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6. 07:19ㆍ심리/나의 공황장애 극복기
1년간 이어진 공황장애와의 긴 싸움은 나에게 뜻하지 않은 선물을 남겼다. 0.1톤이라는 무거운 몸과, 날카로운 예민함 대신 찾아온 느긋하고 편안한 성격이 그것이었다. 치료에 쓰인 약물 덕분에 내 안의 불안은 점차 옅어졌고, 나는 이전처럼 밤새도록 일을 붙들고 고민하기보다 "내일이면 괜찮겠지"라며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회사 생활도 조금 더 여유로워졌고, 동료들과 파트너사와의 관계도 부드러워져서 술자리와 저녁 자리가 늘어났다.
하지만 그렇게 평화를 누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새로운 종류의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장소를 탈출하고 싶거나 숨 막히는 불안은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이대로 편안히 지내다가는 경쟁에서 영영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 다시금 예전의 날카롭고 유능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미 익숙해진 편안함 속에서 나는 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점점 현실에 무뎌지고 있었다.
동료들과 보스 역시 나의 변화와 둔화된 업무 속도를 알아채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내가 확인한 일조차 다른 이들이 다시 체크했고, 가끔 보스는 내 업무 결과에 의문을 품기도 했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나 자신을 불태우며 일에 몰두했던 예전과, 공황장애 이후 내 몸을 지키기 위해 조심스러웠던 현재의 업무 성과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매번 다짐만 하며, 결국 주말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보상하듯 맥주와 안주를 앞에 두고 휴식을 취했다. 조직의 리더로서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날카롭게 대응해야 했지만, 다시 공황장애의 늪에 빠질까 두려워 그런 고민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결국 그 안일함에 대한 대가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어느 날 보스는 나에게 미리 대비하지 않은 업무에 대한 질책과 함께 "이런 식으로는 함께 일하기 어렵다"는 냉정한 통보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대 후반의 젊은 여자 매니저를 내 자리에 앉히겠다는 통보와 함께 나에게 최소 인원만 데리고 무언가 다른 일을 생각해보라고 제안했다.
그 날 밤 나는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동안 내가 회사를 위해 헌신하며 쌓아왔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듯했고, 그 자리를 경험이 적은 젊은 매니저에게 넘겨준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부하 직원들과 가족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막막했고, 회사 안팎의 수근거림이 두려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좌천의 현실은 예상보다 더 잔인했고, 나는 다시 공황장애의 증상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함을 느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 휴가를 내고 산을 올랐지만, 땀에 젖고 숨이 차올라 결국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며칠간의 휴가 동안 나는 카페에서 창업 아이디어를 고민하기도 하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지만, 마음 깊숙한 불안과 억울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다시 병원에 갈까 고민했지만 지난 1년의 노력이 너무 아까워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병원 문 앞에서 망설였다.
결국 나는 형에게 털어놓으며 도움을 청했다. 형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나에게 "일 말고 다른 취미나 즐길 거리가 있냐"고 물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고, 일이 무너지자 내 삶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휴가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 보스를 만났다. 그는 내가 회사를 그만두거나 머무르겠다고 할 줄 알았지만,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해외지사 관리자로 일본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보스는 고민 끝에 내 요청을 받아들였고, 나는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가기로 했다.
남들의 시선이나 자존심보다도 다시 공황장애의 늪으로 빠지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나는 다시 한 번 공황장애 치료와 재발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일본에서의 새로운 삶을 조용히 시작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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