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13. 07:23ㆍ성이사의 다중우주 - 일상 에피소드
월요일 아침 김포공항.
도쿄 출장을 위해 성이사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탑승 게이트로 가는 길에 가방을 한 번 더 열어 맥북을 확인했다. 지난 한 주 내내 매달려 만든 AI 프레젠테이션 영상의 원본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오늘 성이사에게 맥북은 여권보다 중요했다.
탑승구 앞에서 박과장을 만났다. 미국에서 학부를 나온 직원. 영어가 네이티브에 가깝고 발표가 깔끔한 사람. 오늘 그의 공식 역할은 통역이었다.
박과장이 넌지시 물었다.
"이사님, 정말 통역 말고는 제가 발표 안 해도 될까요?"
"응. 한번 믿어봐."
성이사는 자신 있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박과장에게 영상을 미리 공유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박과장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 겹 더 얹혀 있었다.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박과장은 자기 노트북을 두 번이나 다시 열어봤다.
하네다 공항에 내린 성이사는 모노레일을 타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 곧장 빅스 본사로 향했다.
평소라면 당연히 모노레일이었다. 출장비를 아끼는 것이 임원의 습관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월드마켓 미팅이 그만큼 중요했고, 도착하자마자 최상의 컨디션이어야 했다. 택시 안에서 눈을 감고 영상의 흐름을 머릿속으로 한 번 더 돌렸다. 인트로, 회사 소개, 인기 제품, 한국 콘텐츠, 그리고 마지막 한 줄.
게다가 성이사는 지난 한 주 동안 자기가 만든 영상으로 충분히 밥값을 했다고 생각했다. 택시비 정도의 지출에는 조금의 찔림도 없었다.
빅스 본사에 일찍 도착한 성이사는 1층 커피숍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종이컵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긴장이었다. 커피를 다 마실 즈음, 마츠다 상무가 로비로 내려왔다.
12층. 회의실.
마츠다 상무의 안내로 에드워드 부사장과 인사를 나눴다. 에드워드는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 파란 눈에 백인, 짧게 깎은 은발. 눈빛이 매서웠다. 처음 악수를 하는 순간, 성이사는 그 눈빛에 한 번 위축되었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곧 미국인 특유의 유머로 분위기를 풀었다.
"빅스를 통해서 석테크홀딩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에드워드는 지난달 한국에 시장 조사를 갔던 이야기를 꺼냈다. 성수동에서 삼겹살을 먹었던 추억. 한국 음식이 정말 맛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기 아내와 딸이 방탄소년단을 좋아한다는 이야기까지. 회의실 공기가 한결 따뜻해졌다.
성이사는 박과장의 통역을 통해 답했다.
"석테크홀딩스와 한국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준비한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에드워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영상까지 준비하셨다고요? 놀랍네요. 어서 봅시다."
성이사는 긴장했다.
그 긴장은 석테크홀딩스의 임원으로서 느끼는 긴장과는 결이 달랐다. 오늘 이 자리는, 성이사가 자기가 만든 영상의 감독으로서 평가받는 자리이기도 했다. 영화 시사회에서 제작자가 관객의 첫 반응을 기다리는, 바로 그 종류의 긴장이었다.
맥북에서 스페이스 바가 눌렸다. HDMI 케이블을 타고 영상이 회의실 화면으로 전송되었다.
화면이 밝아지고, 영어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Hello, Edward. Nice to meet you."
에드워드가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영상은 석테크홀딩스의 회사 소개, 인기 제품, 한국 콘텐츠로 흘러갔다. 중간에 에드워드가 방금 이야기한 삼겹살과 방탄소년단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에드워드의 눈이 커졌다. 자기가 한 이야기가 영상 안에 들어 있었다. 사실 그 장면은 성이사가 미팅 직전에 들은 이야기로 즉석에서 넣은 것이 아니라, 에드워드의 링크드인과 공개 인터뷰를 분석해 미리 준비해둔 것이었다. 한국 콘텐츠는 월드마켓의 기회라는 한 줄로 영상은 맺음을 지었다.
10분.
영상이 끝나자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에드워드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수많은 파트너를 만나봤지만, 이렇게 준비가 잘 된 파트너는 처음입니다. 영상 제작에 이렇게 공을 들인 파트너는 더더욱 처음이고요."
그러더니 한 가지를 물었다.
"성이사님, 몇 분이서, 얼마나 노력해서 만드신 겁니까?"
성이사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답했다.
"여러 팀원의 도움으로, 한 달간 제작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초보인 성이사가 혼자서 AI 도구로 열흘 만에 만든 영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게도 노력의 무게가 가벼워질 것 같았다. 한 달간 여러 사람이 매달렸다고 해야, 에드워드가 느끼는 정성의 무게가 유지될 것 같았다. 성이사는 진실을 숨기는 대신, 노력의 외양을 지켰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준비가 잘 되어 있고, 빅스가 보증하는 회사라면, 본격적으로 진도를 나가봅시다."
그는 옆자리의 부하직원 나디아를 돌아봤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30대 여성. 손에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나디아, 내부 개발팀하고 사업팀 연결해줘요."
나디아가 태블릿에 무언가를 빠르게 입력했다. 마츠다 상무가 성이사를 보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미팅이 끝나자, 성이사에게 졸음이 쏟아졌다.
이 한 번의 미팅을 위해 지난 한 주를 통째로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긴장이 풀리자 몸이 한꺼번에 가라앉았다. 마츠다 상무는 에드워드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에 한잔하자고 했다.
성이사는 호텔에 짐을 풀고 잠시 누웠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슈퍼 성이사가 보챘다. 일본에 왔으니 황궁 한 바퀴는 뛰어야 하지 않겠냐고. 황궁 둘레 5킬로미터는 도쿄 러너들의 성지였다. 그러나 성이사는 기력이 전혀 없었다. 슈퍼 성이사의 보챔을 못 들은 척하고, 기절하듯 낮잠에 빠졌다.
저녁. 마츠다 상무가 예약한 긴자 라이온.
오래된 비어홀이었다. 천장이 높고 나무 기둥이 굵었다. 마츠다 상무는 자리에 앉자마자 성이사에게 연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스고이. 스고이데스네."
영상을 정말 잘 만들었다고, 팀원들도 꼭 칭찬해주라고 했다. 성이사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결심한 듯 자기 고백을 했다.
"마츠다 상무님. 그 영상, 사실은 제가 혼자 AI로 만들었습니다."
마츠다 상무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혼자서요? 정말로 혼자 AI로 만든 겁니까?"
"네. 영어도 못하고 발표 울렁증도 있어서요. 일주일 좀 넘게 매달렸습니다."
마츠다 상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에드워드가 석테크홀딩스에 관심이 생긴 것 같아요. 한국 갈 때 같이 방문하자고 하더군요. 그리고 나디아한테 석테크홀딩스 시가총액이 얼마인지도 알아보라고 했답니다."
마츠다 상무가 기분 좋은 농담을 건넸다.
"잘하면 투자받는 거 아니에요? 월드마켓이 석테크홀딩스에 투자라."
성이사는 기분이 좋았다.
맥주를 연신 들이켰다. 다만 기분에 취해 일을 그르치지 않으려고, 안에서 들뜨려는 작가 성이사를 한 번 단속했다. 오늘은 직장인 성이사의 날이지, 작가 성이사가 낭만에 빠질 날이 아니었다.
AI를 통해 혼자 만든 기적의 프레젠테이션. 자기 문제를 자기가 AI로 해결한 결과. 무엇보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인정받은 후의 맥주는 맛있다.
그것이 직장인 성이사의 보상이었다. 긴자 라이온의 천장 높은 홀에서, 성이사는 그 보상을 천천히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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