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리스튜디오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여성관과 전쟁

2025. 3. 13. 09:57이런저런 탐구

1. 가족 배경과 성장 과정: 어머니와 ‘식모 역할’의 자아

미야자키 하야오는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 미야자키 요시코는 지적인 성품으로 사회 통념에 쉽게 따르지 않는 강인한 여성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947년부터 8년에 걸쳐 어머니가 척추 결핵을 앓아 병원과 가정을 오가며 요양하였고, 그 동안 어린 미야자키와 형제들이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이는 집안에서 사실상 ‘어머니 부재를 메우는 식모 역할’을 아이들이 떠맡은 것과 같았다. 어머니 요시코는 미야자키와 특히 가까웠고 그의 세계관과 작품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실제로 미야자키의 여러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어머니 요시코에게서 영감을 받아 창조되었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투병과 그로 인한 가족 내 역할 변화는 훗날 미야자키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픈 엄마”와 이를 돌보거나 홀로서야 하는 아이 캐릭터의 원형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주요 작품 속 반복되는 여성 캐릭터 패턴 분석

(아픈 엄마와 강인한 소녀)

미야자키의 작품 세계에서는 병약하거나 부재하는 엄마와 용감한 여성 주인공이라는 두 유형의 여성상이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패턴은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며, 여러 작품에서 변주되어 반복된다. 대표적인 예시는 다음과 같다.

(1) 《이웃집 토토로》(1988)

시골로 이사 온 자매 사츠키와 메이는 병원에 입원 중인 어머니(카스카베 야스코)를 둔 설정이다. 어머니의 병은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지만, 실제 미야자키의 어머니가 앓았던 척추 결핵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품은 미야자키 감독이 자신의 소년 시절을 재구성하여, 유년기의 꿈과 악몽을 마법적인 세계로 승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에는 “엄마의 부재와 죽음에 대한 불안, 그리고 도시에서 시골로의 이주” 등 미야자키가 겪은 어린 시절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고 해석되며, 어머니의 병환 속에서도 두 소녀가 자연의 정령 토토로를 만나 보호와 치유, 회복의 세계를 경험한다.

(2)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10살 소녀 치히로가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와 떨어져 낯선 영혼의 세계에서 모험하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는 직접적으로 “아픈 엄마”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부모가 딸 곁을 떠나있는 유사한 구도가 그려진다. 치히로는 부모의 부재 속에서도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강인한 주인공으로 성장한다. 미야자키는 이 영화에 대해 “친구들의 어린 딸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만들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으며, 겁 많고 나약했던 치히로가 책임감 있고 용감한 인물로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소녀도 어떠한 구원자 없이 스스로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감독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3) 《바람이 분다》(201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로센 전투기 설계자 지로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은 남성 주인공을 내세우지만, 여성 캐릭터 ‘나호코’가 결핵을 앓는 환자로 비중 있게 등장한다. 이는 1930년대 일본의 결핵 유행 상황을 반영함과 동시에, 어린 시절 어머니의 투병을 지켜본 미야자키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다. 원작 소설에는 없는 결핵환자 아내 캐릭터를 추가한 것은, 병약한 여성과 이를 지켜보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시금 다루고자 한 미야자키의 의도로 해석된다. 이렇게 병약한 여성 캐릭터가 주요 서사에 자리 잡는 것은 미야자키에게 개인적으로 의미 깊은 주제임을 보여준다.

결국 미야자키의 많은 작품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주체적으로 모험을 이끄는 한편, 어머니의 부재나 병환으로 인한 결핍이 서사의 배경으로 자리한다. 이러한 반복적 캐릭터 구도는 단순 우연이 아니라 그의 성장 과정에서 비롯된 원형 경험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3.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성관과 창작 철학

(인터뷰 발언 중심)

미야자키 감독 본인은 여러 인터뷰에서 강인한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는 창작 철학을 직접 설명해왔다. 2013년 한 인터뷰에서 “내 영화들 중 많은 작품에는 강한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용감하고 자립적인 소녀들은 자기 신념을 위해 망설임 없이 싸운다. 그들에게 친구나 지지자는 필요할지언정, 절대로 구해줄 ‘영웅’은 필요하지 않다. 여성이 남성 못지않게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는 여성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작품을 통해 강조한 것이다.

그는 왜 특히 소녀를 주인공으로 삼느냐는 질문에 대해, “여자 아이가 주인공이면 어떤 역경에서도 살아남을 것 같은 현실감이 있다. 남자 아이는 이상주의에 빠질 때가 많지만, 여자 아이는 보다 현실적이고 강인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당찬 자신의 어머니를 지켜보며 형성된 그의 여성관과도 닿아 있다. 미야자키는 어머니로부터 현실 속 강한 여성상을 접했고, 일본 신화 속 여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반면, 현대 사회에서 여성들이 제약을 받는 모순에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미야자키는 영화 속에서만큼은 여성 캐릭터들에게 자유롭고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전통적 여성상에 대한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제작 의도 역시 주위의 어린 소녀 관객들이 스크린 속 치히로를 통해 자신감을 얻길 바랐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발언들은 미야자키 작품의 여성 캐릭터들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감독 자신의 신념과 의도가 담긴 결과물임을 잘 보여준다.

4. 작품 속 전쟁・자연파괴 메시지와 개인적 경험의 연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또 다른 큰 축은 반전(反戰) 사상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신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 전쟁 체험과 반전 메시지

미야자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년기를 보낸 전쟁 세대다. 1944년 도쿄 대공습을 피해 가족과 함께 지방으로 피란했고, 어른들이 전장에서 겪은 잔혹행위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분위기와 본토가 당한 공습의 참상을 동시에 체감하며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그는 전쟁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수치, 혐오, 두려움)을 품었고, “나라가 참 멍청한 짓을 저질렀구나” 하며 일본을 미워하기까지 했다고 회고했다.

한편 미야자키의 아버지는 전쟁 중 전투기 부품 공장을 운영했는데, 전쟁 이후에도 이에 대한 반성과 책임의식이 부족했다. 청소년기였던 미야자키는 아버지와 군수산업 종사자들의 전쟁 책임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전쟁의 부조리와 거짓 영웅주의를 날카롭게 인식하게 했으며, 이후 꾸준히 평화주의적 메시지를 작품에 담게 만들었다.

실제로 미야자키는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항의해 오스카 시상식 참석을 거부하는 등 일관된 평화주의자 행보를 보여 왔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인류의 끝없는 전쟁과 군국주의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고, 《모노노케 히메》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인간의 탐욕과 전쟁이 빚어낸 파괴를 그려낸다. 특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원작 소설에는 없던 폭격 장면을 추가해 반전 메시지를 강조했는데, 이는 당대 이라크 전쟁 등 현실의 전쟁에 대한 감독의 분노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2) 자연 파괴에 대한 경고와 환경주의

미야자키 작품의 또 다른 큰 주제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다. 그는 어린 시절 전쟁으로 황폐해진 풍경을 직접 본 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며 훼손되는 자연에도 깊은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30대에 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온 미야자키는 “이 섬나라 일본의 식물과 자연 그 자체를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다”고도 언급하며 자연에 대한 애착을 표했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 속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산업문명이 초래한 생태계 파괴와 대규모 전쟁 이후의 황폐한 세상을 그렸고,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숲의 신령과 동물이 자연을 훼손하는 인간들과 맞서 싸우며, 개발과 정복에만 혈안이 된 인간 문명의 비극을 경고한다. 《벼랑 위의 포뇨》 역시 환경오염으로 위기에 처한 바다를 배경으로, 인간과 자연 간의 균형 문제를 다룬다.

미야자키는 군국주의와 자연파괴가 모두 미래 세대를 위협하는 잘못된 길임을 강조해 왔다.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일본 사회는 인구를 대폭 줄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지속가능한 생태사회이며, 이를 위해서는 어떤 산업적 성과나 국가적 위신보다도 평화와 환경 보호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의 반전 메시지와 환경 보호 메시지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전쟁의 참화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결론: 개인적 경험이 빚어낸 보편적 감동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평생 쌓아온 신념을 애니메이션 이야기 속에 녹여냄으로써,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인 감동으로 승화한 거장이다. 어린 시절 병약한 어머니를 둔 경험은 강인하면서도 배려심 깊은 소녀 주인공과 결핍을 안고 있는 모성 캐릭터의 반복으로 이어졌고,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몸소 겪은 기억은 평화와 생명 존중이라는 테마로 작품 전반에 흐른다.

공식 인터뷰와 평론, 연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미야자키의 작품 세계는 결코 창작자의 상상력만으로 이루어진 허구가 아니라 그의 삶과 신념의 반영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정성이 있기에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많은 이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