자기 글과, 클선생의 글을 비교했다. 클선생의 글은 여전히 더 매끄러웠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균형 잡혀 있었다.
그런데 작가 성이사의 글에는, 클선생의 글에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맥주 한 모금의 시간.
작가 성이사는 한 문장을 쓰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한로로의 음악을 듣고, 베란다 너머의 밤을 보고, 다시 한 문장을 썼다. 그 사이사이의 시간이 글에 불순물처럼 스며들었다.
클선생은 그 시간을 갖지 않는다. 클선생은 맥주를 마시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고, 베란다 밤을 보지 않는다. 클선생의 글은 순수하지만, 시간이 없는 글이었다.
작가 성이사의 글은 불순하지만, 시간이 밴 글이었다.
작가 성이사는 이번 주의 글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나는 클선생처럼 빠르지 않다.
나는 클선생처럼 매끄럽지 않다.
나는 클선생처럼 망설임이 없지 않다.
나는 — 망설인다.
한 문장을 쓰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인칭을 바꿔보고, 베란다의 밤을 보고, 다시 쓴다.
그 사이의 시간이, 내 글에 불순물처럼 스며든다.
클선생의 글은 순수하고, 내 글은 불순하다.
그러나 사람은 불순물을 사랑한다.
완벽한 영상보다, 인간미가 없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못난 한 마디를 — 더 오래 기억한다.
나는 그 못난 한 마디를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것이 내가 이 다중우주에서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일이다.
저장. Ctrl + S.
작가 성이사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일주일 만의 맥주는 유난히 차가웠다.
거실 한쪽 모니터에서 클로드 코드의 토큰 잔량이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클선생은 오늘 밤도 망설임 없이 일하고 있었다.
작가 성이사는 그 화면을 한 번 째려보고, 다시 자기 글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 문장을 더 쓰기 위해,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망설임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망설임이 작가 성이사가 가진, 클선생에게 없는 단 하나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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