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를 살아가는 모사 삼국지 가후
2025. 2. 24. 08:46ㆍ삼국지 인물론
**가후(賈詡)**는 『삼국지』 정사와 『삼국지연의』에서 모두 “처세술의 달인”으로 묘사될 만큼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오랜 기간 무탈하게 살아남은 뛰어난 모사(謀士)였습니다. 그가 여러 군벌을 거치면서도 계속해서 신임을 얻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아래에서는 가후가 ‘처세의 신’이라 불리는 배경과 특징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여러 군벌을 거치며도 신망을 잃지 않았던 이유
- 시기를 잘 읽고 과감히 주군을 변경
- 가후는 동탁(董卓) 휘하에서 처음 이름을 알렸으며, 동탁 사후 그 세력을 계승한 이각(李傕)·곽사(郭汜) 휘하에 몸담았습니다. 그러나 이각과 곽사는 내부적으로 권력다툼이 심했고 정국 운영 능력이 떨어졌습니다.
- 이각과 곽사가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자, 가후는 눈을 돌려 장수(張繡)에게 의탁하였고 이후 조조(曹操)에게 귀부(歸附)했습니다.
- 이 과정을 통해 가후가 보여준 특징은 **“상황을 냉철하게 읽고, 새로운 세력에게로 전환하는 과감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주군들과 심한 갈등이나 원한을 남기지 않은 점에서 그의 처세술이 돋보입니다.
- 주군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며 핵심 조언만 전함
- 이각·곽사 시절: 내부 항쟁 시기에 극단적으로 편을 들거나 특정 인물을 제거하는 책략을 주장하지 않고, 자신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을 만한 선에서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 장수 시절: 장수가 조조와 대립할 때, 가후는 장수에게 조조와 동맹을 맺고 항복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이것이 장수의 생존에도 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실제로 장수는 가후의 말을 받아들여 조조에게 항복했고, 이후에도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 조조 시절: 과도하게 야망을 드러내지 않고, 꼭 필요한 순간에만 정곡을 찌르는 진언(進言)을 하여 조조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조조가 초기에 연주(兗州)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갈 때부터 많은 모사를 거느렸지만, 가후는 다른 참모들과 달리 돋보이는 “결정적” 계책을 제안하여 실질적인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과도한 공을 드러내지 않아 견제를 피함
- 겉으로는 수동적이지만, 속으로는 유연하게 전략을 준비
- 가후는 눈에 띄는 무공(武功)을 세우거나 대규모 작전을 지휘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군사·외교·내정 분야 등에서 핵심적 조언을 하며 주군에게 존재 가치를 확실히 어필했습니다.
- 그러나 과도한 개인적 공적을 주장하거나 세력을 키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주군들에게 경계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 주군의 신하들과도 큰 갈등 없이 지냄
- 뛰어난 책사들은 종종 동료나 경쟁자들과 갈등을 빚어 목숨을 잃거나 좌천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예: 법정(法正)과 같은 경우는 비교적 일찍 죽었고, 동료와의 알력 싸움 등으로 고난을 겪는 사례도 많았습니다).
- 가후는 오히려 “적절한 거리 두기와 협력”으로 다른 참모 혹은 장수들과 공개적으로 크게 충돌한 기록이 적습니다. 따라서 내부 다툼이나 왕권 교체기에도 큰 타격 없이 살아남았습니다.
3. 냉철하고 현실적인 조언의 예시
- 장수(張繡)가 조조를 배반 후 재항복할 타이밍
- 『삼국지연의』에서는 장수가 이미 조조를 배반한 상황에서, 가후가 “지금 돌아서서 항복하더라도 조조는 대업을 위해 인재를 잃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니 받아줄 것이다”라는 논리로 설득합니다.
- 실제 역사서(진수의 『삼국지』)에도 장수가 재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했음을 기록하고 있고, 가후 역시 그 공로로 조조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 이각·곽사 내분 상황에서의 이탈
- 동탁이 죽은 뒤 이각·곽사가 낙양을 유린하고 황제를 협박했으나, 내부적으로 지속적으로 분쟁이 벌어지자 가후는 빠르게 이각과 곽사가 몰락할 것을 예측했습니다.
- 한편, 이각·곽사 세력이 붕괴하기 전까지는 표면상 충성을 유지하며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처신했고, 이후로는 빠르게 다른 세력(장수)로 옮겨 탔습니다.
- 조조 휘하에서의 ‘욕심 자제’
- 가후는 조조에게 귀의한 뒤로 꾸준히 자문 역할을 맡았지만, 지나치게 공을 드러내지 않았고 관직 역시 자신의 야망을 부각시키지 않는 선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 이는 훗날 조조 사후, 조비(曹丕)·조예(曹叡) 등으로 황제가 교체되는 시기에도 변함없이 신임을 얻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4. 사마의(사마위)와의 비교
- 사마의는 조조 가문(위(魏) 왕조)에서 권력을 잡기까지 매우 조심스럽게 처세했고, 후대에는 실제로 위나라의 실권을 장악해 진(晉) 왕조로 이어지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 다만 사마의는 조조(曹操)·조비(曹丕)·조예(曹叡) 등 황제가 교체될 때마다 자신의 가족을 지키고, 정적들에게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리며 신중을 기해야 했습니다.
- 가후 또한 조조 휘하에서 안정적 지위를 유지했지만, 사마의처럼 왕조 교체기 자체를 주도하거나 과감하게 권력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덕에 상대적으로 부담과 의심에서 자유로운 ‘조언자’로 남아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 특징입니다.
5. 가후가 ‘처세의 신’이라 불리는 요약적 이유
- 전란의 소용돌이에서도 빠른 판단과 유연함
- 세력이 약해질 조짐이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다음 길을 모색하되, 원한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만 자리를 뜨거나 협상을 시도하는 외교적 수완을 보임.
- 공을 세워도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음
- 계책을 내어 주군에게 핵심적인 도움을 주지만, 당대 유명 모사들(봉기(逢紀), 곽가(郭嘉) 등)처럼 과도한 공명심을 드러내거나 주도권 다툼을 벌이지 않음.
-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정확히 파악
- “군주의 결점을 보완하고, 중요한 시기에만 도움을 주는 모사”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오히려 군주의 신뢰를 굳건히 함.
- 내부 정치적 갈등에 깊이 얽히지 않음
- 다른 신하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특정 파벌에 치우치지 않아 숙청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함.
결론
가후는 혼란스러운 말기의 군벌 시대와 위(魏) 왕조 초기까지 크게 흔들리지 않고 생존했을 뿐 아니라, 조조 및 후계자들에게까지 꾸준히 신임을 얻었던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그 비결은 “상황을 꿰뚫어 보는 냉철함과 과도한 야망을 드러내지 않는 조심스러운 태도”였습니다. 덕분에 그는 동탁 세력이 몰락한 뒤 이각·곽사, 장수, 조조로 이어지는 군벌 이동을 거듭하면서도 오랜 세월 무탈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마의(사마위)의 처세술도 대단했지만, 사마의는 훗날 적극적으로 권력을 잡아 왕조를 갈아엎은 반면, 가후는 철저한 ‘모사’의 위치에 머무른 채 생존과 영향력을 함께 챙긴 인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후대에 가후는 ‘처세의 신’이라 불리며 역사·소설 팬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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